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보급판)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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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라! 통곡하라!" 물가에서 두꺼비가 외친다. 나는 통곡한다. 슬픔이 사랑으로 통하는 입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우리가 부수고 있는 세상을 위해 통곡하도록 하라. 세상을 다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p524


재난에 대한 자연적 반응을 억압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의 일부다. 이 반응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데서 위험한 분열이 생긴다. 삶의 토대에 직관적이고 정서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와 동떨어진 정신적 계산에 몰두한다. 이런 분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사멸이 준비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다.”p476


이런 광경이 비탄과 눈물 말고 무엇을 자아낼 수 있을까? 조애너 메이시는 우리가 지구를 위해 슬퍼하기 전에는 지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썼다. 슬퍼하는 것은 영적 건강의 징표다. 하지만 잃어버린 풍경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지에 손을 얹고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온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처 입은 세상조차도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다. 상처 입은 세상조차도 우리를 떠받치고 우리에게 놀라움과 기쁨의 순간을 선사한다. 나는 절망이 아니라 기쁨을 선택한다. 그것은 내가 현실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기쁨이야말로 대지가 매일같이 내게 주는 것이며 나는 그 선물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P478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묻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선물은 무엇일까? 그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할까? 옥수수 사람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들은 세상을 선물로 인식하고 우리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생각하는 지침이 된다. 진흙 사람과 나무 사람과 빛 사람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호혜성의 감각이 결여되었다. 대지의 떠받침을 받은 사람은 옥수수 사람, 자신의 선물과 책임을 깨달아 변화된 사람뿐이었따. 감사가 우선이지만 감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날개나 잎은 없을 지 몰라도 우리 인간에게는 말이 있다. 언어는 우리의 선물이자 책임이다. 나는 글쓰기야말로 우리가 생명 세계와 나누는 호혜적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말은 옛 이야기를 기억하는 말이요, 새로운 이야기 --과학과 정신을 다시 합쳐 우리를 옥수수로 만든 사람으로 길러내는 이야기 -- 를 만들어내는 말이다.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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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마농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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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들의 정도와 심각성을 인정하는 것과, 추상적인 미래주의와 그 숭고한 절망의 정서와 무관심의 정치학에 굴복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뜨거운 퇴비 더미 속에서, 예기치 않게 협력하고 결합하면서 서로가 필요하다. “
“우리는 각자의 전문지식과 경험에 갇혀 너무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너무 적게 안다. 그래서 절망이나 희망에 굴복하는데, 어느쪽도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절망도 희망도 의미에, 알아차리는 일에, 물질적 기호론에, 지구에서 두텁게 공존히며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들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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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몸문화연구소 번역총서 1
스테이시 앨러이모 지음, 윤준.김종갑 옮김 / 그린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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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읽고 느낀 첫 번째 감상은, 뻗어 나갈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말로 축소해야 했다.
이 책은 농사에 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소농과 관련하여 읽을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과 연관되어 있고, 말,살,흙은 우리가 폄하하고 분리해온 ‘비인간자연‘, 흙, 공기, 물, 동물, 식물, 물질등이 우리 몸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소농의 삶은 ‘비인간자연’이 어떻게 몸에 침투해들어오는지, 우리가 분리하여 생각해왔던 ‘환경오염‘이 언제고 내 바깥에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겪는 삶이다. 오늘날 농촌의 삶은, 논밭 옆에 송전탑이 있어, 보다 많은 농부가 암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양수발전소 건설 예산 확정으로 인하여 미래에 산을 깎고 파괴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삶이고, 골프장을 건설한다며 산이 다 깎여나가는 것을 막으려 싸우는 삶이고, 도시에 공급할 전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하여 논밭에 태양광발전을 깔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정부를 향해 반대투쟁을 하는 삶이다. 밭을 조금 멀리 걸어나가면 공장이 있고 폐수나 오염물질이 흘러나온다. 도시 사람들에겐 ‘흙‘이 더러운 것이므로, ‘흙‘없이 농산물을 생산하는 ‘스마트팜‘에 밀려 소농에게는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나마도 생태적 삶을 지향하며 토종씨앗을 널리 보급하려는 일부 농부는 농진청에게 씨앗채종시기에 최저임금을 받고 씨앗을 넘긴다. 그리고 농진청은 씨앗들을 개량하여 종자회사와 계약하고, 종자회사는 대량생산을 하는 ‘농업‘인들에게 씨앗을 비싼 값에 ‘판매‘한다. 그 종자는 본디 값을 매기지 않고 농부들이 손에서 손으로 전하던 씨앗이다. 파종에서 채종까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씨앗이 종자기업의 이윤논리에 따라 한 해만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지 않는다. 흙과 교감하며 흙을 살려 식물을 기르며, 자연농을 연구하는 소농은 이 틈바구니에서 식민화되고 착취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소농은 도시 사람들이 바깥이라 여기고 착취하는 공간에서, 외부자로, 자연으로 취급당하는 존재이다. 마치 재생산노동,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자본주의는 유급노동이라 지정되고 비용지급을 강제하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가장 많이 돌봄과 재생산, 토지 등 필수적 공공성을 약탈해간다. 그러면서 자유를 제로섬게임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소농을 포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다른 삶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이제와서 다른 존재를 식민화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데, 어떤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을 상상하든, 비인간자연이 외부에 있고, 우리와 단절된 것이라는 시선으로, 비인간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쓰레기를 만들고, 주변을 황폐화하여 지금 당장 편리함을 찾고, 쓰레기를 투척하는 한,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비인간자연이 우리자신을 어떻게 함께 오염시키는지 기억하는 게 좋겠다. 이 문제를 쉬운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오염시키는 구조 안에서 숨쉬고 있는 한,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사람들과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논의하고, 삶을 바꿔나가지 않는 한, 이 책의 시사점은 도로 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비인간자연이 인간에게 항상 친절하고, 안전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인간자연을 격리하여 인간을 고립시켜 살아갈 수는 없고,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드러났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기후재난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계속 바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술‘로 해결하려고 태양을 가리는 시도까지 연구되었으나, 그 정도를 인간이 조절할 수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데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암 치료법이라 말해지는 방사선치료도, 인체의 면역력 이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일정정도 이상 치료법을 이용시, 방사선에 노출되는 일은 암을 증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대기가 ‘희석‘할 것이라고 믿었던 간에, 산업혁명 이후 낭비적 생산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100년 간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100년 전에 비해 1.5도씨를 넘는 것이 현재로선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IPCC의 보수적인 보고서가 2023년에 나왔다. 이는 비인간자연이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고, 늘 인간과 함께,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이 신호를 공포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위기의 시국에, 비인간 자연과 어떤 경계로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다시 배워야 했다. 나는 무엇인가든 해야 했고, 비인간자연에 지나친 영향을 주지 않으며 살아갈 방법으로, 자연농, 소농의 삶을 선택하려 한 것이다. 다만 소농의 삶을 고민하다 보니 얼마나 이제까지 도시의 삶이 비인간자연을 외부화하는 일이었는지, 그게 어떻게 미세먼지, 기온상승으로 되돌아오는지 깨닫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혼자 실천을 잘 하며 살 수도 없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은 셈이다. 혼자만 잘 사는 건 불가능했다.


