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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고를 때 그 소설에 기대하는 기대치와, 소설을 읽고 난 후의 소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도 자꾸, 더 나은 소설을 상상한다. 어딘가에는, 내가 더 나일 수 있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하는 소설이 있으리라는 기대감.





내가 이 책을 리뷰할 수 있을 지는 둘째 치고, 미학과 저항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단어의 총 집합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끌린다. 고로 고른다. 


이 작은 삶을 지탱하고 있는 힘은, 저항이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은 저항하는 일이 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그 저항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앞으로 살아가면서 알아가고 싶다. 그러니 이 책이 말하는 저항의 미학이 궁금할밖에. 내가 살고 있는 삶보다 더 극렬한 저항이겠고, 그러니 뭔가가 나를 관통하기를 바라면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일부,

전후 독일 사회의 ‘망각’에 저항하는 소설. _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철학자)



추락도, 소음도 좋아한다. 모든 이라는 수식어도 좋아한다. 모든 이라는 수식어는 허망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추락은 나만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에서, 소음은 소음을 내서라도 이 갑갑한 기분을 떨치고 싶어서 좋아한다. 소개글을 읽어보니, 제목으로 유추해본 느낌과는 약간 다를 것 같아서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가짜 고아가 수백 명인데, 나는 그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에요. 그게 바로 콜롬비아가 지닌 좋은 점인데요,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결코 혼자 떠맡지는 않죠. _302쪽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슬픈 일은 거짓 기억을 갖는 거예요. 




전통적인 서사를 잘 만드는 한국의 작가라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이 들릴 정도면, 좋은 작가겠지 하고 생각했다.






뭐때문에 구멍이 났나. 단정해보이는 집에.

요새 들어 부쩍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족폭력에 관한 이야기일까?

어떤 슬픔이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는 걸지 궁금했다.







과거에 읽었던 그의 소설, <<지평>>은 매혹적이었다. 주인공이 더듬더듬 걷는 거리를 내가 걷는 기분. 어쩐지 몽환적이라 여운이 남았다. 


이번에 번역된 소설이 읽고 싶어질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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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06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천하신 4권 모두 표지가 참 좋습니다. 책의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듯한...특히 모디아노 책 표지가 참 좋네요. 저는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모디아노 책이 되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끼 2016-04-06 18:03   좋아요 0 | URL
ㅎㅎ 맥거핀님이 뽑으신 책 보고 세권 골랐지요.. 이번에도 좋은 책들이 선정되기를 기대해요.

에이바 2016-04-0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세권 겹치네요 ㅎㅎ 홀도 좀 고민하다 빼고 스티븐슨 책 넣었어요. 올해 스티븐슨 책이 여러 권 나올 것 같더라고요. 민음사에서도 나올 예정이고.. 우끼님 근데 저항의 미학 클릭이 안 돼요. 다른 책은 표지 누르니까 상품페이지로 넘어가는데... 전 큰 기대없이 저항의 미학 뒤로 미뤘는데 지금까지 추천이 다섯개나 있어서 (?_!!)← 이런 심정이에요. 신간 추천하면서 추락하는~ 이랑 모디아노 소설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결과가 어찌될지...

우끼 2016-04-06 18:08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고쳤어요! 저항의 미학 너무 흥미로을 것 같아요 ㅎㅎ 만약 네 권중 두권이 된다면, 어떤 책이 선정 되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 스티븐슨 책은 어떤 분위기일지 궁금합니다. 에이바님이 선정하셨다니 흥미로울 것 같은 예감이..
 
