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로부터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하이데거는 잡담과 호기심, 애매성으로 점철된 현대문명의 비본래적 자아를 걱정했지요. 그는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깊이와전체성을 결여하고, 이는 다시 공허감과 권태로 연결되어, 계속 자극적인 삶을 추구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그는 생의 중요한 양식으로 실천적 배려‘를 언급합니다. 불안한 ‘세계 내 존재‘ 속에서 인간은 존재 가능성을 끊임없이 염려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염려하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려란 자기 외의 존재자를 향한 기본적인 관심이며, 배려라는 양식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신과 타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울림의 공부’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서로 물드는 존재라는 거지요. 그래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공부하면서 연대해 실천해 나가는 형식, 이것이 지상에 살아남은 자의 꿈이겠지요

우리는 늘 반성합니다. 그러나 반성이 관념이 되면 안됩니다. 아주 사소한 습관 하나라도 바꾸어 내는 실천이 없으면 반성조차도 허영입니다.
기실 우리 삶에는 육체적인 것 말고도 정신적 허영이얼마나 많을까요. 죄책감은 인간 의식의 진화에서 낮은 차원의 단계입니다. 수치와 죄책감, 자격지심과 절망, 질투와 미움, 분노 등의 단계를 벗어나야 감사와 용기, 사랑과 희생이라는 높은 의식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가장 밑바탕인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목소리를 당당히 내는일부터 시도해야겠지요.
여기에는 의지가 작용해야 합니다. 어쨌거나 이 모든것들이 우리가 침 발라 넘기는 두툼한 숙제장이겠지요. 항어 부담스럽지만 하고 나면 유쾌해지는, 스스로 기특해지는....

난 기독교인이지만 잠들기 전 운동과 명상 삼아 절을합니다. 백팔배를 넘을 때도 있고 모자랄 때도 있지만 잠시자신의 밑바닥을 감지하는 시간으로 충분합니다. 이마가 바닥에 닿고 가장 자세가 낮아지는 순간, 하심下心이 나옵니다.
그 순간 왜 저절로 울컥해지는 것일까요.
절을 할 때마다 나는 ‘지상에 떠도는 모든 억울한 영혼을 위해서‘라는 작은 제목을 꼭 가집니다. 함부로 다친, 함부로 버려진 억울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의 이름이나 슬픔을 까맣게 잊고, 먹고사는 일에 열중한다는 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스스로도 민망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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