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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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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란 캐리가 도시로 와서 성공한 삶을 쭉 따라 서술된<<시스터 캐리>>는 번역된 책인데도 쉽게 읽힌다.  아마 번역이 복잡하지 않은 까닭 중 하나는, 원문 문장이 쉽게 쓰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묘사가 복잡하지 않다. 작가가 나서서 인물이 개략적으로 어떤 맥락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시하고, 인물의 행동은 그 다음에 표현된다. 인물들이 하는 행동이 꼬여있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도대체 왜 인물이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몇번이고 곱씹어야 인물 구도가 머릿속에 들어오는데,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그린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각들을 하는 인물들이라,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게다가 인물이 품고 있는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익숙하다. ‘안락함’, ‘풍족함’, ‘부유함’, ‘허영심’. 남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비교하고, 노동하고, 좀 더 안락한 집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즐겁게 살고 싶으면서도, 풍족하게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들. 그게 꼭 나쁜 건 아닌데, 욕망을 추구한다고 해서 만족과 연결되는 것은 또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러기 위해 그저 끊임없이 노동하고 저축하고 빚을 갚고, 어느새 그 삶 자체에 길들여져 있다. 그들은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을 하루하루 이어나간다. 또 누군가는, 이미 주어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그런 보상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쉽게 주어지기에, 만족을 모르고 산다. 누구에게나 길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은 세계에서 산다는 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와, 다른 시대와의 차이점이 아닐까.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에게나 길이 열려있게 된 것이 온전히 자본주의의 덕택이라 하긴 어렵겠지만. 또 얼마나 많은 피가,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해 뿌려졌던지. 

현대적 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은, ‘캐리’의 입장에서 ‘캐리’가 욕망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에게 지워지는 마음에 부담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가독성을 높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캐리’라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인물이 중심에 서 있는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사회의 이면보다는, 욕망을 추구하는 ‘캐리’가 더 많이 보인다. 이미 내가 현실 속에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추구하고 있을 욕망이 ‘캐리’에 의해 대리만족이 된다. 마치 매번 같은 줄거리의 막장드라마를 매번 챙겨 보는 마음이나, 비슷한 플롯의, 인물 이름만 다른 판타지 소설을 읽는 마음과 닮았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와 판타지 소설과 다른 점은, 이 소설은 욕망을 실현하는 주인공을 끝까지 몰고 간다는 점이다. 캐리는 여배우로 성공한 다음 다시 불행함을 느낀다. 


홀로 앉아 있는 캐리는, 사고하기보다 느끼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다보면 잘못된 길로 들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비록 여러 차례 환멸을 겪었지만 캐리는 여전히 꿈이 현실이 되는 평온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임스가 더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 길로 나아간다 해도 그 길 너머에 또다른 것들이 잇달아 그녀 앞에 놓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세상이라는 언덕의 꼭대기를 물들이는 기쁨의 광채를 영원히 쫓게 될 것이다. 

아, 캐리, 캐리여! 아,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인간의 마음이여! 그것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움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그 아름다움이 고요한 풍경에 홀로 울려퍼지는 양의 종소리건, 묵가적인 풍경 속의 아름다운 빛이건, 지나치는 눈 속에 엿보이는 영혼이건, 마음은 그것을 알아보고 응답하며 뒤따른다. 발길은 지치고 희망은 헛되어 보일 때, 바로 그때 가슴이 아파오고 갈망이 솟아오른다. 그때에야 비로소 싫증을 내지도, 만족하지도 못함을 알리라.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서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이런 문단들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문단을 통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단계 욕망을 실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허망함을 말한다. 욕망은 끝없이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을 뒤로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인간은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만 욕망을 바라보는 한, 단 한 순간도 만족한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렇다 해서, 시어도르 드라이저가 이 소설에서 ‘만족’을 바람직한 조건으로 설정하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세밀하지도 않아서, 나머지 빈칸을 독자에게 채우라고 내버려 두는 것 같기도 하다. 

드라이저는 캐리를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 전형으로 두고 그려낸 것 같다. 현대의 인간상과 많이 닮았다. 성공할 즈음엔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는 자신의 이익보다 뒷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사회적 구조. 그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위해 살았고, 결국 성공하지만, 진정함을 나눌 친구 한 명 사귀기 어려운 삶.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성공을 부러워할 테지만. 