[시스터캐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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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란 캐리가 도시로 와서 성공한 삶을 쭉 따라 서술된<<시스터 캐리>>는 번역된 책인데도 쉽게 읽힌다.  아마 번역이 복잡하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원문 문장이 쉽게 쓰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묘사가 복잡하지 않다. 작가가 나서서 인물이 개략적으로 어떤 맥락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시하고, 인물의 행동은 그 다음에 표현된다. 인물들이 하는 행동이 꼬여있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도대체 왜 인물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몇번이고 곱씹어야 인물 구도가 머릿속에 들어오는데,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그린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각들을 하는 인물들이라,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게다가 인물이 품고 있는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익숙하다. ‘안락함’, ‘풍족함’, ‘부유함’, ‘허영심’. 남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비교하고, 노동하고, 좀 더 안락한 집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즐겁게 살고 싶으면서도, 풍족하게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들. 그게 꼭 나쁜 건 아닌데, 욕망을 추구한다고 해서 만족과 연결되는 것은 또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러기 위해 그저 끊임없이 노동하고 저축하고 빚을 갚고, 어느새 그 삶 자체에 길들여져 있다. 그들은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을 하루하루 이어나간다. 또 누군가는, 이미 주어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그런 보상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쉽게 주어지기에, 만족을 모르고 산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은 세계에서 산다는 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와, 다른 시대와의 차이점이 아닐까.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에게나 길이 열려있게 된 것이 온전히 자본주의의 덕택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또 얼마나 많은 피가,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해 뿌려졌던지. 

현대적 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은, ‘캐리’의 입장에서 ‘캐리’가 욕망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에게 지워지는 마음에 부담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가독성을 높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캐리’라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인물이 중심에 서 있는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사회의 이면보다는, 욕망을 추구하는 ‘캐리’가 더 많이 보인다. 이미 내가 현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추구하고 있을 욕망이 ‘캐리’에 의해 대리만족이 된다. 마치 매번 같은 줄거리의 막장드라마를 매번 챙겨 보는 마음이나, 비슷한 플롯의, 인물 이름만 다른 판타지 소설을 읽는 마음과 닮았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와 판타지 소설과 다른 점은, 이 소설은 욕망을 실현하는 주인공을 끝까지 몰고 간다는 점이다. 캐리는 여배우로 성공한 다음 다시 불행함을 느낀다. 


홀로 앉아 있는 캐리는, 사고하기보다 느끼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다보면 잘못된 길로 들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비록 여러 차례 환멸을 겪었지만 캐리는 여전히 꿈이 현실이 되는 평온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임스가 더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 길로 나아간다 해도 그 길 너머에 또다른 것들이 잇달아 그녀 앞에 놓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세상이라는 언덕의 꼭대기를 물들이는 기쁨의 광채를 영원히 쫓게 될 것이다. 

아, 캐리, 캐리여! 아,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인간의 마음이여! 그것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움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그 아름다움이 고요한 풍경에 홀로 울려퍼지는 양의 종소리건, 묵가적인 풍경 속의 아름다운 빛이건, 지나치는 눈 속에 엿보이는 영혼이건, 마음은 그것을 알아보고 응답하며 뒤따른다. 발길은 지치고 희망은 헛되어 보일 때, 바로 그때 가슴이 아파오고 갈망이 솟아오른다. 그때에야 비로소 싫증을 내지도, 만족하지도 못함을 알리라.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서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이런 문단들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문단을 통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단계 욕망을 실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허망함을 말한다. 욕망은 끝없이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을 뒤로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인간은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만 욕망을 바라보는 한, 단 한 순간도 만족한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렇다 해서, 시어도르 드라이저가 이 소설에서 ‘만족’을 바람직한 조건으로 설정하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세밀하지도 않아서, 나머지 빈칸을 독자에게 채우라고 내버려 두는 것 같기도 하다. 

드라이저는 캐리를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 전형으로 두고 그려낸 것 같다. 현대의 인간상과 많이 닮았다. 성공할 즈음엔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는 자신의 이익보다 뒷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사회적 구조. 그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위해 살았고, 결국 성공하지만, 진정함을 나눌 친구 한 명 사귀기 어려운 삶.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성공을 부러워할 테지만. 

