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P.160 : 보통 사람들은 말에 너무 많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말하는 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사실 말은 대체로 모든 논쟁에서 가장 얕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말은 그 뒤에 숨어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과 욕망을 희미하게만 보여줄 뿐이다. 혀를 놀리는 일을 그만둘 때 비로소 마음이 귀를 기울인다.


말, 언어가 아니라면, 내가 도대체 그의 속을 어떻게 알까? 하지만 말이 얼마나 많은 마음들을 품고, 혹은 가리고 태어나는지, 말만 들어서는 사람의 마음까지 파고들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문학이 그토록 쓰기 어려운 것인가보다. 계속 쏟아져나오는 말들 속에서 어느 때 침묵을 지켜야 하는지 잘 알기 어려워서. 

이 묘사에 마음이 아파서, 그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졌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에는 나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출판사 책 소개 말


시작을 이렇게 간결하게, 써내려간 점에서 흥미가 일었다. 

소설은 늘,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그 인간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어떤 곳에 있든, 누구에게나 어떤 사건이든 일어날 수 있다. 난독증이었던 사람이 난독증을 극복하고 쓴 소설이 작가를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만들었다면, 읽어보고 싶다. 






 173~174

난 고문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왠지 모르지만, 고문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의미가 있으리라는 인상을 받아요. 왠지 알겠소? 고문은 개인의 책임이오.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용납할 수는 없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관의 명령이라는 초라한 변명 뒤에 몸을 숨기고 합법적으로 발뺌하며 자신을 지키지요. 이해하겠소? 근본규범 뒤에 숨는 거요.


고문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고문관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고문했는데 이름을 기억하나 하지 않나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고문하는 일을 거부하지 못한 대신 이름을 기억하여,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겠다는 태도는 본받고 싶어졌다.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일에서는, '상관' 뒤에 숨을 수 없다. 는 그의 위선적인 자존심이 좋아보였다. 이 모순을 표현한 그의 소설이 읽고 싶었다.



윤이형의 소설은 많이 읽어본 적이 없다. 그가 <쿤의 여행>을 썼을 때 느꼈던 이미지들이 흥미로웠다. <루카>의 일부분("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윤이형 [루카], 제 5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p61)을 읽었을 때, 그가 표현하는 문장들이 예뻐서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집을 읽어보고 싶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를 읽었을 때, 그의 어투가 꼭 할아버지같았다.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느낌. 비슷한 느낌의 비슷한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멀리 날아가지 않고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깊어졌다. 비슷한 느낌이었는데도 끝장을 넘길 때까지 지루하지 않았다. 아픈 이야기도 아프지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도 조금씩 아프게 스며왔다. 


그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충분한 이유였다.






매달 추천 신간을 뽑는 것도, 사실은 쉽다고 여긴적은 없다. 하루는 책을 고르고, 하루는 할 말을 고르고, 그러고나서 작성하는데도 영 시원치 않은 기분으로 포스트를 올린다.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을 때도 많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순간에는 말을 나불대는 경우도 많다. 생각의 방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말이 쏟아져나와서 말을 가리기 때문일까. 말을 적절하게 하는 것은 본디 쉬웠던 적은 없다. 나는 늘 치우친다. 억지로 치우치지 않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읽힐만한 글을 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나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불안한 낙원> p209


본다는 것은 시선을 상대에게 고정시키는 것 이상으로 상대의 표정, 행동을 보고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행위이다. 본다는 행위가 상대의 실체를 어느정도 드러낼지 알 수 없다. 내 시선이 그 안에 섞여들어가서 공유되는데 어디까지가 내 시선이고 어디까지가 상대의 존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파악한 상대는 상대이면서 아직 나다. 내가 아는 만큼 상대를 본다. 내가 겪은 일 만큼 상대가 보인다.  

<불안한 낙원>의 한나가 아프리카 땅에서, 흑인들도 백인들도 아닌 경계선에서 모두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떤 권력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 땅에서 백인으로서, 부유한 사람으로서 군림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사람을 신뢰하고 싶어하기에,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하고, 사람들이 신뢰를 갈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백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놓은 체계 안에 갇혀 있다. 

그녀는 낯선 아프리카 땅에서 얻은 강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를 끊임없이 위협하거나 이용하려는 주변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다. 

백인으로서 흑인을 차별하면서 두려워했고, 백인에게 핍박받는 흑인을 보면서 가난한 처지이면서 약자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녀의 삶 속에서 다양한 계층의 감정을 경험했고, 주어진 권력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나뉘어진 세계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려고 했기에 그 위화감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사람을 신뢰하려고 했기에 신뢰가 불가능한 사회의 단면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그녀가 신뢰하려는 사람들이 실재와 말을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을 바라보았다. 흑인은 백인의 잔혹함을 두려워하여 말을 삼키고, 백인은 흑인이 연합하여 복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유색인종은 이 무언의 규칙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하는 말만 내뱉는다. 이들은 ‘불신’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같은 그룹 사람들끼리 만든 규칙을 지키면서, 그것을 유지해야 그룹이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불신하는 상황을 막으려고 규칙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깨뜨리려는 사람을 배척하려고 한다. 서로는 상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거울이 되지 못하고, 불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녀에게 매음굴은 ‘불안한 낙원’이었다. 잠시 머물다 갈 곳이었지만, 나중에 그녀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녀를 거스르지 않았고, 돈이 많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 상황 자체가 그녀에게 신뢰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서도 모순이 생겼다. 그녀는 몸을 파는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야 하고 그것이 그들의 공동의 목표였는데, 그녀는 여성으로서 그 일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 상황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백인 남편에게 배신당하여 그를 살해한 흑인 여성을 돕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음굴을 찾지 않게 되고, 매음굴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들도 그녀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그들의 차별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돈이 많고 시간이 많은 한나는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들에게는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일을 할 이유가 없다 느낄 수도 있었나보다. 


