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에 맞서는 과학 - 오늘의 과학 탐구 민음사 탐구 시리즈 8
박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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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랩실, 게비스콘은 이름바꾼 옥시의 것. 코로나 기간에 많이 팔림. 가습기살균제 재판은 기업이 이김. 피해자를 반국가세력이라 정해 개인 사찰하는 건 세월호때와 비슷함. 규제는 이슈당시만 생기고 대기업 요구로 없어지는중(북토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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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 힐러리에게 암소를
마리아 미즈 외 지음, 꿈지모(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 옮김 / 동연출판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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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땅은 돌봐주고 양육해주는 그런 관계를 요구하지요?”
시몬 : “ 돌봐주고 양육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여야 해요. … 가끔 오래된 그림에서 보면 쟁기질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잖아요. 공격성이라곤 한 치도 없는 사랑스러운 태도 말이죠. “p157


"우리가 보기에 자급 관점은 자본이 지배하는 세 가지 식민지를 탈식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여성, 그리고 제 3세계. 따라서 식민주의 구조를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은 소농 경제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리고 있는 경제적 대안에서 핵심이다."p198

자급의 삶은 관계맺기라는 생각이 든다. 가능한 한 정성스럽게, 가능한 만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 상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보살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급의 관계맺기는 사랑인가. 한계를 기준으로 사고하는 이유를 살펴야겠지만, 요즘 자꾸 한계를 모르다가 탈진하는 삶을 살아서 한계짓기를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도시민이 농촌을 식민화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농촌이 쉼을 제공하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고, 농촌 안에서 관계맺기를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도 자원도 없는 사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노동력밖에 없어보이는데. 

만물이 만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차리려면, 땅과 인간들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상호연결된 삶을 살다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생명력이 생동하는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관계맺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한 배우고, 새로 배우는 것들은 나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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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사람은 사랑에 이르다 - 춤.명상.섹스를 통한 몸의 깨달음
박나은 지음 /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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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온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뛴다. 조에부스케도 그런 사람중 한 사람이었는데. 우선 발췌문을 가져와보고 싶다. 

 "다른 이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니 자기 상상속에 경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재능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그러는 줄 모르게 되면 모든 이들이 경탄하고 만다."p42 <달몰이>, 조에부스케


막상 옮기고 보니 비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데... 달몰이에서 말하는 다른 발췌문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네 삶이 너보다 사실적이지. 삶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삶을 납득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네 의식이 삶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런 삶의 너를 거부하지마”

p167<달몰이>


오히려 자기가 자기를 떠나는 것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다.

자기 의식은 존재를 기만한다.

존재하다, 실존하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있는 것, 있을 수 있는 것에 비해 그것은 매우 허약하다.

빵으로, 과일로 영양이 보충되는 것은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형상하는 것 때문이다.(네? 여기도 원문을 찾아보고 싶다.)

과일은 너를 살찌울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과일을 달고 있던 나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존재 속의 한 점이 아니라, 한 점 속에 있는 모든 존재이다.

너의 말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을 줄 모르면 신에게 말을 걸지 마라.

신은 술어다. 술어는 전 인간이다. 삶은 존재의 유배지다.

네가 네 안에 최상으로 갖고 있는 이미지대로 네 삶을 만들어라. 만일 삶이 네가 생각하지 않았던 규칙을 너에게 부여한다면 그 구실하에 그 규칙과 너를 분리하지 말라. 당신은, 아니 삶과 당신은 같은 의지의 산물이다. 의지를 보아라. 네 상상력을 부양하라. 네 마음이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네 고통에 대해 신음하지 말기를. 네 고통도 의인화해야 그것을 이겨내는 격조가 생긴다.(으악...무슨 의인화와 격조야...원문이 지금 손에 없어서 확인도 어렵네..)

한 인간은 그 존재의 내적 도래임을 기억하라. 너에게 결핍된 모든 것에 대단치 않은 너 자체를 주어라.

그들이 너에 대해 내리는 정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들이 너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사실들을 번역하라. 만일 우리가 거기서 전부가 아니라면, 사건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80-81p <달몰이> - 조에 부스케


이것이 정말 조에부스케 달몰이 리뷰인지 이 책 리뷰인지 알 수가 없다. 정작 달몰이 리뷰는 처음 읽을 당시만 해도 책을 통째로 옮겨오고 싶었어서 쓰지도 못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페미니즘적으로 걸리는 문장들이 좀 있어서 몰입은 안되었지만.. 그당시에도 그런 문장들은 건너뛰고 읽었던 것 같다. 공감이 안되어서. 