2.
책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꼽아 보겠다. 하나. 먹던 도리토스를 흙에 뿌리려던 에피소드다. 흙이 너무 소중하고, 도리토스가 흙에 쓰레기같아서 뿌리지 못하는 ‘화자‘는 그걸 맛있게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르게 자각하게 된다. 흙이 식물을 길러내는 데 필요한 힘을 도리토스는 주지 않는다. 흙은 화자가 먹는 식물을 길러내는 존재다. 흙에서 난 것을 화자는 먹는다. 흙에서 난 것이 화자의 살이 된다. 여기서 글의 화자는 도리토스를 몸 안에 소화시키는 일이 쓰레기를 몸 안에 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낸다. 흙과 자신의 살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도리토스를 먹지 않는다. 흙에 뿌리지 않는 것을 몸 안에도 뿌리지(?) 않는다.
오늘날 어디서든 먹는 대상으로 대하는 동물은 운신조차 힘든 철장에서 지낸다. 혹여라도 집단감염되면 전부 죽여야 한다는 논리로, 항시적으로 항생제를 먹인 이들이 사람의 식탁에 오른다. 빨리 자라야 이윤이 되므로, 성장촉진제를 먹인다. 항생제를 먹지 않아도, 성장촉진제를 먹지 않아도, 동물을 먹는 것으로 우리는 성장촉진제 과다복용을 하며, 항생제 내성이 생긴다. 그리고 집단으로 죽인 동물들은 흙이 되고 물이 되고 자연 어디론가, 계속 흘러들어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니, 이미 사람 몸 속에 들어와 몸을 형성한, 동물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자신에게 무엇을 먹이고 있는가? 먹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되고 있는지?

