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고, 불안정한 시기그러나 종종 그런 시기에 예감하지 못했던 힘이 솟는다. 사실 그런 시기는 우리 인생의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이며창조적 잠재력을 간직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시기에 우리에게 내재한 창조성을 일깨우고그것과 연합하여 살아가라고 용기를 북돋우고 싶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위기의 순간, 우리는 불안해하고 그 시기가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그 불확실한 날들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은 매우 달라진다. 나탈리 크납은 변화와 도약이 필요한 그 시기를 조급하게 벗어나려 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탐색하고 깊이 경험해보기를 권한다. 그는 다른 이들의 삶에서, 경이로운 자연의 풍경에서, 위대한 생각들이 탄생한역사적 장면에서 과도기의 의미를 길어올린다.
희망을 품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이것이 봄의 메시지다. 그러나 한 해의 첫 과도기인 새봄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유용성과는 별개로 우리를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벚꽃 봉오리는 앞으로의 운명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매력을 발산한다. 버찌가 열릴지 열리지않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벚꽃은 버찌로 변신한 다음에야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수정되기 전 밤 서리를 맞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여도, 벚꽃은 그 자체로 완전한것이며, 그의 일을 다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인생의 과도기를 보낼 때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벚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며, 훗날 우리가 스스로 또는 주변 사람들이 만족만한 수확물을 낼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연약하기 짝이 없다. 첫아이를 나은 뒤 부모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견뎌낼 수 있을까? 중병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실직한 뒤 새로운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은퇴한 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상태는 우리를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고, 잘못된 결정을할까 봐 두려워한다. 너무 무리수를 두는 건 아닌지, 아니면 너무소극적으로 임하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두려움은 우리의 주의력이 고양되었다는 표지다. 유명한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도 두려움은 살아남는 데 아주 중요한 감정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문제는 두려움이 아니다. 교육학자 라인하르트 카를의 말처럼 문제는 우리가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다 보니 두려움이 우리를 마비시킨다는 사실이다. 라인하르트 카를은 전에는 아이들이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학교가 좋은 학교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런 아이들과 함께하며 아이들을 도와주는 학교가 좋은 학교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모든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새로운 존재라면서, 우리와 같은 삶의 상황에 놓인 사람은 오직 우리밖에 없으며, 인생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만난다 해도 그것이 꼭 우리의 잘못 때문에비롯된 것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런 결과들은 그 자체로 지금주어진 삶과 새롭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오히려 스스로 계산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어우러짐으로써 매순간 우리에게 행동의 여지를 마련해준다고 했다. "인간이 새로시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가 모든 계산 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연성이 없어 보였던일이 어느 정도 개연성을 띠게 된다는 뜻이며, ‘이성적으로는‘, 즉계산 가능하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을 희망해도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주어진 수단으로 진정 노력하고 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늘 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 그리고우리의 현재 상황과 화해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불가피한 것을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는 열린 사람이 되며,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도 손을 내밀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불행으로 여겨지는 것이 며칠 뒤 또는 몇 년 뒤에는 행복한 섭리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친구가 그렇게 탄식했던 까닭은 끝나버린 관계가 그녀의 계좌‘에 마이너스로 작용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삶의 총계를 내는 것으로 말하자면 삶은 행복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내가 친구에게 사랑의 이익은 사랑을 느끼는 데 있고, 기쁨의 이익은 뭔가를 기뻐하는 데 있으며, 삶의 이익은 우리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 아니겠냐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했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스스로 기뻐했고, 진정 살아 있음을 느꼈다. 한순간 친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2년에 이미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빠른 시간에 해치우는 것이 새로운 미덕이 되고 있는 세태를 탄식했다. "오, 즐거움을 누리는 일들은 이리도 자꾸만 의심스러워지고 있구나! 일을 하는 것은 점점 더 좋은 것이 되어가고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회복을 향한 욕구‘라는 명목일 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구나. ‘건강도 좀 챙겨야하지 않겠나.’ 소풍 나왔다가 들키면 그렇게 둘러대는구나."
과도기에 우리를 받쳐주는 바닥은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걸음과 더불어 생겨난다. 미지의 세계로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이그것을 자라게 한다. 과도기에 우리는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그 가능성 말고는 다른 것에 의존할 수없다.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경험이 우리에게 새로운 토대가 되어준다. 우리의 현재는 우리가 받침대로 삼을 수 있는 장미다. 그것은 탄탄한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다. 그러나 진한 향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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