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문이 많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그만큼 혼란스럽다는 반증이다. 윤리적 가치의 혼란은 필연적으로 강제성을 띤 제도적 가치를 부르기 마련이다. 역사 속에서충신이 많이 등장했던 시대는 그만큼 더 좋은 사회라는 의미가아니라,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었던 시대라는 반증이다. 장자나노자가 참된 인간형으로 내세우는 ‘진정한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외면의 허식을 덜어내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려 한다.
"지극한 ‘예‘는 자기 자신을 남과 구별하지 않고, 지극한 ‘의‘는자기 자신을 사물과 구별하지 않으며, 지극한 ‘지‘는 책모를일삼지 않고, 지극한 ‘인‘은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의 구별이없으며, 지극한 ‘신‘은 금과 옥을 내버린다." 「경상초」
니체는 보편적인 절대가치를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왜냐하면, 개인이 보편적인 절대가치를만들어내는 행위도 세상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해석에 불과한 인식 내용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면,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고 봤다. 이것은 어떤일에만 적합한 하나의 도구가 다른 모든 일에도 사용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 담긴 객관적 주시는 의지와 힘이 부족하다는 징후일 수있다." 「유고(1887년 가을 ~ 1888년 3월)
진짜 뛰어난 사람은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지 않는 법이다. 니체의 관점을 쫓아가 보면, 의지와 힘이 부족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어떤 객관적인 사태에서 찾는다. 직업 군인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스파이가 되고, 소설가의 꿈에 실패한 사람이 소설평론가가 되며, 영화감독이 되려다 좌절한 사람이 영화 평론가가 된다는 냉소적인 말이 있다. 니체는 기존에 통용되던 모든 가치관을 ‘망치‘로 깡그리 부숴버린 뒤에야 사람들이무엇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식과 지혜는 다툼의 도구가 된다"라는 장자의 시각도 보편적인 지식과 가치의 맹점을 지적한다. 보편적인 지식들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저마다 절대성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에 의하면, 모든 이론은 그 이론을 편 사람의 관점‘ 이 중요하다. 서로의 처지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사적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세운다. 하지만 전체 세계를 모두 조망하지도 못하면서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보편적 이념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폭력이다. 일체의 보편적 이념은 의심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 가치를 하나이상으로 마음속에 지니되, 실질적으로는 여러 이론을 받아들이는 폭넓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 때와 장소에 따라 내가 받아들인 가치를 효율적으로 실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장자의 아름다운 서시와 추녀에 대한 비유는 내려오는 전통과 그것을 단지 답습하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이다. 장자는 그저 답습하기 급급한 전통가치들을 아주 세련된 비유로비판했다. 하나의 전통이 현실을 새롭게 탈바꿈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굳은살처럼 인습화 되면, 이추녀처럼 많은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 부자는 문을 닫아 버리는 것으로 추녀를 피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자들의 집은 닫을문조차 없이 허름하므로 추녀를 피해 아예 마을을 떠나버린다. 전통이 잘못 기능하면 대개 사회 지도층들보다는 일반 서민들이 더 피해를 입는다.