둘. “동물성 지방과 유방암의 관련성을 공표하지 않는 미국암협회..“”환경을 청결히 관리하는 것보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 더 쉽다.“”우리는 이윤경제에 살고 있고, 암 예방에는 어떤 이윤도 없으며, 오로지 암 치료에서만 이윤이 생긴다”[말살흙]p212….. 인용한 문구는 오드리로드 개인의 몸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가 바다에 투기되는 이유는 그 방도가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사능물질은 노출정도에 비례하여 암을 발생시킨다. 현재는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핵폐기물을 증가시키는 핵산업을 부흥하려 보조금을 지급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를 보라. 한 번 투기한 오염수, 또 빌미를 제공할까 걱정된다. 이미 투기가 시작되었지만 언제고 중단할 수 있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윤논리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기후재난에도, 바다오염에도, 예방에는 이윤이 없다.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집단‘에게만 이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집단은 자본을 가진 집단에게서 이윤을 얻는다. 현대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집단은 누구인가? 처음 공장을 세워 스모그를 만들었던 집단. 석탄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생산하여 부산물을 만드는 집단.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해온 집단이다. 기후재난에 기여하고서 기후재난을 막겠다 말하는 집단이다. 철저하게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사회를 파괴해도 이윤이 우선인 집단을 신뢰하고 정치를 내맡길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집단의 일부인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 이윤을 우선시하는 집단의 바깥에서 생존하는 게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소농의 삶이 가능할 방도라고 여겼는데, 그마저도 이윤을 우선시하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가능하지 않아보인다. 정치, 정치밖에 없는 것 같다. 남에게 내맡기지 않는 정치.

셋. 화학물질과민증을 가진 사람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아프게 하는 환경을 만든 집단을 탓할 것인가? 조금 더 분명한 사실은, 화학물질과민증을 앓는 사람에게도 안전한 공간이 과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장애운동의 논리와 닮아있다. 장애인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이 비장애인에게도 편하다는 것. 다만 인간에 국한되지 않도록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비인간자연에까지도. 오염되지 않은 공간에서 살 때 증상이 빨리 발현되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다.

3.
자급운동을 하고 싶다. 나는 농민들이 농협에 앞집, 옆집 5억씩 빚을 져가면서 자신을 갈아 농사를 짓고, 이주민을 식민화하고 착취하는 방식으로만 굴러가며, 석유산업에 의존하는 ‘농업‘이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속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속하는 일이 나 자신도 오염시키는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국가간 빈부격차로 인한 임금격차로, 이주민은 값싼 노동을 지속한다. 그들은 태어날때부터 가난한 국가에서 태어나 그를 감수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착취할 권리가 있는가? 태어날때부터 식민화된 곳에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같은 논리로 식민통치가 조선을 풍요롭게 했다는 논리도 있다. 돈이 되는 농사만 지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단절된 도시의 정책을 비판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살아있는 땅에서 난 식물이 ‘고급‘식품이기만 한 많은 도시인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는가? 그들은 도시에 산다는 이유로 영양가도 덜하고 맛없는 채소를 먹어야만 하는가?
제조업, 공업등 각종 개발로 대기, 물을 오염시키고도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는데 보통의 많은 사람은 이 때문에 많은 기간을 미세먼지에 고통받는다. 언제까지 시달려야 하는가? 피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공기청정기는 그 필터를 만드는 데도, 그를 돌리는 전기를 생산하는 데도, 또 다른 미세먼지를 발생시킨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자유가 제로섬게임이 맞는가? 아니, 아니다.

