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흐름이고 파동이다. 거기에 접속하려면? 읽어야 한다. 책이 곧 별이고 지도니까
나는 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 들이 그들의 보답——보석으로 꾸민 관,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자,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버지니아 울프,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2012)
1987년을 주도한 청년들의 열정과 분노의 원천 역시 책이다. 맑스를 읽고 레닌을 읽고 『태백산맥』을 읽노동의 새벽』을 읽고… 읽고 읽었다. 금서는 더 열심히 읽었다.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역사적 진실이 있다는 증거라 여겨서다. 그들의 청춘을 빛나게 해준 것들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이념과 정파에 따라 혁명의 전략전술은 다 달랐지만 모두가 한결같이지향했던 구호는 단 하나. 누구나! 무엇이든! 다 읽을 수 있는 세상! 그리하여 모두가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대에 마침내 접어들었다.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다름 아닌 디지털 혁명이다. 흔히 디지털은 책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책을 읽지 않고 문자를 멀리하고 사유하지 않고….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디지털은 책을 시각과 묵독이라는 영역에서 해방시켰다. 나무라는 질료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열었다. 책은 본디 천지를 관찰하고 신의 음성을 듣고 대지와 교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무가 종이로, 책이 다시 종이 안에 들어가면서 대중화의 길을 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에 갇히곤 했다. 묵독의 대세 속에서 책의 지혜는 소리와 분리되었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견고한 장벽도 드높아졌다. 디지털은 이 모든 구속과 경계를 떨쳐 내는 중이다. 일단 책에접속하는 감각을 다원화했다. 사람들은 책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프 양과 랩으로, 연극으로 변주한다. 전파력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책이 전자로, 음성으로, 소리로 다원화되는 여정을 기뻐하라
에티카』(스피노자)를 통독한 회원이 말했다. "내 독서의 이력은『에티카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 『천 개의 고원에 흠뻑빠진 한 청년은 말했다. "이젠 철학을 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삶의 행로를 바꾼 한 중년은 "이제 니체를 읽지 않는 시간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책이 주는 기쁨이란 이런 것이다. 그 기쁨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실로 거룩한 체험이다. 나 또한 기꺼이 간증을 해본다면,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책 을 많이 보면 지식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그 모든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내가 읽는 책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 그 자체가 이미 힐링이다. 세상을 경쟁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광대무변한 토대이자 배경으로 여기게 된다. 그 유동성 속에서 자존감이 충만해진다. 그것을 누리고 싶다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는신체가 되는 것, 모든 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사실 먹는 것과 굶는 것은 신성의 영역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이 고기를 독차지하는 것에 반기를 들어 인간에게 불을 선사했고, 모든 종교는 단식을 의무화한다. "배고픔이 가장 훌륭한 치유의 약이고 모든 약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칼둔, 『무깟디마』 2, 126쪽) 이것은 신의 뜻이자 양생의 원리다. 신은 증식이 아니라 증여자체다. 식탐에 허덕이는 자가 증여를 하기란 어렵다. 하여, 주기적으로 단식을 의무화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야말로 건강의 원리다. "모든 병의 근원은 열에 있다. [..] 위에 있는 음식이 자연적인 열로 처리를 하기에는 너무 많거나, 위에 기존 음식이 아직 완벽하게 끓지 않았는데 새로운 음식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참으로 유능하지만 아주 심각하게 무능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휴식이다. 휴식은 능력이다. 잘 놀고 잘 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도 삶의 내공이 필요하다. 잘 따져보자. 제대로 쉬려면 일단 노동과 화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한다. 낮의 노동이 힘든 건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소외와 압박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소외고, 억지로 성과를 내야하는 것이 압박이다.
앎-사랑-이해-생성 창조의 무한하고 거룩한 변주! 자, 그러면 이제 니체의 이런 말들을 충분히 음미하수 있을 것이다.
신체는 앎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 그리고 앎을 통한 시도에 의해 자기 자신을 고양시킨다. 깨친 자에게는 모든 충동이 신성시된다. 고양된 자의 영혼은 기쁨을 맛보게 되고, [.…] 아직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길이 천 개나 있다. 천 개나 되는 건강과 숨겨진 생명의 섬이 있다. 무궁무진하여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 사람이며 사람의 대지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15 [개정3판], 130쪽)
우리는 모두 즐거움과 기쁨을 원한다. 한 매체의 모토는 ‘즐거움엔 끝이 없다일 정도다. 그런데 늘 허덕인다. 더 많이 원할수록, 더 많이 누릴수록, 그래서 이런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혹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이 아니라 허덕임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린 단디! 속은 것이다. 이 속임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허덕임을 떨쳐 내라. 헐떡이는 것에 도취되는 그 마음과 습관을 벗어던지라. 그러면 그 순간 평온을누리게 된다. 그것이 기쁨이다. 현대 생리학은 그걸 이렇게 증명해 준다. 아드레날린,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이 쾌락인데, 그것은 계속 강도를 높여 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끝없는 갈애(渴愛)에 빠지게된다. 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함을 느끼게된다고. 바로 그렇다. 책을 만나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그렇게 신체가 평온하게 리듬을 타면 벗이 찾아온다. 벗이란 본디 그런 존재다. 이익과 권력의 장에서는 벗이 아니라 라이벌을 만난다. 감정이휘몰아치는 곳에서는 연인 아니면 연적을 만난다. 전투적 경쟁심도 감정의 파토스도 벗어날 수 있는 관계가 곧 친구다. 권력투쟁에지칠 때, 사업이 망해 갈 때, 연인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때 우리는친구를 찾는다. 권위, 재물, 격정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 그 자체로 힐링과 멘토링이 동시에 가능한 존재, 그게 곧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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