Nietzsche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그저 걸어라. 사람은 그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법이다. 『반시대적 고찰』
장자 비록 형벌로 한쪽 발이 잘렸지만 인품으로 유명한 ‘왕태‘라는자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가 그에 대해 물었다. "왕태는 외발이인데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고, 그는아무것도 가르치는 게 없는데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마음이가득 채워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에게 모여드는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정지된 물을 거울 삼아 자기를 들여다본다. 멈추길원하는 자가 있다면 오직 잔잔한 물만이 그를 멈추게 할 수있다." 「덕충부」
백이伯夷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양산 밑에서 죽었고, 도척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동릉산 위에서 죽었다. 이두 사람이 죽은 장소는 달랐지만, 생명을 해치고 자연 그대로의본성을 훼손한 점에서는 똑같다. 어찌 반드시 백이가 옳고도척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변무」
Nietzsche
가장 현명한 인간은 누구인가. 모순을 가장 풍부히 갖는 자. 모든 종류에 대해 촉각기관을 갖는 자다. 그리고 때때로 장엄한화음을 이루는 위대한 순간을 경험하는 자다. 『유고(1884년 여름~가을)
莊子
성인은 자연스럽게 도에 맞추어 행위 할 뿐, 일부러 도를도모하지는 않는다. 인에 합치되어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의義에 머물러도 그것을 쌓지 않는다. 예禮에 따르지만, 그것에구애되지는 않고 세상일에 접해도 그것을 일부러 사양하지는않는다. 성인은 사물의 성질에 따라 자신을 맞춘다. 사물이란것은 도의 측면에서 볼 때 실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는하지만, 어떻든 현실에서는 나에게 영향을 주기에 불가불 실천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재유」
장자의 중도는 단지 어떤 것과 어떤 것 간의 평균치가 아니다. 예를 들어 흐르는 냇물 양쪽에 둑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서 냇물은 중간 지평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냇물의 흐름은엄청나게 빨라 양쪽 둑을 무너뜨리면서 흐른다. 이것은 상반된양쪽의 가치가 이 중간 지평에서 모두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 사상에서 중도의 세계란 그 안에 최대한의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의 점’(아르키메데스가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장소만 주어진다면 지구도 들어올릴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과 같은지층이다.
우리가 단편적인 가치들에 매몰돼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현상을 해석하려는 도그마에 빠질 때, 우리의 외부환경에 대한대응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곧 중독의 위험성이기도 하다. 악함이란 단지 도덕적인 결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중독을 뜻한다. 도덕적 선함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 또한 오히려 악함이 될 수가 있다. 무엇에 빠지는 것, 즉 중독이란 그것이 알코올 중독이든 이상주의중독이든 모두 나쁜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중도란 그 자체가 진리로 표방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무용함과 유용함은 상황에 따른 판단을 요구한다. 위 이야기에서 장자가 제자와 먹은 거위는 울지 못하는 거위였기 때문에 요리 재료로 쓰였다. 이 거위는 자연의 본성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본성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이다. 자연의 본성이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정해진 보편적인 규칙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자연스러운 성정을 의미한다. 개가 짖는 것이 개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정이듯 거위또한 우는 것이 자연적 성정에 가깝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있고자 하는 방식대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가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의 지혜이다.
Nietzsche
위대함이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강물도 스스로커지거나 풍부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를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크고 풍부하게만든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장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면서 타인을 그의견에 따르게끔 하는데 마음을 쓰면서, 그 모든 것이 자연그대로 하나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것을 조삼朝三이라고한다.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나누어주면서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마."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낸다. 이번에는 원숭이를기르는 사람이 "그렇다면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를주마."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한다. 이처럼이름과 실질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이작용한다. 이는 목전의 이익에 마음을 뺏겨 시비의 가치판단을하므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은 시비의 대립을조화시켜, 천균天判, 자연의 균형, 만물제동의 원리에서 쉰다. 이를양행兩行이라고 한다. 「제물론」
니체와 장자에게 ‘규정되지 않은 본능’과 ‘규정을 기준 삼아 내리는 판단’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한 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규정으로 내린 판단은 편견으로 이어지기 쉽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지니게 한다. 이런 편견들은 무의식적으로 끌어 올린규정되지 않은 본능으로 해체시켜야 한다. 편견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현실을 반영해 다시 만든 ‘새로운 규정적 판단‘ 이 자리한다. 이런 순환 관계는 계속 진행된다. 이것은 안정과불안정 사이의 교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체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질수록 다양한 가치를 내면에 품을 수 있는 심리적 영역(니체의 아포리즘에서 말한 ‘강물)이 그만큼 넓어진다. ‘분열과 정복‘은 현대 사회의 좌우명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자신을 만물과 분리해 인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이런 ‘현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과 자연의관계, 개인에 내재된 힘의 진실을 인식하면 희망은 있다. 니체와 장자의 아포리즘은 계속 그 희망을 말한다. 모든 가치를 끌어안을 수 있는, 폭넓은 내면 세계가 지닌 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