한국어로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번역어와는 달리 뉘앙스차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우연하게도, 아마 책을 많이 안읽었어서 그렇겠지만, 이제까지 자기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의 글을 번역서에서 많이 읽었어서 한국어를 쓰는 작가의 글이 더 반갑다. 한편으로는 국적과 시대가 다른 사람들인데도, 자기 삶을 증언하는 방식이 왜 이다지도 비슷하게 들리는지 놀랍기도 하다. 읽는 사람이 동일인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게는 비슷한 울림이었다. 반복해서 읽고, 다시 삶을 놀랍고도 선명한 우연 속으로, 살아있는 곳으로 데려오고 싶다. ...

이렇게 찬사 써놓고 굳이 변명하자면 개인취향입니다...허헣...


이걸 쓰고 나니 생각하건데, 나는 낭만주의자 혹은 스토아주의자와 내면의 윤리를 쫓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조금 더 오래 고민하고 써보고 싶다. 아니 어쩌면 이 둘은 비슷하고, 내가 스토아주의자라는 걸 이해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책을 발췌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맥락 바깥으로 데려올 수 있는 문장이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부스케는 잘게 잘라놓고서(?) 이 책은 그대로 두는 이유는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음. 휴.. 삶에서 관객이 되지 않고 싶은데 쉽지 않다. 

발췌문만 보면 부스케 이상하다... 그렇지만 좋아합니다. 깔깔..


p.s: 편집자님 책 디자인이 눈이 아픕니다. ㅠㅠ 겉표지는 좋은데, 왜 글자읽는게 힘든지 저도 설명은 못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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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를 넘어서 삶의 주권 탈환하기
한디디 지음 / 빨간소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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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숲속에 있는 치료제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이 쓸모없다고, 단지 숲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불이 숲을 사라지게 만들면 내가 가진 풍요로운 지식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이 모든 불이 나를 슬프게 한다.” P71
장소가 인간과 관계맺는 방식중 하나. 도시에 사는 나는 장소와 관계맺는 방법은 잊고, 오로지 사유한 물건과만 관계한다. 존재의 공허감은 그 물건들과도 제대로 관계맺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 같다. 모든 물건과 똑같이 무거운 무게의 관계를 맺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게 지나치게 쉬운 삶의 양식도, 버린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은폐되는 삶의 양식도 책임과는 무관해보인다. 나와 연관된 삶의 순환을 감각하지 못하니 내 삶도 분리되어 고립된 채로 떠도는 게 아닐까. 고립에서 서사가 발생하지 않는다. 때문에 내가 살아내고 싶은 커먼즈, 관여하고픈 커먼즈에 함께하고 싶은 것 같다. 나를 감각하게 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과 어울리고 싶은 것이다.
커먼즈라는 삶의 양식은 저자도 말했다시피 진보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나는 진보라는 개념 역시 선형적 발전에 기초한 개념이기에, 이성중심,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고민하고 싶다. 진보와 보수가 한 쌍으로 재개념화되었을때에는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는데, 발전이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진보라는 개념을 어찌 해석할지 모르겠다.
관계라는 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상호적인 것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선형적 발전은 장소성이 남아있나? 모르겠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했던 것을 선형적 발전이라 일컬은 것이라면, 자본의 성장은 착취에 기반해있으니, 자본주의에서 권력을 쥔 사람에게도,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장소성이 없어 보인다. 권력을 쥔 사람에게는 장소성보다는, 돈으로 환산가능한지가 중요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본의 논리 하에선 장소와 관계맺는게 어렵다.

때문에 커먼즈가 있으면 다른 변화를 꽤할 수 있는 것 같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가 가능한 커먼즈는 항상 일어난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가부장제와 위계적 폭력은 존재했다. 따라서 커먼즈 자체가 중요하다가 보다는, 어떤 커먼즈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가가 중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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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 민주주의야말로 내가 생각하던 마리아미즈의 무정부주의적 전망과 닮아있는데, 구체적으로 비교하려면 고민이 필요하다.(책읽기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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