4.
정치를 남에게 맡기지 말자. 내 몸이 정치의 장이다. 이 몸을 통과해 비인간자연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는 비인간자연에 내 몸의 물질들을 내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내 몸이 이 지구의 병을 함께 앓고 있다. 나는 이 몸을 신뢰하고, 이 몸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이 몸으로, 남에게 맡기지 않는 정치를 배우는 중이다. 지역에서부터 삶을 바꾸고 지역을 바꿔야 이윤중심 사회에서, 공공성 중심 체제전환이 가능하고, 정치가 가능하지 않을까? 도시에서도 경작할 땅이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하면서 농촌에서의 소농의 삶을 이야기하고도 싶다.

다른 고민을 하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읽고 소감을 남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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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07 2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기전인데 우끼 님 리뷰 읽으니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커집니다!!

우끼 2024-02-10 00:2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 기다립니다!!

난티나무 2024-02-08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리토스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아요! 1장만 읽고 별 다섯 백자평 쓰고 싶은 1인 ㅋㅋㅋ

우끼 2024-02-10 00:24   좋아요 0 | URL
꼭 써주세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4-02-08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마다 쿡쿡 찌르네요. 특히 3번은 마음이 아픕니다.

우끼 2024-02-10 00:24   좋아요 0 | URL
ㅠㅠ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반유행열반인 2024-03-07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 축하축하 ㅋㅋ 흙하면 (현실?맴속?) 도시농부 우끼님 자동 인출되는 신기한 현상 ㅋㅋㅋ

우끼 2024-03-08 09:39   좋아요 1 | URL
하하 ㅠㅠㅠㅠ 고맙습니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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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계속 졸음이 밀려왔다. 요즘 스트레스 받으면 종종 몸이 졸음을 강제하여 스트레스 수치를 낮추려고 했다.. 

시험은 정말 공정한가? 시험이 그나마 채용시장에서 직접 차별당하는 것보다야 공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시험에 뛰어들면서도 시험밖에 남지 않은 현실이 공정한가? 왜 먹고 살기 위해서, 차별당하지 않기 위해서 시험에 올인해야 하는가? 시험은 시험이라는 제도에 특화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은 누군가는 반드시 시험에 의해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왜 말하지 않는가? 시험을 잘 보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마저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현실을 왜 함께 말하지 않는가? 시험이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더 유리하도록 계속 변형되고 있다는 사실, 시험의 판을 짜는 일은 노동력만 가진 사람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왜 외면하는가?
시험 하나 통과한다고 함께 살자는 일을 하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왜 공유하지 않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고립감에 몰렸던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냥 위안이 되지만은 않았다. 이미 노력했음에도,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게으르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갈음하는 사람들이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아닌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건데, 어떻게 바꿔야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쉽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능력주의적 평가 기준이 성별고정관념을 배제해 성차별을 완화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젠더 혹은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기업 내부의 객관적 혹은 주관적 평가 기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분석한 해외 연구들에 따르면, 표면적으로 젠더 중립적인 평가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소수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의 개입은 제거될 수 없다. 우선 구성원들 간 존재하는 지위의 격차는 구성원들에 대한 기대치를 상이하게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144p

위 사안은 싱어게인 역대 우승자 3명 모두 남성인 것에서도...발견했던 것 같다. 심사위원 투표든, 시청자 투표든, 남성이 연속으로 우승한 것이 이상했다. 그 외에 내가 속한 조직에서도,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남성보다 월등히 뛰어나야 했고 비슷한 수준일 경우에는 여성이 하향평가 받곤 했다.