작가의 서술이 처음 부분에서는 많이 눈에 거슬렸으나, 캐리의 맥락을 따라서 읽다 보면, 작가의 서술이 그다지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그 시대에 읽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서술이, 현대에 와서 거슬리는 부분들은 있었다. 이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라든지. 남녀의 성차에 대한 발언들.  캐리의 양심을 신의 목소리라고 묘사하는 부분들. 제 잘난 맛에 취해 가장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중국의 황제라는 묘사. 요즘 시대에 들었다면, 시대착오적이라 말할 법 하다. 요즘 누가 ‘이성’만을 강조할까. ‘이성’은 현대에 와서 만능 통치약이 아니다. 게다가 이 책에서 드러난 남녀 성차에 관한 발언은, 내 입장에서는 관습적인 행동일 뿐인데 마치 남녀가 본디 성차를 가진 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맥락에 관한 따로 언급 없이 적혀 있어서, 자연스럽다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소설들은 묘사에 ‘신’을 맥락 없이 언급하지는 않을 테다. 또 중국 황제만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나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시대에 쓰여진 소설이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도 사고하기보다 느끼는 사람이 빠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끝난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작가도 뭔가 대안을 제시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대안을 모르고, 문제가 해결되면 그 뒤에 문제가 발생하리라 여기기 때문에, ‘몽상’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소설이 별로 위력이 없는 시대에, 고대 그리스 - 비극이 유행하던 그 시절처럼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이 소설이 쓰여져서 출간될 당시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지, 궁금하긴 했다. 

작가가 드러낸 문제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욕망을 쫓는 캐리처럼, 소설도 욕망을 쫓으며 읽다가 결말까지 오는 사람이 더 많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소설 구운몽도 양소유의 욕망을 따라 죽 그린 서사이고,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음을 얻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힌다. 다만 그런 방식이 작가의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방법인지는 내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 시대에는 이 소설을, 어떤 방향으로 읽을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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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4-0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랄까... 캐리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방향성을 잃은, 막연한 캐릭터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니까 빈 껍데기 같은거요. 화려한 무대에서 환호받는 자신에 취하지도 않고, 그 인기로 얻은 명성이나 부산물들에 좌우되지도 않는 어찌보면 지난 교육(드루에, 허스트우드와 살면서 얻은 교훈)이 아주 잘 되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고요. 에임스도 캐리가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 그릇 같다는 비유를 썼던 것 같은데 암튼 신기한 캐릭터였어요. 계속 심성이 고왔다 이런 표현이 나오고 친구한테 나름 의리도 지키고 하는 걸 보면 사이코 같진 않았고요. (제 생각엔요..) 남자들의 관계에서도 상당히 수동적이랄까, 그러면서도 수동적이지 않은 암튼 당시엔 모럴이 없다며 손가락질 많이 받았겠다 싶더라고요. 잘 읽었습니다.

