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말한다. 독일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이라는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히만이 아니라고 해도 이 물음을 비켜갈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악(惡)들이 거악(巨惡)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닌가. 거악은 한두 사람의 악인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의 작은 악들이 모인 결과가 아닌가.
〈주기도문(主祈禱文)>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바라고 희망한다. 그 악이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오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위험을 인식하고 늘 깨어있지 않다면, 내부의 악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다면 자신도모르는 사이에 악마와 손을 잡고 있을 것이다. "난 내가 할 일을 했다"고 말하며,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하며.
당신이 거리에서 누군가와 - 이를테면, 생존권의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움켜쥔이들과 마주쳤을 때 서늘한 두려움이 앞선다면 뭔가 잘못살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 마음속에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는의미이고, 다른 친구‘가 곁에 없다는 의미다.
주토피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토끼 주디도, 여우닉도 아니다. 나무늘보 ‘플래시‘다. 주디는 용의 차량에 대해차적 조회를 하려고 DMV(차량관리국)에 갔다가 플래시를 만나고 학을 뗀다. 말할 때도, 키보드를 두드릴 때도, 농담에 웃을 때도 시속 1미터의 슬로비디오로 움직인다. 마지막 장면에그가 다시 등장한다. 주디가 시속 185킬로미터로 달리는 스포츠카를 쫓아가 차를 세운다. 과속 딱지를 떼려는 순간 차창이내려가며 플래시의 겸연쩍은 얼굴이 나타난다.
‘나무늘보는 느리다‘는 편견에 대한 통쾌한 반박이다. 나무늘보의 몸이 느린 건 사실이지만 모든 일에 느린 건 아니다.
성격은 오히려 급할 수도 있다. 편견은 결정적으로 틀릴 때가많다. 당신이 당신의 편견에 기대어 살다간 큰코다치는 날이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