내가 사회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해방을 위해서이다. 혼자 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고, 사람 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서 함께 숨쉬는 식물들과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삶을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적응이 어려운 건, 나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나를 바꾸려 애쓰는 게 나를 위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시장에서 나 자신의 삶만 구하려 애쓰는 일로는 나 자신도 구할 수 없고, 누군가의 희생을 항상 방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희생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리라는 마음 때문이다.
돌봄 대상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운명이라 여기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돌보는 일로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살 수 있는 삶을 간절히 바라고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더 맡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어떤 형태의 돌봄을 내가 전할 수 있을지, 어떤 형태의 돌봄을 받을 수 있을지, 그것을 개인의 힘만으로 해내도록 내던져버리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시스템이 돌보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도울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이 꿈은 함께 만드는 꿈이 아니고서야, 누락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할 수 있는 것부터 말하되, 열려있는 꿈이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청년여성이 자신을 탓하지 않고 사회를 탓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고 했는데, 그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 책이 당신에게도 힘이 되기를, 나 혼자만 괴로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숨을 쉴 수 있는 결정들을 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 길이 함께 사는 길이기를 바란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0년간 한국의 자살률이 감소하다가 2018년을 기점으로 다시 증가한 현상에 주목하면서, 청년여성의 높은 자살률이 전체 자살률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간 남성의 자살률은 증가하지 않았다.”p11-12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교육에 개입되면서 자신이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패배감이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쳐 이들 중 대부분이 불안증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앓는다고 지적했다.” p13

"아빠는 원래 성격이 그래. 너가 성격을 고쳐."p74

"딸로 하여금 지금까지 수행해온 가족규범을 준수하게 만들고 그녀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균열의 존재를 지워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어머니들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딸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유도한다."p75

"승진도, 성과평가도 없는 직군이라는 여성들의 직장 내 지위는 중심부 노동자들의 책임 전가뿐만 아니라 괴롭힘에 대한 고용주(사용자)의 방관을 낳는다. 불안정한 고용관계는 이들을 일회용 노동자로 인식하게 되고 회사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을 지체하며 피해자들이 스스로 회사를 떠나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괴롭힘 문제를 처리한다."p97

"교육상품을 구매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 임금노동이 제한된다는 사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청년여성들에게 그 자체로 위험부담이 된다."p102

"게다가 노동시장에 만연한 성차별은 시험이 가지고 있는 공정성을 부각한다."p106

"기업별 노조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꾸려 집단주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 내부노동시장은 경력직을 채용하기보다 공채, 즉 대규모 신입사원 채용을 선호하기에 외부노동시장에서 경력을 시작한 노동자들이 내부논동시장으로 이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도전에 가깝다."p109

"이들은 짧은 근속연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직에 성공했는데, 이는 많은 지원자들의 근속연수가 짧아 그것이 유의미한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그만큼 대부분의 회사들이 서로 유사한 수준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p118

"앞선 참여자들이 경험한 반복적 이직은 열악한 노동지위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선택'은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행위로 이동을 의미화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압박에서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즉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고 그러한 삶을 위하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인식하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는 틀로도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특정한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위치 지으면서, 그러한 삶을 향해 정진하도록 우리를 통치한다. 모든 사회관계의 토대를 시장으로 간주하여 시장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명령하면서 국가를 넘어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합리성을 구축하고 동시에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서의 합리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p118-p119

"남성 노동자에 대한 선호 앞에서 여성들의 노력은 무화된다. 남성들과 함께 경쟁하는 직군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차별은 남성 노동자와의 직접적인 비교 속에서 이뤄진다...비대졸 여성의 경우 이들이 경험하는 차별은 대체로 여성집중직종에서 이뤄지는 여성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다. 이러한 가치절하는 사회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성차별로 의미화되기도 어렵다." p135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일환으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야기된 실패를 개인의 무능력으로 포장하여 도덕적 멍에를 씌우는 역할을 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는 '노력'이라는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되고 은폐뙤며 성공하지 못한 나머지 '잉여'들은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p143



"청년여성들이 자신의 '회피'성향의 원인으로 이야기하는 게으름은 실제로 무기력하거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p152

"자신의 현재적 결함에 대한 성찰이 지속될수록 이들의 결함은 과거로 소급된다. 특히 양육담론이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어린 시절의 부모 양육에 의해 형성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서사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확장된다."p153



* 이 책이 궁금하여 서평단을 신청했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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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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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관념이 아니다. 평등은 실천이다.…우리는 원칙을 포기하는 ’결정자‘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일이 다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관여자’가 필요하다˝14-15p