작가의 서술이 처음 부분에서는 많이 눈에 거슬렸으나, 캐리의 맥락을 따라서 읽다 보면, 작가의 서술이 그다지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만 그 시대에 읽었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서술이, 현대에 와서 거슬리는 부분들은 있었다. 이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라든지. 남녀의 성차에 대한 발언들.  캐리의 양심을 신의 목소리라고 묘사하는 부분들. 제 잘난 맛에 취해 가장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중국의 황제라는 묘사. 요즘 시대에 들었다면, 시대착오적이라 말할 법 하다. 요즘 누가 ‘이성’만을 강조할까. ‘이성’은 현대에 와서 만능 통치약이 아니다. 게다가 이 책에서 드러난 남녀 성차에 관한 발언은, 내 입장에서는 관습적인 행동일 뿐인데 마치 남녀가 본디 성차를 가진 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맥락에 관한 따로 언급 없이 적혀 있어서, 자연스럽다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 소설들은 묘사에 ‘신’을 맥락 없이 언급하지는 않을 테다. 또 중국 황제만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했나 싶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성’을 강조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시대에 쓰여진 소설이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도 사고하기보다 느끼는 사람이 빠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끝난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작가도 뭔가 대안을 제시하고 싶지만, 그 조차도 대안을 모르고, 문제가 해결되면 그 뒤에 문제가 발생하리라 여기기 때문에, ‘몽상’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소설이 별로 위력이 없는 시대에, 고대 그리스 - 비극이 유행하던 그 시절처럼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이 소설이 쓰여져서 출간될 당시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지, 궁금하긴 했다. 

작가가 드러낸 문제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욕망을 쫓는 캐리처럼, 소설도 욕망을 쫓으며 읽다가 결말까지 오는 사람이 더 많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소설 구운몽도 양소유의 욕망을 따라 죽 그린 서사이고,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음을 얻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힌다. 다만 그런 방식이 작가의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방법인지는 내가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 시대에는 이 소설을, 어떤 방향으로 읽을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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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4-0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랄까... 캐리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방향성을 잃은, 막연한 캐릭터라고 해야할까요? 그러니까 빈 껍데기 같은거요. 화려한 무대에서 환호받는 자신에 취하지도 않고, 그 인기로 얻은 명성이나 부산물들에 좌우되지도 않는 어찌보면 지난 교육(드루에, 허스트우드와 살면서 얻은 교훈)이 아주 잘 되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고요. 에임스도 캐리가 감정을 고스란히 담는 그릇 같다는 비유를 썼던 것 같은데 암튼 신기한 캐릭터였어요. 계속 심성이 고왔다 이런 표현이 나오고 친구한테 나름 의리도 지키고 하는 걸 보면 사이코 같진 않았고요. (제 생각엔요..) 남자들의 관계에서도 상당히 수동적이랄까, 그러면서도 수동적이지 않은 암튼 당시엔 모럴이 없다며 손가락질 많이 받았겠다 싶더라고요. 잘 읽었습니다.

우끼 2016-04-12 20:06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썼었군요.... 조심히 지우고 싶어지네요 ㅠ(그래서 지웠습니다.) 저는 허스트우드가 쓸쓸히 죽어간 것이 생각나서, ㅠㅠ 그 점을 생각하면, 캐리가 잔인하게 느껴지더라구요. 하지만 그것만 잘라놓고 보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도 캐리가 그렇게까지 나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갈팡질팡하는 모습보다, 욕망을 쫓는 모습에 주목했었습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이 아쉬웠고, 그게 잔인하게 보였지만, 그정도 잔인함을 누구다 다 행한다는 점에서 잔인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현대사회를 사이코패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라고 지칭하는 사람도 있고 하니, 그 측면을 이렇게 본다고 해서 뭐라 하기 어렵겠지만요.. 그렇다고 캐리의 다른 면모를 무시해서는 곤란하겠지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쓸때는 몰랐는데, 단어가 확 튀어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캐리가 방향성을 잃은 막연한 캐릭터라서, 더 소설적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향성을 잃고 헤메는 현대의 우리와 비슷하여,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