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삶의 밑바닥을 헤매면서도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 이라는신분만큼은 한사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부자 관계를 증명해주는 그 소중한 칼마저 팔아치웠을 겁니다. 작은아들의 단검은 비록 거지꼴을 하고 부랑자 신세가 되어 돌아왔을망정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들이라는 신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탕자의 마음가짐이 고향을 향해 발길을 돌리도록 이끌었던 겁니다.

산상수훈은 고향, 곧 아버지의 집으로되돌아가는 가장 단순한 경로를 제시합니다.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위로를 받고, 사랑을 입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등 두 번째 유년기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건 산상수훈을 삶으로 살아내서 하나님나라로통하는 좁은 문을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렘브란트는 그 사실을 알고있었을까요? 탕자의 비유가 이 그림의 진면목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는지, 아니면 거장의 작품이 예수님의 비유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깨닫게 해주었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집으로돌아온 젊은이의 머리를 보면서 작가가 두 번째 유년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짐작할 따름입니다.
언젠가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여주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젊은 친구(똑똑하게 생긴 아가씨였습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탕자의 귀향>을 복제한커다란 포스터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더니 작은아들의 머리에손을 올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이건 자궁에서 막 나온 갓난아이의머리예요. 보세요. 아직 젖어 있어요. 얼굴에도 여전히 태아의 느낌이 남아 있잖아요." 젊은이의 얘기를 듣고 거기 있던 이들이 모두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정말로 집으로 되짚어왔을 뿐만아니라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하나님의 자궁으로 돌아온 탕자의모습을 그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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