말은 쉽지만, 평등을 관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까지 자신을 숙고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평등하다 여긴다 한들, 상대도 역시 관계가 평등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평등을 말로만 배우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학습한 것은 의무교육과정을 졸업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발달장애인 시설에 갔을 때, 한 사람과 6개월간 매주 만났을 때, 나는 6개월이라는 기간이 끝나가는 그 즈음에서야 이 사람과 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 이전까지 이 사람이 반응하는 데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으니까. 살아온 삶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므로. 우위에 서지 않고, 그렇다고 끌려다니지도 않으려면, 계속 살펴야 했다. 이때의 경험을, 나는 평등을 처음 학습한 때로 기억한다. 우리가 그 순간 평등하다 여긴게 나의 착각이었을 지라도, 나와 조건이 매우 다른 사람과 오랜 기간이 걸려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경험은 이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경험을 어떻게 다른 평등과 연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그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 원칙을 포기하는 결정자가 되지 않고,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여자로 자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방식으로는 가능해보이지만, 언제까지 그 방식을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매 순간 숙고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대로 사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기의 운명이 다른 어떤 존재나 그 존재가 놓인 운명의 은유로 사용되면서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은유적으로 부재 지시 대상은 원래 의미가 그 단어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위계 관계에 동화되면서 반감되는 무엇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동물의 운명이 지니는 원래 의미는 인간 중심적 위계 관계에 흡수되고 만다. 특히 강간 피해자나 구타당한 여성에 관련해 동물이 경험하는 죽음은 피해 여성의 뼈저린 아픔을 대신 표현하는 데 사용되면서 의미가 반감된다." 105p

"여성이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느낄 수 있고 현실에서 고깃덩어리로 취급받을 수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도살되고 물리적으로 구타당하는 동물은 정말 고깃덩어리가 된다. 급진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사용되는 이런 은유들은 적극적인 상징적 행위와 글자 그대로 동물의 운명을 무시하는 소극적인 폐쇄, 부정, 생략 행위 사이에서 교차한다. 은유 자체는 억압이라는 겉옷 안에 받쳐 입은 속옷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p113

페미니즘 책을 벌써 6권 이상 거쳐왔는데(제대로 꼼꼼히 읽지는 못해서 거쳐왔다고 표현했다) 아직도 페미니즘이 내 삶에 자연스러운 관념인지 의문이 든다. 육식과 페미니즘을 연결짓는 다큐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하는 동물의 삶이 착취란 사실을 깨닫게 되어 놀랐고,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동물에 가해지는 폭력을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은유로 사용하는 일이 또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은유가 함께 쓰여질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지만, 헷갈리기 시작했다. 

실상 비거니즘에 관하여 접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14년경이지만,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한동안 살다가 사정상 식단을 선택할 수 없을 때에 2-3년간 육식도 했으므로, 나는 알게 된 것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은 기간이 꽤 길다. 이때의 부채감이 근 1년간 비건을 도전할 때 스스로를 좀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건을 실천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더이상 동물을 소비할 때 하던, 자신을 갉아먹는 사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미각에 졌다고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비건을 하시는 분들 앞에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바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주늑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내가 비건을 1년 가까이 지속한 건, 엄밀히 말하면, 비건을 지속하면서 비거니즘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분들 덕분이다. 이들의 존재가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분들이 없이 비거니즘을 지속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결국 동물의 고통이 내가 비거니즘을 지속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네트워크가 나를 비거니즘으로 이끈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육식의 성정치>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은유로 쓰이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더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부주의한 부분이 이 부분일 테니까. 동물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내내 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것이기에. 나와 함께 하는 비인간동물인 고양이는, 어쨌거나 타자의 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이니까. 나는 부재지시대상이 된 다른 동물을 계속 무시하는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들을 부재하는 것으로 생각치 않았다면, 아마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다는 점에서도, 이 과정이 내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무결하지 않다. 다만 내가 직접 죽일 수 없으니, 먹지는 않을 것. 도살제도는 인간사회에만 있고(p119), 나는 이 제도가 생산한 것을 먹지 않고 싶다.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라는 헤러웨이 선언문에 나온 문장을 자꾸 들고 오는 것도, 내 감수성이 그정도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 안주하고 싶지 않다. 내게 감수성이 부족하다면, 감수성이 있는 사람을 따라해서라도, 죽여도 되지 않는 방식대로 살고 싶다. 그걸 위해서 동물권 관련 책들도 한동안 읽었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성경을 읽듯이, 나도 동물권 감수성을 불러일으켜서 일상에서 실천을 지속하려고 책을 읽었다. 지금은 감수성을 부르지 않고, 그저 규칙이기 때문에 따르고 있지만 말이다. 

