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사랑이 은총도 환상도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됨의 행위일 것이며,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의지와 지혜와 선의로써 맞춰나가야 하는 상태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나누었던 친밀감, 서로를 부끄러움 없이 온전히
신뢰했던" 경험은 우리에게 특별한 행복을 안겨주고,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일종의 구원을 선사해준다. 나아가 우리가 오랫동안 갈구해온 내적 평화를 맛보게 해준다.

사랑은 복합적인 현상이다.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힘이자행동이자 결정이자 선물이기도 하다. 불행 또는 징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삶의 위기가 올 수 있고, 삶이 불안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안의 시기를 통과할 때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의 작가 존 윌리엄스는 그의 소설 《스토너》의 주인공으로하여금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젊은 시절윌리엄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이를 수 있는 완벽한 존재상태라고 여겼다. 기성세대가 된 후에는 사랑이란 즐거운불신, 친숙한 경멸, 당황스러운 동경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짓 총교의 천국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제 그는 사랑이 은총도 환상도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됨의 행위일 것이며,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의지와 지혜와 선의로써 맞춰나가야 하는 상태일 것이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에서 이런 시간 초월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표현한다.
"윌리엄은 그녀가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적잖이 충격을 받는 자기 자신에게 자못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자기와 그녀가 사귀기 전에는 마치 둘 모두 이 세상에 없었던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독특한 시간 초월의 경험에서 떨어져나온 뒤에는 꾸준히친밀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된다. 사랑이 인간 본연의 고독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한다는점을 인식하는 것도 과제 중 하나다. 인간은 어차피 세상에서 어느 만큼은 홀로서기를 할 수밖에 없는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슷한 기본 욕구를 품고 있지만, 서로 완전히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나 다른 존재다.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사실, 이런 신체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결정, 다른 생각, 다른 가치판단을 하게 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한다.

있는 그대로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는 현재에이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 자연의 힘, 도와주는 사람들에대한 ‘신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경험과 연결되며, 새로운 것에대한 ‘희망‘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사랑‘의 능력은 성공적인관계를 가능하게 하며, 그 관계 속에서 우리 모두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나아간다. 우리 대부분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몇몇 우회로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단순한 진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생명력’, 즉 살아 있음을 향한 동경을 바탕으로 새로워지고 발전해나가는 것이라는 진리를말이다. 하이테크 의학을 탄생시킨 기술문명뿐 아니라 더 높은 존재의 힘을 신뢰하는 문화 역시 어마어마한 생명력에 의존해 있다.
삶의 아주 불안한 시기에도 본능적인 생명력이 우리를 지탱하게한다는 것을 세포 깊숙이까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물결을 거슬러다투지 않고 물결과 함께 헤엄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를 두고 "열두 세대의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 연대를 따지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20퍼센트가 이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실제적인 상상력을 부추긴다. 즉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리고, 뉴턴이 자연법칙을 생각하고, 칸트가 범주론을 확립하고, 프랑스혁명이 세상을 휩쓸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쓰고, 2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들을 파괴하고 원자폭탄이고안되고, 디지털 시대가 시작되는 동안, 라파엘로의 성모는 벌거벗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담담하고 흔들림 없이 세상으로 들어간다고 말이다. 모성애를 보여주는 원초적 장면이라 할까. "가난하고늙은 여인네들, 유럽의 황제들, 대학생들, 대서양을 횡단해온 백만장자들, 교황들, 러시아 군주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 순결한 처녀들과 매춘부들이 이 그림을 보았고, 장군들, 도둑들, 천재들, 방직공들, 전투비행사들, 교사들, 선인과 악인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
마리아와 예수의 슬프면서도 단호한 시선은 마치 그들이 세상의상태를 잘 알고 있으며 기꺼이 세상을 향해 자신들을 내줄 준비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렇듯 시대를 초월한 그림들의 아름다움과 담담함, 섬세함은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도 인간의실존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역설의 철학: 고슴도치의 우아함

혼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과 절망이 종종은 서로 한 뼘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은 정말로 다채로운빛과 어둠, 순간과 영원으로 짜여져 있음을 잊지 않게 한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뮈리엘 바르베리는 자신의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그런 순간을 묘사한다. 부유한 가정의 영리한 소녀인2세의 팔로마는 그녀의 철학 친구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수위 아줌마 르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난생처음으로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배를 주먹으로 세게 맞은 듯, 숨을쉴 수가 없었다. 가슴은 푸딩처럼 흐물흐물해졌고, 배는 완전히으깨졌다." 이런 상태에서 팔로마는 그때까지 그냥 무심코 내뱉곤했던 inever‘라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결국 우리는무슨 일이 일어나는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살아간하지만 사랑하다.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할 일은 없을 것처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never라는 말이 정말로 무슨의미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외롭고, 아프고, 정말안 좋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너무나 힘이 든다."

그러고 나서 뭔가가 일어난다. 사실은 아주 소소한 일이다. 그러나 소소한 일 중의 하나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팔로마가 세상을 떠난 르네 아줌마의 일본인 연인이었던 가쿠로와 함께 아파트 안뜰을 지나는데, 갑자기 누가 에리크 사티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더구나 영혼의 친구가 병원의 냉동실에 누워 있는데 어떻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갑자기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햇살이 우리의 얼굴을 비추었고, 우리는 위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르네도 이 순간을 좋아했을거야. 가쿠로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내가 오늘 저녁 흐물흐물해진 가슴과 배로 생각해보니 아마도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절망 속에몇몇 아름다운 순간도 있는 것. 그런 순간에 시간은 더 이상 여느때와 같은 시간이 아니다. 마치 음표들이 시간 속에서 틈새를 열어주는 것처럼, 일종의 멈춤을, 이곳 속의 다른 곳을, ‘never‘ 속의always‘를 열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시간 속의 이런 아주 작은 틈을 거룩한순간 또는 (신의 존재를 느끼는) 신비한 순간이라 부른다. 미국의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그런 순간을 신 없는 종교 체험이라 부른다. 드워킨은 종교성을 특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보다 더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그래서 스스로를 종교적 무신론자라 일컫는다.

아름다움은 사랑처럼 시야에 가려진 시간의 덮개에 그물코를내어 삶을 한순간 다른 빛깔로 빛나게 한다. 카리미 같은 신앙인이나 드워킨 같은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모두 이런 초월의 형식을경험한다. 그러나 never‘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이런 ‘틈새‘가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지 못한다. 영원의 틈새는 유한성 앞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준다.
시간과 무한은 서로 호환될 수 없다. 이 둘은 서로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질병으로 자기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난 뒤, 그 친구는 내게 이렇게 써보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슬픈 순간이었다. 그러나 가장 심오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그가 직장에 복귀했을 때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직장에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에서 슬퍼하는 팔로마는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수위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르네, 걱정하지 마세요.난 자살을 한다든가, 불을 낸다든가 하지 않아요. 난 아줌마를 위해 앞으로‘never‘ 속의 ‘always‘를 추구할 거예요. 이 세상의 아름다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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