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지휘자, 음악 감독, 음악의 선지자. 리하르트 바그너의 예술적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에 비해 인격의 추악한 측면 (지나친 과대망상증, 광적인 반유대주의,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자이자 나치가 비공식적으로 인정한 음악의 지도자라는 꼬리표)으로 인해 명성이 가려지곤한다.
올곧은 사람은 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 이런 혐오스러운 철학과 놀라운 음악을 어떻게 동시에 받아들일까? 나는 대표적인 바그너의 (유대인)해석가인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도움을 받았다. 바렌보임은 음악을 그 자체만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명의 여지는 없겠지만, 바그너는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는 사망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는 사실만큼은 언급한 필요가 있다.) 마이스터징거)는 16세기 중반의 뉘른베르크라는 정해진 시공간을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바그너의 작품 중 이례적이다. 그의 유명한〈반지〉 시리즈나 다른 오페라 대부분과는 달리, 이 작품에는 초자연적인힘, 동화 같은 전설, 마법의 힘이 없다. 수공업 장인 겸 가수인 마이스터징거들과 그들이 활동하던 길드의 세계를 묘사한 이 작품은, 망상과 어리석음의 세상 속에서 노래를 만드는 행동의 위안을 그린 희극이다.
이 오페라는 초연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공연에서는 프란즈슈트라우스(7월 12일)가 프렌치 호른을 연주했다. 1월에 살펴본 리하르트슈트라우스의 아버지 프란츠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작품의 예연습에서 바그너가 다섯 시간 동안이나 연주를 중단시키면서 방해한다고생각해 오케스트라를 파업으로 이끌었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세계에 이니금관 악기 주자들이 연주를 얼른 마치고 술집으로 가려 한다는 고정 관이 팽배해 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야기는 열네 살의 모차르트가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가 시편 51장을 가사로 작곡한 신비로운 음악을 듣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의 악보는 거의 150년 동안 바티칸 이외의 지역에서는 필사가 금지되어 있었다. 모차르트는 이 음악의 아름다움에 감동했고, 성당에서 나온 뒤 자신이 외운 작품 전체를 악보에 옮겨 적었다. 이틀 뒤 그는 성당을 다시 찾아가 음악을 듣고 몇 가지 소소한 수정을 한 뒤, 자신이 채보한 악보를 출판했다. 이 판본은 원곡과는 달리, 작품의 고유한 내적인 힘을 포착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모차르트를로마로 불렀고, 그에게 파문을 내리는 대신 기사단 칭호를 수여했다.
이 이야기는 일종의 상징처럼 전해져오지만, 솔직히 당시 미제레레는 이미 음악계에 잘 알려져 있었던 곡이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이 음악을다른 곳에서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작품이 모차르트의 교회 합창 음악작품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곡에 대한 그의 애정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곡에서 알레그리는 뛰어난 대위법 실력을 보여준다. 성가대가 단순한 미제레레 성가를 부를 때, 독창자 그룹은 성가대의 노래를 둘러싸며 독자적인 노래를 수놓는다.
오늘 세상을 떠난 알레그리는, 성주간 성무일도의 저녁 기도 예식인테네브레를 위해 이 작품을 작곡했다(테네브레라는 말은 라틴어로 ‘그림자‘,혹은 ‘어둠‘을 의미한다). 예식 중 성당의 모든 초가 하나씩 천천히 꺼지고마침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단 한 개의 촛불만 남는다. 이런 광경은 놀랍도록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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