<육식의 성정치>는 어쩐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하는 듯 하다. 

"채식주의와 평화주의는 필연적으로 결부돼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동물이 인간의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지배적 에토스에 저항하는 행동은 전쟁 상태에 있는 세계에 저항하는 행위다. p272

따라서, 채식주의는 어떤 생명을 포기해도 괜찮고, 감수할만 하다는 전쟁을 명령내리는 입장에 있는 결정자가 아니라,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여자가 되려는 시도라고. 신체를 해체하여, 토막내고,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요리한 죽음이 담긴 고기를 먹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와 저 죽음의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그로서 마찬가지로 부재 지시 대상이었던 여성을 다시 연결되게 하는 것. 죽여도 되는 존재라 죽이는 게 아니라, 불가피할 경우를 가르고 가르는 노력들이 담긴 것이라고. 따라서 육식은 포기해야 하는 욕구가 아니라,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상태이며, 채식주의는 그 연결고리를 되찾아 다시 발언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로서 평등을 다시금 실천하는 일이다. 

나는 육식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기를 향한 어떤 욕구나 갈증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p282

동물의 신체는 의미를 수반한다. 이런 의미는 동물이 고기로 전환될 때도 지각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음식 선택을 통해 의미를 발산한다. 음식을 얻으려고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페미니즘의 문제다. 페미니스트들은 음식 선택의 긴장도니 분위기와 부재지시대상의 구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다. 채식주의 신체를 가까이 하면 부재 지시 대상을 , 그리고 신체에 매개된 지식을 회복할 수 있다. p312

채식주의는 육식사회를 향한 비난을 넘어선다. 육식이 남성 권력에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채식주의는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비난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소고기 취식, 남성 통제, 식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식민주의자인 영국인 육식인들은 당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p335

채식주의의 현상학은 동물들 또는 동물의 운명을 여성의 상태하고 동일시한다. 그리고 접합의 문제들, 곧 크게 말해야 할 때 또는 침묵해야 할 때의 문제, 음식 선택을 통제하는 문제, 육식을 승인하는 가부장제 신화들에 도전하는 저항의 문제를 동일시한다. ... 우리가 핵 절멸을 위해 행사할 권력 또는 경직된 사회의 관행에 근거한 개개인의 잔혹 행위에 맞서 행사할 권력을 고려하게 되면서 채식주의가 가부장제의 도덕 질서를 바로잡는 핵심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p344-345

인간동물이나 비인간동물이나 고통받을 때는 별개의 존재로 대해야만 부재 지시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연결되어 있을 때는 우리는 다른 위계 속에서도 어쩌면 평등을 실천하는 관계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이 간극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앞으로 더 고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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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8-04 0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이 리뷰 다음달에 우수작 주시면 안 되요 알라딘??? 우끼님 논문 많이 써 본 사람 티가 나는데요…근데 또 몸으로도 실천하심…키보드만 털던 방구석 악성리뷰어는 쮸글…

우끼 2023-08-04 09:05   좋아요 2 | URL
오잉 ㅋㅋㅋㅋ 저는 학부졸업생으로.. 그나마도 논문과 관련없는 본전공이라 … 논문 한 편도 써본적이 없습니다 ㅠㅠ 대학원… 복수전공했던 학과로 돈 있으면 가고 싶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마 없으니 안가도 상관없습니다.

유수 2023-08-04 11:33   좋아요 3 | URL
제가 드립니다 우수작! 니가 뭔데라고 하시면 그 말도 받아들임.. 너무 좋다 우끼님 리뷰 많이 자주 써주세요…

우끼 2023-08-07 21:23   좋아요 2 | URL
반열님 유수님 ㅋㅋ 용기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수 2023-08-04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결고리..!

건수하 2023-08-04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잘 모르는데.. 점점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것들끼리는 다 통하는 걸까요? 우끼님 앞으로도 또 써주세요..

우끼 2023-08-07 21: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수하님!! 저도 제가 길을 잃고 다시 나아가는 것이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