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분장한 모습을 흑인 비하로 몰아가는 형의 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영구, 맹구라는 캐릭터는 자폐아들에 대한 비하로 해석될 수 있고, 예전에 한국에 시커먼스라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개그란 것도 있었어. 그럼 그것도 흑인 비하인 건가?

오늘날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그런 개그가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린 시절에 영구, 맹구, 시커먼스 연기를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학교에는 그 연기를 너무나 잘 흉내내어 인기몰이를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그런 개그가 웃기지 않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불편함을 표시하기도 쉽지 않다. 잘못하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확대해석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흑인 분장의 논란은 "도대체 왜 웃긴가?" 라는 상당히 심오하고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 웃음을 차별로 연결시키는것은 과연 얼마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며 ‘확대해석‘인지에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웃자고 한 말을 우리는 가볍게 웃어 넘서야 할까? 아니면 정말 죽자고 달려들어야 할까?

최근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인 혐오표현 (hate speech)은 약자들을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와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통해 특정 집단을 향한 비하성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똥남아"(동남아시아인), "똥꼬충 (게이),급식충" (아동·청소년), "틀딱충"(노인), "맘충"(엄마) 등 사람을 벌레‘나 ‘똥‘에 비유하여 비인격화하는 말들이 등장했다. 무엇이든웃음거리가 된다면 괜찮다는 듯, 집단적 편견과 적대감이 봉인해제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 웃는가? 토머스 포드 등은 실험을 통해 대상집단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에 따라 사람들이 비하성 유머에 다르게 반응한다고 밝혔다.
테러리스트나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합의가 있는 집단에 대해서는 이들을 비하하는 유머로 인해 잠재된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크지않았다. 반면 무슬림, 게이, 여성과 같이 사회적으로 긍정적 태도와 부정적 태도가 혼재된 집단에 관해서는 이들을 비하하는유머를 보았을때 억눌렸던 편견이 표출되는 효과가 컸다.

예전에 한 식사 자리에서 나는 어느 로펌의 원로 변호사와 같은테이블에 앉은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한 로스쿨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기분 좋은 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공부 잘해봐야소용없어. 남자가 공부를 잘해야 큰일을 하지." 옆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이 말을 유쾌한 웃음으로 받아넘겼고, 나도 그랬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일을 생각하며 뒤늦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한 원로 변호사에게 화가 난 만큼 그 자리에서 웃는 모습을 보인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말에 웃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문제제기를 할 만큼 순발력이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이라고생각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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