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하는 태도에는 어떤 ‘바름‘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예찬하는 태도란 무턱대고, 무작정,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행위만 마음의 문제인 것이아니라 싫어하는 행위도 마음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교조적인 기준, 규범적인 기준, 또는 유명세 이상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눈이 필요하다.
물론, 예찬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마치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있듯이, 결점을가진 인간이 어떤 덕목을 보일 때 훨씬 더 감동적이듯이, 도시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 도시의 현재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하더라도그 때문에 좋은 점을 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좋은 방식이라면 예찬하는 이유를 들어보는 것이다. 해보면 알겠지만 예찬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대기는 무척 어려운 반면, 비판하는 이유는 천만 가지라도 댈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싫은 데에는 판단력이 작동하고 좋은 데에는 마음이 작동한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보자. 좋아하는 이유를 마침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예찬을 하고 있다는 신호이자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는 신호일 것이다.

제일 좋은 도시?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이 도시는 이래서 좋고저 도시는 저래서 좋다. 이 도시는 이런 점이 모자라고 저 도시는 저런 점이 지나치다. 나 역시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아서, 도시 자체가아무리 근사하더라도 바가지에 당하고 불친절함에 학을 떼거나 거리 범죄에 노출되었던 도시는 이미지가 나빠진다.
도시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가보다는 ‘나와 맺는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고, 특별한 만남 이상으로 일상의 접촉이 더욱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도시에서 "콘텍스트를 읽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어느 것도 홀로 서 있지 않다.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으면서 성격이 규정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도시 공간에서 감이 동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 공간이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녹아든 듯한 자연스러움,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듯한 영원의 느낌, 놀라움, 생소함, 극한의 대비, 의외성, 이야기를 걸어오는 듯한 친밀함등 그것은 풍경과 식생과 다른 건물들과 길과 광장과 조형물들과 조화와 변조를 이어간다.
콘텍스트란 비단 도시 공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맥락을 이해하는 것도 주효하고, 자연의 맥락, 그 사회의 문화, 정치사건, 인물, 예술 등 인간 행위 전반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는 것도들여진다. 그렇게 콘텍스트가 종합적으로 읽힐 때, 왜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있는지 스스로 설득이 된다.

통영은 스토리가 왜 그리 강할까? 왜 통영에 반한 사람들이 그리 많을까? 왜 통영에 그리 많은 사연들이 있을까? 통영 특유의 감성은 왜 그리 섬세하고 다채로울까? 혹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한려수도閑麗水道 풍경만으로도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우니 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이 통영에 있다.
첫째, 통영에는 사람들이 있다. 통영을 마음에 담은 사람들이자통영 이야기를 표현하고 전해준 사람들이다.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박경리, 시인 백석, 화가 전혁림 그리고 이순신 장군, 노무현 대통령등 태어난 사람, 자란 사람, 잠깐 들렀던 사람, 일하러 갔던 사람, 끌려서 자주 갔던 사람 등 가지각색이다.

윤이상은 어릴 적 바닷소리를 기억한다. 바다마다 파도 소리가다를까? 음악인이기에 각별히 소리에 민감했던 걸까? 그가 기억하는 소리는 흥미롭다. 밤바다 고깃배에서 고기가 철벅이는 소리와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엉키는 소리란다. 아마도 그사이에 파도 소리와 노젓는 소리와 갈매기 소리들이 섞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스름한 시간에 듣던 그 소리는 각별히 귀에 꽂혔을 것이다. 소리로 세상을 파악한다면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구성될지도 모르겠다. 윤이상은 그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 했지만 살아생전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2017년이 되어서야 그를 기리는 음악당이 있는 통영 바닷가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여기서 독일이 통일 후 지난 20여 년 동안 비무장지대를 탈바꿈한 ‘그뤼네스반트artines Band‘를 떠올릴 만하다. 말뜻 그대로 ‘녹색띠다. 우리의 폭 4킬로미터 비무장지대와 달리 200여 미터의 좁은폭에 길이가 무려 다섯 배가 넘는 1400킬로미터다. 이 공간이 고스란히 자연의 한 부분이 되었다. 공원‘ 대신에 ‘푸른 숲‘이다. ... 그뤼네스반트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바는 사람 때문에 끊어진 자연의 힘을 다시 잇는 것이었다.

독일 그뤼네스반트에는 철책이 있던 자리를 따라 자전거길을 만들어놓았다. 듬성듬성 박힌 벽돌 사이로 풀이 돋아 있는 공간을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면서 동·서독의 분단을 기억해보는 장치다.
우리는 무엇으로, 어떤 행위로 비무장지대를 기억할 것인가?
비무장지대의 3대 전쟁 요소라면 철책, 지뢰 그리고 초소다.
지뢰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하고 철책은 마땅히 걷어지겠지만 제거한지뢰와 철책으로 무엇을 하느냐는 온전히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남북한 초소들도 무작정 걷어내지 않으면 좋겠다. 지구의 마지 막 GP guard post(감시 초소) 트레일이 어떤 의미로 세계인들에게 다가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뿐인가. 땅굴도 있고 격전지의 흔적도 있고,한국전쟁 이전의 흔적들도 있다.
하나하나 절대로 없어져서는 안될 흔적들이다. 귀하게 여겨야 할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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