우끼 2016-04-12 20:06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썼었군요.... 조심히 지우고 싶어지네요 ㅠ(그래서 지웠습니다.) 저는 허스트우드가 쓸쓸히 죽어간 것이 생각나서, ㅠㅠ 그 점을 생각하면, 캐리가 잔인하게 느껴지더라구요. 하지만 그것만 잘라놓고 보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도 캐리가 그렇게까지 나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갈팡질팡하는 모습보다, 욕망을 쫓는 모습에 주목했었습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이 아쉬웠고, 그게 잔인하게 보였지만, 그정도 잔인함을 누구다 다 행한다는 점에서 잔인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현대사회를 사이코패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라고 지칭하는 사람도 있고 하니, 그 측면을 이렇게 본다고 해서 뭐라 하기 어렵겠지만요.. 그렇다고 캐리의 다른 면모를 무시해서는 곤란하겠지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쓸때는 몰랐는데, 단어가 확 튀어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캐리가 방향성을 잃은 막연한 캐릭터라서, 더 소설적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향성을 잃고 헤메는 현대의 우리와 비슷하여,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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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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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를 읽고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소설은 작년에 읽었다. 책장을 덮기 전까지, 화자가 겪는 소용돌이에 나도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화자가 그 걸음을 쫓게 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그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만 <<익사>>가 소설인지,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실재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말하길 '조코 코기토'는 작가의 페르소나 격인 인물이라 하고, 작가에게도, 화자에게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너무 좋다고 느꼈기에, 되려 편견 중 하나에 의문을 품었다. 작가는 자신이 품은 의문이 담긴 모티브를 소설에 녹일 수는 있지만, 실재 작가의 삶을 그대로 적으면, 그건 소설이 아니게 된다고 여겼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하기에, 이번에 읽은 오에 겐자부로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 초기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삶을 소설의 형태로 엮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단편이 다 의미있다고 느꼈다. 물론 작가가 처음부터 어떤 형태로든 완성된 소설을 느끼고 쓴 것보다 응집력이 부족하다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소설도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중기, 후기 소설들은 그에게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도구 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도대체 어떻게 ‘반핵, 반전’을 소설로 녹여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허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그가 겪은 자잘한 일들을 엮어낸 그의 소설엔, 어느 순간에 그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반전, 반핵의 의미가 들어갔다. 예를 들어, 그가 만난 어떤 인물이 그에게 반핵 이야기를 강연으로 해달라고 요청한다든가, 그 와중에 반핵 운동의 세부 내용이 차이가 나서 요청이 취소되고, 또 다른 일행을 만나서 반핵과 관련된 또 다른 유형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든지 등등. 반핵을 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는 화자가 겪는 일화들을 통해서 반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이건 주장문도, 수필도 아니고 자잘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엔 맥락에 맞는 어떤 문장들이 마치 맥락 바깥으로 나와서 사람을 겨냥하는 기분이 들어서, 읽다가 놀라곤 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에는 이런 문단이 나온다.


“우린 개를 죽일 생각이었지.” 내가 애매하게 말했다. “그런데 도리어 우리 쪽이 살해당한 셈이네.”

여학생이 미간을 찡그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피곤에 지쳐 웃었다. 

“개는 살해되어 쓰러져 가죽이 벗겨져 나가지. 그런데 우리는 살해되어도 이렇게 돌아다녀. 

그러나 가죽은 벗겨졌다는 거지.” 여학생이 말했다. 

  p26<기묘한 아르바이트><<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이 문단을 읽고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개를 죽이는 아르바이트를 잠시 했을 뿐이고, 돈을 주기로 한 사람이 불법으로 개고기를 고깃간에 팔아넘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을 뿐인데,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하다니.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개에 물려 병원에 가야 하는 기묘한 상황에서 잘린 ‘나’, 잘린 상황을 ‘살해’당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었을까. 이 소설의 ‘살해’라는 비유 역시 무척 뜬금없이 느껴지는데, 어쩐지 맥락에서 아주 벗어난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대화 하는 발화 당사자들 끼리의 이야기 인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 바깥의 독자를 겨냥한 말 처럼 들린다. 


한편 중기 단편인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도전적으로 항변한다. ‘아무도 남을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 남을 자기 자신 만큼 존경하지 않아요. 또한 “사상”으로 그보다 위대한 것을 알 수 없어요. / 그러니 아버지,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이상으로 당신이나 형을 사랑할 수 있어요? 문간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작은 새만큼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사제가 분노하여 소년을 끌어다가는 악마라고 고발을 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했다 일찍이 많은 사람이 화형 당한 거룩한 곳에서, 울고 있는 부모들의 눈물은 헛되다 이런 일이 아직도 여전히 엘비언 벼랑에서 행해지고 있을까?’ 

p433-434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그리고 이 이후에, 아들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비탄에 젖은 상태로 가족들에게 겁을 준 상황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는 아들의 비탄을, 자신이 존경하던 H의 비탄을 보았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앞서 말해진, ‘아무도 남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화자가 겪은 몇가지 자기 반성적인 이야기로 뒤집는다. 


