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이른바 ‘기자 정신‘이란 걸 앞세우게 된 걸까.
기사를 쓰다 보면 그 정도 일은 생길 수 있다.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눈을 질끈 감고 지나가야 할 때도있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기자‘가 돼갔다. 그때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된 걸까.

케빈 카터(Kevin Carter)라는 사진작가가 있었다. 그는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프리카 소녀와 그 옆에서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을 촬영했다. 기아 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카터의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촬영 후 카터는 독수리를 멀리 쫓았지만 그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왜 그 아이를 곧바로 구하지 않았느냐." "사진을 찍는 게 아이보다 중요했느냐." 그는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베네딕토 16세도 프란치스코 앞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그는자신이 아동을 추행한 사제를 방치했다고 고백한다. 역설적으허름한 옷을 입은 클레오도, 사제 옷을 입은 두 교황도 그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다. 두 교황이 클레오보다 낫고 클레오가 두 교황보다 못한 게 아니다. 그들 모두 신(神) 앞에서, 인간 앞에서 같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로 두 교황은 잘못을 범하지 않음이 아니라 잘못을 있는 그대로 고백함으로써 ‘교황다움‘을 드러낸다.
이것은 무슨 시적인 은유 따위가 아니다. 0.01 퍼센트의비유도 없는 사실이다.
후배 기자에게서 들은 얘기다. 국내 대회는 물론 국제 대회에서 계속 1위를 달렸던 한 태권도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쳤다. 후배 기자는 그에게 심경을 물었다.
"이번에 한번 졌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괜찮은 사람이되는 과정에 태권도도 있는 거니까요."
후배는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친구 말처럼 괜찮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기자도 있는것 아닐까요? 그런데 나는 삶까지도 기자스럽게 살고 있는 거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마음이…."
직업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직업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편일 뿐이다. 삶을직업에 맞추는 게 아니라 직업을 삶에 맞춰야 한다.

재판 없는 처형은 없다는 규범을 법률가들이 따랐다면, 동의없는 수술은 없다는 규정을 의사들이 받아들였다면, 노예 노동금지를 기업가들이 지지했다면, 살인과 관련된 서류 작업의 처리를 관료들이 거부했다면, 나치 정권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잔혹 행위를 실행에 옮기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스나이더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좋은 사람은 결코 ‘명령에 따랐을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직업윤리의 핵심이니까.

중요한 것은 분명한 자기 기준이다.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 있는 사람이뭐라고 압박해도, 내 자신의 욕망이 뭐라고 유혹해도, 때로는흔들리면서도, 가야 할 길을 간다. 중간에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내비게이션이 다시 경로를 재설정하듯이, 자기 기준만 잃지 않으면 끝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자기 기준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내가 지켜야 할 삶의원칙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 원칙이란 것이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 동백의 원칙인 술만 판다‘, ‘노 매너에 노 서비스’, ‘반말 하면 나도 반말‘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면 된다. 단순하고 명료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급할때 건너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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