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어떤 문장이 있는가?
당신에게 쌓여있는 문장이 곧 당신이다.

당신이 어제오늘 보낸 문자나 채팅 앱을 다시 열어 살펴보라. 용건은 빼고 말끝을 어떻게 맺고 있는지 보라. 친한지 안친한지, 기쁜지 슬픈지, 자신감 넘치는지 머뭇거리는지, 윗사람인지 아랫사람인지 다 드러난다.

친할수록 어미를 일그러뜨려 쓰거나 콧소리를 집어넣고사투리를 얹어놓는다. 아웅, 졸령’ ‘언제 가남!’ ‘점심 모 먹을껴?’ ‘행님아, 시방 한잔하고 있습니더’ ‘워메, 벌써 시작혀부럿냐’. 친하지 않으면 ‘습니다‘를 붙인다.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내봤자, 결석을 통보할 때는 ‘이러이러한 사유로 결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메일을 보낸다. 용기가 흘러넘치던 학생한테서 받은 ‘죄송한데 사유는 비밀이고 오늘 수업 결석 하겠습니다’가 친밀함의 최대치였다.

패랭이꽃도 예쁘게 피고 하늘도 맑아 오늘 결석하려구요!‘라는 메일을 받는 게 평생소원이다.

세월이 지나면 말끝이 닳아 없어지기도 한다.
‘어디?’ ‘회사’ ‘언제 귀가?’ ‘두 시간 뒤.
말끝이 당신이다.

질문하지 말고 감탄하라. "하늘이 높구나." "그새 풀이 많이 자랐네." "의젓해졌구나." 미래를 묻지 말고 과거를 얘기 하라. "할아버지는이런 분이셨다." "여기가 엄마가 다닌 학교란다." 소소한 얘기를 하라. "이렇게 하면 밤이 모양 나게 잘 깎여." "전을 망가뜨리지 않고 뒤집는 방법을 알려주마."
질문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집은 사람이 기둥인데,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는 기울어진 가세를 낡은 기둥에서 눈치챘다. 철학은 말을 음미하고곱씹고 색다르게 보는 데서 시작한다. 어느 학생은 ‘오른쪽’이란 말을 북쪽을 향했을 때의 동쪽과 같은 쪽‘이라는 사전뜻풀이가 아닌, ‘타인과 함께 있기 위해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매력적인 뜻으로 바꾸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오른쪽귀를 앓아 늘 다른 사람의 오른쪽에 있었다. 그래야 왼쪽 귀로 들을 수 있으니까. 몸의 철학이다. 흙먼지 속에 피어있는것이 기특해서 코스모스를 좋아한다‘는 엄마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생각보다’라는 말은 나도 모르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표현이다. 상대에 대해 미리 어떤 기대나 예측, 평가를 하고있었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못생겼더라" "생각보다 일을 못해" "생각보다 안 어울리네"처럼 부정적인 평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생각보다 일을 잘하는군" "생각보다 멋있네요"처럼 겉보기에 칭찬으로 들리는 말도 상대에 대한 애초의 기대가 별로였음을 몰래 감추고 있다. 그냥 "일 잘하는군" "멋있네요"라고 하면 된다. 마음속 생각과 입 밖으로 끄집어낼 말은 같을 수 없다. 생각과 말이 일치할 때 도리어 문제가 생긴다. 어차피 모든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난다. 굳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시시콜콜 보여줄 것까지는 없다.

진정한 행복은 ‘속 시끄러운 생각을 멈추는 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시끄러운 소리는 그것대로 놔두더라도 밖으로 드러나는 말은 매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조심해야 한다. 편협한 자신이 드러나고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이라면 더 조심해야 한다. 생각은 자유롭게 하되, 표현은 절제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날아다니는 돼지’는 없다. 그게 중요하다.
없는데도 의미를 아니까 신통한 일이다. 흔히 말의 의미를사물과 연결시킨다. ‘손톱’이 뭐냐고 물으면 ‘이거 하면서 손톱을 가리킨다. 하지만 ‘날아다니는 돼지’의 예에서 보듯이,
말의 의미는 사물로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는 말을 이해하기위해 자신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결합한다. 돼지의 생김새와새의 날갯짓을 합해 새로운 조합을 만든다.

그런데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에 떠올리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침 밥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뜨끈한 국에 흰 쌀밥일 수도 있고, 식빵에 딸기잼일 수도 있고, 우유에 시리얼일 수도 있다. 말의 의미가 다르다는것은 사람마다 의미를 더르게 구성한다는 말이다. 경험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를 만든다.

소통이란겉과 속, 표면과 뒷면이 배반적인 말 사이를 작두 타듯 위태로우면서도 날렵하게 헤엄치는 것이다. 바로 말의 이중성과함께 사는 것.

마을 꼬맹이들이 초승달을 쳐다보며 왜 저렇게 생겼냐 묻는다. "하나님이 쓰는 물잔이라 목이 마르면 물을 부어 마신다"고 했다. "정말요?"(이게 끝이면 좋으련만, 엄마한테 달려가 ‘엄마! 하나님이 초승달로 물을 따라 마신대’라며 일러바친다. 헉, 잽싸게 피신)

인간의 본성 중에서 좋은 게 하나 있다. 뭔가를 잘 못하는능력‘이다. 잘할 수 있는데도, 잘 못하는 능력. 가장 빠른 길을알면서도 골목길을 돌아 돌아 유유자적하는 능력. 방탄소년단 수준의 춤 실력이 있지만 흥을 돋우려고 막춤을 추고, 더 먹을 수 있지만 앞사람 먹으라고 젓가락질을 멈춘다. 당신도 목발 짚은 사람이 있으면 앞질러 가기가 미안해 걸음을 늦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능력을 덜 발휘하지 않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새들은 최선을 다해 울고, 고양이는 있는 힘껏 쥐를 잡는다. 너나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야수사회다.

가진 능력보다 잘 못하게 태어났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농담이다. 농담은 심각한 말의 자투리이거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간식이 아니다. 그 심각함과 진지함 자체가 ‘별것 아님(!)‘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허세가 아니다. 외려 가난할수록, 나이 들수록, 난관에 처했을수록, 다른 꿈을 꿀수록 ‘실’없고 ‘속’없는 농담은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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