나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내가 집에 없는 동안 한없이 난폭했다는 아들의 눈이 발정 난 짐승이 충동이 이끄는 대로 갖은 난음을 다 하고도 그 여운에서 풀려나지 못한 혹은 그런 짐승에게 내부를 물어뜯기고 있는 것 같은 차마 마주 볼 수 없는 눈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눈곱 같은 누런 광채가 형형한 그 눈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던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이었다. 

…그러나 늦게 나마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감각으로 아들의 눈에서 비탄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뉴델리 공항의 바에서 H씨의 눈에 일순간 드러났던 ‘비탄’의 정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p452-453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초기 단편들은 상징들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일본의 현실을 비판한 단편들이 많다. 하나의 상징이 작품 마지막까지 단서를 품고 통과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이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배경도 설명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개를 죽이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개를 죽이는 데 참여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전쟁에 참여한 일본을 빗대어 표현한 느낌이 든다. <남의 다리>라는 작품에서는 말로만 혁명을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영달을 추구하게 되는 이기적인 인간상이 나오는데, 그 역시도, 일본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불안한 사회 현실 가운데 기댈 곳을 찾지 못해서 적극적으로 ‘우익’이 되는 <세븐틴>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화자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들 모두,  인물들이 각 집단 안에서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거기에서 어떤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어떻게 인물들이 각자의 믿음에 배반당하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들, 혹은 생명이 아프게 되는지 드러난다. 이 아픔들을 통해,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기, 후기 단편들은 그에 비해 훨씬 개인적인 삶 속에서 아이러니들을 찾아내고 상대를 비판하든, 비판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뚜렷한 목적은 초기 단편들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고, 어찌 보면 그렇기에 상징이 이끌고가는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훨씬 복잡해져서, 무엇을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지 모호하지만 감정이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켜진다. 어떻게 살고, 죽을 지 고뇌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 거기 있다. 그 투쟁과 통찰 속에서 자꾸 나를 비추어보게 된다. 


중,후기의 소설들이 일본 문학 장르 중 ‘사소설’에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고뇌가 지난하고 처절하기에, 그가 그의 삶의 주제에 사로잡혀 평생 그것만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하더라도 나는 이해할 것 같다. 어차피 독자인 나로서는 어디까지가 작가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허구인지 구분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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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16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증기의 레인트리 연작이나 이요를 다룬 이야기들은 맬컴 라우리의 소설이나 블레이크의 시들을 읽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 작품들을 읽지 않고서는 아마 오에의 이 중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아무리 어떻게 노력해도 반쪽 그 이하의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한가지만은 그래도 어렴풋하게 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위의 우끼님 말슴처럼 오에가 끊임없이 글로서 투쟁과 통찰을 해나가는 인물이라는 거죠. 말씀하신 최근에 나온 <익사>를 봐도 현재에 안주해있으려는 의식 같은 것은 오에에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는 않아도 그의 작품들이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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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몇 가지나 되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아간다는 것일까. 그래서 슬픔을 몸에 축적한다는 의미일지도.


밀란쿤데라가 <무의미의 축제>라는 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죽게 될 운명이라는 것도, 여성으로 태어난 것도, 남성으로 태어난 것도 어느것 하나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닌데,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냐고, 인권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사실 이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라고. 바꿀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고통받으나, 애초 바꿀 수 없기에 논쟁하지 않고, 다른 걸 가지고 무수히 많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저 사람들 전부 좀 봐라! 한번 봐! 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 적어도 절반이 못생겼지. 못생겼다는 것, 그것도 역시 인간의 권리에 속하나? 그리고 한평생 짐처럼 추함을 짊어지고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너는 아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네 성(性)도 마찬가지로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네 눈 색깔도. 네가 태어난 시대도. 네 나라도. 네 어머니도. 중요한 건 뭐든 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들이란 그저 아무 쓸데없는 것들에만 관련되어 있어, 그걸 얻겠다고 발버둥치거나 거창한 인권선언문 같은 걸 쓸 이유가 전혀 없는 것들!(133p) ” <무의미의 축제>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147p) ”<무의미의 축제>


