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틀렸어!
근사한 곳에 따로 숨겨져 있을 것 같던 곳들이
너무 어이없게, 가깝게, 별거 아니게 있어.
진짜 허무하게 아름답다.
보란 듯이 가만히 있는 파리.
누군가를 좋아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 그 애가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좋아했고, 그 덕에 피아노와 친해졌다. 졸업한 뒤로 그 애를 한 번도 다시 본 적이 없지만 그 곡만은 선연히 기억했다. 어느 곳이든 피아노가 보이면 앉아서 그 곡을 쳤다. 그게 재즈인지도 모른 채 마냥 좋아했다. 그 이후로 다시 피아노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건 15년 만이었다. 수업 첫날, 나는 손과 발을 덜덜 떨면서 쌤 앞에서 첫 연주를 했다. 첫사랑 앞에서는 잘 보이고 싶어 떨렸고, 그의 앞에서는 칭찬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나는 다시 학생이 되어 누군가에게 내 부족함을 들키는 것이 어색했다. 실수를 창피해하다가 다음 박자를 놓쳤다. 쑥스러움이 내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쌤은 피아노 의자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장난스러워야 해요! 조금은 바보같이."
그는 연주로 이 말의 의미를 들려줬다. 그는 일부러 박자를 놓치기도 했다. 그의 연주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웠고, 계획된 듯하면서도 엉성했다. 또 튕겨나갈 듯하면서도 얄밉게 박자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쌤은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년처럼 유려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연주를 이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부끄러웠다. 피아노 앞에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듯 보였지만, 나는 쭈뼛거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진지하지 못한 것은 더 큰 잘못이다. 비엔나에서 들었던 발레 수업을 떠올렸다. 어설픈 동작을 하면서도 웃음기 없이 진지했던, 비장함이 가득했던 사람들. 나는 그들의 비장함을 빌려와야 했다. 나는 쑥스러움을 털어내고자 노력했다.
무언가에 홀려 있는 상태가 되려면 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 하나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단호함을 갖는 것.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은 깨끗해진다. 그 순간에 명확히 존재하게 된다. 눈을 질끈 감고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치열하고 얼얼하게, 그것밖에는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날들을 경험하다 보면 제각기 흩어져 힘이 없던 자아가 하나로 모여 보란 듯이 할 일을 해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작은 몰입들이 쌓이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차근차근 만나는 일이며, 찜찜함 없는 깊이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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