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매화, 개나리, 벚꽃, 진달래, 철쭉, 목련, 조팝나무…… 내가 출퇴근길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꼭 보게 되는 꽃들이다. 그러나 강아지들과 산책하며 똥을 치우다 보면 눈높이가 땅에 닿게끔 낮아지는데,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작은 꽃은 민들레와 제비꽃이다. 금년엔 이놈들이제법 무리 지어 많이 피었다.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여러 잡다한 생각들은 날아가고 마냥 바라보게 된다. 무릎을 꿇거나, 마음 자세가 아주 낮아져야만 눈에 들어오는 꽃들이다.
봄꽃을 닮은 젊은이들은 자기가 젊고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나도 젊은 날에는 몰랐다. 그걸 안다면 젊음이 아니지. 자신이 예쁘고 빛났었다는 것을알 때쯤 이미 젊음은 떠나고 곁에 없다.
나는 또 질문했다. 방송을 그만두고 노년의 긴 세월 동안 무얼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전유성 선배는 대뜸 그냥 살란다. "여행 다녀. 신이 인간을 하찮게 비웃는 빌미가 바로 사람의 계획이라잖아.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살아." 선배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보다 몇 걸음앞서가는 선배가 계시다는 게 참으로 고맙다.
사람의 한평생(개인별로 얼굴이 다르듯 기복이 다르겠지만)을 봉우리와 계곡처럼 그래프로 그린다면 아마 나도 여러 차례꺾여 있을 것이다. 그런 굴절을 겪으면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우리 마음속에도 테두리가 생겨나지 않을까. 느리게 살기를 시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려졌다. 빠른리듬을 몸과 마음이 따라잡을 수가 없다. 빈둥거리듯 지내면 바쁠 때와는 다른 그림들이 보인다. 다시는 쫓기듯 바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걸 알게 될 때면, 이미 바쁠일이 없게 된다는 사실에 허허로운 웃음을 짓게 된다. 세상일에 요령이나 지혜가 쌓이고, 하는 일이 무언지를 ‘쬐꼼‘ 알 만한 때, 이미 일은 나를 떠난다. 내가 밀려난다. 그게 요즘 순리다. 노래가 무언지 ‘쬐꼼‘ 알 만한데 더 이상 노래할 기회가많지 않다. 그러니 할 만할 때 제대로 하려면 건강해야겠지. 즐겁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기, 이것이 꿈이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없다고,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위로한다기보다 진심 어린 말과 눈빛이 우리를 일으킨다는 걸 배웠다. 세상천지 기댈 곳 없고 내 편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을 때, 이런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위로하며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다시 한 발짝 내딛게 해준다.
혼자 있으면서 가사 쓰고 반주에 맞춰 연습하는 시간들이 너무너무 좋다. 제대로 살아 있는 느낌이랄까. 잔잔한행복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서면그 잔잔함은 이내 깨진다.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편치 않다. 특히 공연이 시작되면 아무도 대신해줄 수없는 몫을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일터에서 만난 단골손님(?)께큰돈을 신세지려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별달리 드릴말씀도 없어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나를 불러세우시는 거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잠깐, 미스 양! 우리도 이자를 받아야겠어요." 나는 벼락 맞은 것처럼 놀라서 그 자리에 섰다. "이자를 받고 싶어요." 신부님은 웃고 있었다. "첫째, 미스 양의 웃음입니다. 이젠 웃을 수 있겠지요? 돈 때문에 그렇게 어두운 얼굴이었다면 돈을 갚은 후에는웃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다음에어른이 되어 지금의 미스 양 같은 처지의 젊은이를 만나면스스럼없이 도와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받으려는 이자예요." 나는 웃었다. 눈물이 핑 돈 채로, 양희은 ‘그러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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