아이러니다. 우리가 인권을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 우리가 차별적 요소를 문화적으로, 신체적으로, 시대적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인데. 물려받은 것을 동등하게 여기고 누군가를 차별함으로서 내가 차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인권을 주장하는 것인데,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에서부터 차별을 없앨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을 만들어가려 하는 것인데,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었나. 위대한 진리로서 인권을 숭상하는 것보다, 애초 모든, 바꿀 수 없는 타고난 특징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무의미를 무의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하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는 소설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 그때는 그렇게 이해했는데,, 나는 지금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들도 걱정해야 한다고 여긴다. 정치도 중요하게 여겨서,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공멸을 막기 위한 다른 방법들을 논의해야 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사고를 해야 하는 시기라고... 그렇다 해도 나는 작가의 말대로, 내 주변을 통해서 남을 챙길 수밖에 없겠지만.

사실, 내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누군가가 내 삶이 고통스러우라고 해서도 아니다. 내가 돈이 많지 않아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다. 돈은 있는 만큼 쓰고, 소비는 줄이면 또 상황에 맞게 줄일 수 있다. 게다가 때로는 내가 공평하게 대해져도 고통스럽다. 대체로 관계문제때문에 나는 고통받는데, 그건 남과도 관련이 있지만, 내가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현대의 개인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고, 모두가 다른 것들을 원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나 자신을 찾기도 어렵고, 찾는다해도 균형을 잡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 관계가 어긋나지 않고 잘 흘러간다면, 그걸로 나는 대체로 만족한다. 그리고 관계에서의 공평함이란 '인권선언문'같은 위대한 진리의 증거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각자 복잡한 것들이 얽혀있는 것을 잘 풀어갈 때, 이루어진다.  



 근데 나는 단지, 체계는 없고,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말을 하고 있던 적은 없을까?


나는 그런 고민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소설을 읽는 게 좋다.


이번에는 무슨 책을 고를 수 있을까. 










윤대녕의 책은 재미있었고, 이번에도 재미있으리라 기대한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일부

" 오하이오 주 작은 마을 와인즈버그를 배경으로,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막막하고 절실한 갈망과 그 좌절에서 오는 뼈저린 외로움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낸 연작단편집이다. "





산업화시대에 살기 때문에, 나는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잘 살려면 옆 사람과 꾸준히 소통해야 한다. 나는 작가가 시대상을 어떻게 고민했는지 궁금해졌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일상 속의 균열과 파동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작가 최정화가 등단 이래 활발한 활동으로 쌓아온 열편의 소설이 묶였다. 온전해 보이는 세계 안에 스며 있는 불안의 기미를 내성적인 사람들의 민감한 시선으로 날렵하게 포착해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자세가 야무지고 미덥다. 


나는 약점을 가진 사람이 좋다. 약점을 가진 사람은, 그 약점만큼이나 살면서 많이 아파했고, 그랬기에 나의 약점도 조금 더 편안하게 보아줄 것 같기 때문이다. '내성적인'것도 자기 어필을 못하여 상품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나는 작가가 그려낸 '지극히 내성적인'이야기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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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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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차별받기도 하고, 무시당하기도 하는 사회적 현실이다. 그 슬픔은 아랫대로 내려가고, 물려받는다. 사회에 기대어 살아야만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는 현실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자급자족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럴 능력을 박탈당했는가. 

