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성이라는 개념은 무척이나 모호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지도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현실을 잘 설명해주는 개념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익명의 사람들 틈에서 간섭받는 것을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고독, 외로움, 관계의 상실, 무위(無爲), 소외의 상태에 빠지는 것 역시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친밀하고 유대적인 관계‘와 ‘낯선 익명의 관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거리 조절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횡단성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서로 몸을 껴안아 따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가시가 서로를 찔러서 너무 아파 그들은 곧 다시 흩어졌다. 그러나 추위는계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한 번 가까이 모였고 다시 한 번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두 악(추위와 가시로 인한 아픔)에서 자신들을보호하기 위한 아주 적당한 거리를 발견하기까지 이렇게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얇은 정보량이 많아야 성립되는지 적어야 성립되는지의 문제도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는 환경에서 앎과인식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량의 정보를 분류하고 처리하는과정에 이내 지칠 테니까요. 오히려 정보 값이 적을수록 앎이 비로소가능하게 됩니다. 정보 엔트로피 값이 높을 경우에 앎이 성립된다는,배움에 대한 기존의 교육관은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달달 외우는 식의 수용자적 태도로 공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보 엔트로피값이 낮아야 비로소 습(習)으로서의 앞을 체득할 여지가 생깁니다.
여기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 전 세계를 여행해야 할까? 아니면 가까이 있는 사람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해야 할까?‘라는질문이 등장합니다. 엄밀히 말해 둘 다 맞는 얘기입니다. 멀리 떠나더라도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면 유목민이 아니고, 떠나지 않더라도언제나 새로움을 발견하고자 하면 정주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들은 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자신이 머무르는 장소에 대한독특한 촉지적 느낌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떠나는 노마드, 즉 이행하고 횡단하는 노마드와 머무르는 노마드, 즉 둘레환경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고 시추하는 노마드로서의 면모를 둘 다 갖고 있는 셈이지요. 머무르는 노마드‘라는 개념에 대해 역설적이라고 느낄 수도있겠습니다만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공간, 인물, 대상으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할 줄 안다면 그것은 전 세계를 떠돌아다닌 것에 필적하는노마드인 셈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끊임없이 자기 위치를 조정할 수밖에 없는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치는 결코 일방적이거나 자동적이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서로의 상황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의 조각을 끊임없이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는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배치를 반복으로서의 배치인 ‘기계적 배치‘와집합적 편성으로서의 배치인 ‘집단적 배치‘로 나누어 말하기도 합니다. 기계적 배치는 ‘차이 나는 반복‘과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두 가지 반복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계절, 생애 주기, 낮과 밤,밀물과 썰물 등은 차이 나는 반복의 배치입니다. 생명과 생태, 생활은 계속 반복되지만 그 생명력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 나는 반복의 형태를 띱니다. 차이 나는 반복은 생명과 삶을 만드는 우리 살림의 배치인 셈입니다. 반면에 그야말로 단순하고 기계적인 동일성의 반복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군대, 감옥, 병원 등은 동일성의 반복으로서의 문명을 주조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한 마리의 고양이는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난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고양이를 ‘대심이‘라고 호명함으로써 생명의 유일무이성을 각인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대심이와의 시간은 이 순간이 삶에서 단 한 번뿐인 ‘실존의 시간‘, ‘삶의 시간‘, ‘생명의 시간‘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찰나는, 이 순간이 유한한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순간이라는 점에서 더 소중하게 아끼고 돌봐야 하는 생명살림의 의미를갖습니다. 시간의 깊이와 잠재성으로 더 들어가기 위해서는, 찰나의의미를 소비하고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주변 가까이를 보살피는 행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미학에 대해서 얘기하는 까닭은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그 돌봄을 통해서 자신이 더욱 성숙해 가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봄은 돌보는 자기 자신이더 미세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환대의 의미는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그저 낯선 것에 대해 마음을 여는 정도의 환대가 아니라, 나의 약점과 허점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확 열어두겠다는 것이 환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의 약점을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낯설고 이질적인 사람이 다가오면우리는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나기 십상입니다. 더 나아가 낯선 존재가 다가오면 더럽다며 혐오하거나 배제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환대는 단지 낯선 이방인을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낯선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삶을 재발견하고 재창조하여우리 자신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다양성은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에 대한 차별이 아닌 존중의 태도에서시작됩니다.
관계없음의 지평은침묵하고, 고요하고, 시선만 보내고, 얼른 자리를 피하고, 더럽다고생각하는지 관여하지 않고, 어떤 소동이나 갈등조차도 없는 고립무원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없음의 지평이 우리 사회를 장악한 혐오의 정체입니다. 관계 자체가 갖고 있는 사랑, 욕망, 돌봄의 특징에 대해서 사람들은 촌스럽고 낡은 구닥다리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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