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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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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를 읽고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소설은 작년에 읽었다. 책장을 덮기 전까지, 화자가 겪는 소용돌이에 나도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화자가 그 걸음을 쫓게 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그 사이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만 <<익사>>가 소설인지,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실재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말하길 '조코 코기토'는 작가의 페르소나 격인 인물이라 하고, 작가에게도, 화자에게도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 너무 좋다고 느꼈기에, 되려 편견 중 하나에 의문을 품었다. 작가는 자신이 품은 의문이 담긴 모티브를 소설에 녹일 수는 있지만, 실재 작가의 삶을 그대로 적으면, 그건 소설이 아니게 된다고 여겼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게 단순하게 분류하기에, 이번에 읽은 오에 겐자부로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중 초기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삶을 소설의 형태로 엮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단편이 다 의미있다고 느꼈다. 물론 작가가 처음부터 어떤 형태로든 완성된 소설을 느끼고 쓴 것보다 응집력이 부족하다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소설도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중기, 후기 소설들은 그에게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도구 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도대체 어떻게 ‘반핵, 반전’을 소설로 녹여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허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그가 겪은 자잘한 일들을 엮어낸 그의 소설엔, 어느 순간에 그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반전, 반핵의 의미가 들어갔다. 예를 들어, 그가 만난 어떤 인물이 그에게 반핵 이야기를 강연으로 해달라고 요청한다든가, 그 와중에 반핵 운동의 세부 내용이 차이가 나서 요청이 취소되고, 또 다른 일행을 만나서 반핵과 관련된 또 다른 유형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든지 등등. 반핵을 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살아가는 화자가 겪는 일화들을 통해서 반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이건 주장문도, 수필도 아니고 자잘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소설엔 맥락에 맞는 어떤 문장들이 마치 맥락 바깥으로 나와서 사람을 겨냥하는 기분이 들어서, 읽다가 놀라곤 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에는 이런 문단이 나온다.


“우린 개를 죽일 생각이었지.” 내가 애매하게 말했다. “그런데 도리어 우리 쪽이 살해당한 셈이네.”

여학생이 미간을 찡그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피곤에 지쳐 웃었다. 

“개는 살해되어 쓰러져 가죽이 벗겨져 나가지. 그런데 우리는 살해되어도 이렇게 돌아다녀. 

그러나 가죽은 벗겨졌다는 거지.” 여학생이 말했다. 

  p26<기묘한 아르바이트><<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이 문단을 읽고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개를 죽이는 아르바이트를 잠시 했을 뿐이고, 돈을 주기로 한 사람이 불법으로 개고기를 고깃간에 팔아넘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을 뿐인데,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하다니. 그리고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개에 물려 병원에 가야 하는 기묘한 상황에서 잘린 ‘나’, 잘린 상황을 ‘살해’당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었을까. 이 소설의 ‘살해’라는 비유 역시 무척 뜬금없이 느껴지는데, 어쩐지 맥락에서 아주 벗어난 느낌은 아니다.  그러나 대화 하는 발화 당사자들 끼리의 이야기 인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 바깥의 독자를 겨냥한 말 처럼 들린다. 


한편 중기 단편인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도전적으로 항변한다. ‘아무도 남을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 남을 자기 자신 만큼 존경하지 않아요. 또한 “사상”으로 그보다 위대한 것을 알 수 없어요. / 그러니 아버지, 어떻게 내가 나 자신 이상으로 당신이나 형을 사랑할 수 있어요? 문간에서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작은 새만큼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사제가 분노하여 소년을 끌어다가는 악마라고 고발을 해 버린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했다 일찍이 많은 사람이 화형 당한 거룩한 곳에서, 울고 있는 부모들의 눈물은 헛되다 이런 일이 아직도 여전히 엘비언 벼랑에서 행해지고 있을까?’ 

p433-434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그리고 이 이후에, 아들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비탄에 젖은 상태로 가족들에게 겁을 준 상황이 나온다. 그리고 화자는 아들의 비탄을, 자신이 존경하던 H의 비탄을 보았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앞서 말해진, ‘아무도 남을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화자가 겪은 몇가지 자기 반성적인 이야기로 뒤집는다. 


나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내가 집에 없는 동안 한없이 난폭했다는 아들의 눈이 발정 난 짐승이 충동이 이끄는 대로 갖은 난음을 다 하고도 그 여운에서 풀려나지 못한 혹은 그런 짐승에게 내부를 물어뜯기고 있는 것 같은 차마 마주 볼 수 없는 눈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눈곱 같은 누런 광채가 형형한 그 눈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던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이었다. 

…그러나 늦게 나마 내가 경험을 통해 얻은 감각으로 아들의 눈에서 비탄을 읽어낼 수 있었던 건 뉴델리 공항의 바에서 H씨의 눈에 일순간 드러났던 ‘비탄’의 정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p452-453 <순수의 노래, 비탄의 노래> <<오에 겐자부로>>, 현대문학


초기 단편들은 상징들을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일본의 현실을 비판한 단편들이 많다. 하나의 상징이 작품 마지막까지 단서를 품고 통과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이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데, ‘개 짖는 소리’가 배경도 설명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개를 죽이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개를 죽이는 데 참여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전쟁에 참여한 일본을 빗대어 표현한 느낌이 든다. <남의 다리>라는 작품에서는 말로만 혁명을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영달을 추구하게 되는 이기적인 인간상이 나오는데, 그 역시도, 일본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불안한 사회 현실 가운데 기댈 곳을 찾지 못해서 적극적으로 ‘우익’이 되는 <세븐틴>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화자는,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들 모두,  인물들이 각 집단 안에서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거기에서 어떤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어떻게 인물들이 각자의 믿음에 배반당하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들, 혹은 생명이 아프게 되는지 드러난다. 이 아픔들을 통해,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기, 후기 단편들은 그에 비해 훨씬 개인적인 삶 속에서 아이러니들을 찾아내고 상대를 비판하든, 비판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뚜렷한 목적은 초기 단편들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고, 어찌 보면 그렇기에 상징이 이끌고가는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훨씬 복잡해져서, 무엇을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지 모호하지만 감정이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켜진다. 어떻게 살고, 죽을 지 고뇌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 거기 있다. 그 투쟁과 통찰 속에서 자꾸 나를 비추어보게 된다. 


중,후기의 소설들이 일본 문학 장르 중 ‘사소설’에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고뇌가 지난하고 처절하기에, 그가 그의 삶의 주제에 사로잡혀 평생 그것만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하더라도 나는 이해할 것 같다. 어차피 독자인 나로서는 어디까지가 작가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적 허구인지 구분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양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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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16 0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증기의 레인트리 연작이나 이요를 다룬 이야기들은 맬컴 라우리의 소설이나 블레이크의 시들을 읽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그 작품들을 읽지 않고서는 아마 오에의 이 중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아무리 어떻게 노력해도 반쪽 그 이하의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한가지만은 그래도 어렴풋하게 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위의 우끼님 말슴처럼 오에가 끊임없이 글로서 투쟁과 통찰을 해나가는 인물이라는 거죠. 말씀하신 최근에 나온 <익사>를 봐도 현재에 안주해있으려는 의식 같은 것은 오에에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는 않아도 그의 작품들이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