로레타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기 전에도,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과연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가난을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꿈을 꾸기 위하여 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도 술병이 나 있다. 열심히 일할 만한 자리도 없거니와, 일한다 해도 상황이 극복될 만한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오빠는 돈때문에 밖으로 나돌고, 로레타가 처음으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일어나보니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그를 죽였다고 믿는다. 그녀를 사모해왔던 경찰이 그 시체를 보고서, 로레타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녀와 섹스를 한다. 그 이후 그녀는 그와 결혼한다. 그가 그녀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가 나타났기에 자신의 정서적 충격과 혼란을 모두 해결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로레타는 그날 이후 자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감정에 무감하게 된다. 일상 속에 스며든 폭력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내가 폭력을 당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폭력을 행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고 살아갈 뿐. 그건 정말 ‘돈’ 때문일까. ‘돈’ 이외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돈’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회적 환경 때문일까.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 때문일까. 어떤 상상력도 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그들은 삶이 닥쳐오는대로 그대로 그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로레타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돈이 없는 자에게 돈이 없어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돈이 없어도 인간다운 삶을 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완충작용을 할만한 시스템도 없다. 어딘지 모르게, 생계 수단은 전부 ‘돈’이고, ‘돈’이 없거나 벌기 힘든 사람은 여성인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지, 의문을 품을 겨를조차 없어 보인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면서 결혼하고 하는 생각은,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것으로 무엇을 살지 꿈꾸는 것 뿐이다. 그녀의 딸중 하나인 모린도, 오로지 ‘돈’을 위해서 남자에게 몸을 파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돈은 돈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지, 무엇을 하고 싶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돈을 모아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을 것이라 여긴다. 실재로 그녀는 처음에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어했으니까. 하지만 로레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모린이 어떤 일을 해도 싫어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의존하고, 그녀에게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얻고 싶어했다. 그녀의 삶은 통제되지 않았기에, 모린을 통제하여 얻을 수 없는 충족감을 얻고 싶어했다. 원하는 것은 질서에 맞게 행복한 방향으로, 상상되지 않고, 누군가가 원했던 것을 자신이 원한다고 착각하거나, 질서를 어그러뜨려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통제한다고 착각하면서만 가능했다. 구조가 바르지 않으면 수정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다. 로레타의 이런 혼란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자란 로레타의 아이들은 로레타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겉모양으로는 다른 삶을 이루어낸 것처럼 보이며, 로레타와 달리 그것을 실재적으로 만드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줄스는 질문한다. 


“평범한 일상과 폭력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중략) 모두들 그것을 살아내고 또 살아내고, 도무지 끝나질 않아요. 갈 곳도 없고, 도시 한복판에 공터도 없고……도시 한복판에 공원이 있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공원은 불에 타지 않아요!(중략) 그건 상처를 입히지 못해요. (중략) 강간범과 강간 피해자가 동틀 무렵에 마침내 폐허에서 일어나 각자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식당을 향해 걸어갑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열정은 오래가지 않아요! 열정이 다시 찾아오기야 하겠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p698<그들>


사람들이 불을 지르고,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을 한쪽에서는 ‘폭동’이라고, 한쪽에서는 혁명이라 부른다. 줄스는 왜 저렇게 말했을까? 누가 적이고 적이 아니고, 구분하는 게 중요한 게아니라. 각자에게는 각자의 ‘일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저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누구에게도 그들의 삶을 침범당하지 않고. 모린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결혼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들을 외면한다. 그런 모린에게 줄스가 와서 말한다.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중 하나가 아니야?”p706


모린은 줄스의 말을 외면하지만, 줄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던 것에 냉소를 가지고, 가능할 것 같은 상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냥 살아있고 싶은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있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모두 가진 소망을 실현하고 싶어서,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환경을 외면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걸 알기에 줄스는 그렇게 모린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정말 읽기 힘들었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잔인한 부분은 오히려 가볍게 처리되었는데도. 일단 분량과,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뒤틀린 내면묘사때문에 읽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금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헷갈리지 않고 바르게 잘 살수 있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시간내서 천천히 읽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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