이성복시인 무한화서 397번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젯밤 방 안에 들어온 벌레를 살려주려고, 쓰레받기에 쓸어 담고 창을 열어 던져주었어요. 그 틈에 나방 한 마리가 들어와 휘젓고 다니기에, 빗자루로 때려잡아 바깥에 내버렸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좋은 일은 늘 그런 식이었어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릇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세상을 품으려면 어떤 것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것이 때때로 내 욕구를 배신하는 일일지라도. 거대한 생명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사는 길은 그뿐인걸까 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반박할 길은 없었다. 나는 최근에 이 의문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내가 육체를 가지고 이 몸뚱아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한, 나는 이 안에서 숨쉬어야 한다. 이 몸뚱이를 지키고, 이 몸뚱이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면, 누군가를 배척할 수밖에 없고, 때때로 그건 누군가의 욕구를, 나아가 생계를 위협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내 손에서 벗어나 벌어진 일들 모두를 내가 책임지고 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나쁘고 싶지 않아도 “복잡하게 나쁜 사람”(김영하가 쓴 표현)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나의 처지도 이와 비슷해보였다. 그녀 자신과, 타자를 위해서도 그 일이 결과적으로 좋을 지는 몰라도, 어떤 규칙 아래서는 그것을 당장 동의할 수 없는 상황. 


결국 한나는 경계선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싸움은 전적으로 그녀가 강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싸움이고, 그렇기때문에 한편으로는 위선적이고 비극적이었다. 

한나는 그 경계선에서 모두를 신뢰하고 싶었기 때문에 배척당했고, 결국 모두를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되려 누구에게나 배척당하는 걸까. 그저 집단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우연이 없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한나는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말로, 그녀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두고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작성한다. 그곳에서 그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곳의 실상을 적어간다. 그녀는 오로지 그녀의 말만 믿을 수 있었다. 바깥으로 공표된 규칙들의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나가 사랑한 흑인 남자 모세스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회 안에서는 그에 관해 말 이상의 행동으로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그 체계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신뢰하는 것들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잃어버린다. 그것들을 그녀는 붙잡을 힘이 없다. 그녀 혼자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 있으려고, 아직은 그 체계 안에 남아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잊어버린 게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럼 기억하는 것도 부끄러워야 하지 않겠어요? 제 이름은 반지입니다.” p431


사람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일까. 보통 사람은 어떤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신뢰하지 않을 것인지를 판가름한 이후 이름으로 신뢰도를 그것을 기억한다.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는건,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애초 저 사람을 신뢰할 것인지 아닌지 조차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나는 마지막 즈음 그녀의 소중한 친구였던 카를로스를 묻는 걸 도와준 반지에게 그의 이름을 묻는다. 그를 신뢰하고 기억하겠다는 몸짓일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이지만, 그렇다고 인간다운 마음을 잃은 것도 아닌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다하겠다는 듯, 이제까지는 묻지 않던 이름을 묻는다. 그러나 그 물음이 떠나겠다는 결정까지 막지는 않는다. 그녀가 짊어진, 위선으로 이루어진 짐은 그 작은 희망보다 그녀에게 더 컸다. 수많은 아이의 시체를 묻으며 운영되는 매음굴의 주인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서는 그곳에서 살기 어려운데, 매음굴의 주인으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 모순 상황 자체에서 도망치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패배라고만 말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 상황을 보았고, 그녀의 패배에는 패배라고만 지칭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결정이 도피 하나 뿐이었을지라도, 그 결정은 단지 이 이야기가 끝나기 위한 방법으로 보였다. 때때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일을 노력하고, 그것이 패배로 남는다해도 패배가 아닌 일들이 종종 있듯, 내게는 이 소설의 결말도 그런 식으로 읽혔다. 

한나는 낯선 땅을 떠난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 자신의 느낀 위선을 수정할 수 있는 공간. 그 사람이 있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루를 먹고 나비가 되었을까. (가루를 먹으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모세스가 들려주고 자루를 남겨주었다. 모세스는 그녀가 도왔던, 흑인 여성의 오빠이다.)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그냥 살아있는 것 말고, 사람으로서 기능하고 스스로를 키워나가는 건, 모순적인 상황들을 참아낼 수 있는지, 그 상황에서 얼마나 스스로 그 모순을 줄여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하는지, 어떤 집단의 이해에 굴복하지 않고 얼마나 경계선에 잘 서있는지에 따라 좌우되는 걸까.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이 모순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것 같다. 


헤닝 만켈은 이 소설을 쓰면서, 백인 남성으로서 백인 여성이 되어 흑인의 감성까지 읽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도대체 왜 수많은 작가들에게 너무도 쉽게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는지 불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마음에 들었으나 제목을 반토막만 표현한 표지디자인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낙원’이라는 두 단어가 상충하면서 마음 안에 주는 위화감이 살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서, 내 생각이 선입견에 가득찬 생각이었다고, 이 책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 책은 읽을 때 다소 호흡이 빠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기보다, 계속 사건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다. 작가는 한나가 무엇을 느끼는지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분히 따라가는 서술방식을 택한다.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내면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정의내린다. 이런 서술방식이 처음에는 단편적인 것처럼 보여서 불편했지만, 가면 갈 수록 서술방식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게 되었다. 만약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빠르게 훑어가는 형식이 아니었다면, 한나가 이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짧고 빠른 호흡에 불만이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문체가 주제를 표현하기에 부족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6-01-27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1-27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 `수라(修羅)`에도 화자가 새끼 거미를 밖으로 내보내는 경험에 대한 느낌이 언급됩니다. 처음에 밖으로 버린 새끼 거미를 찾으려고 어미 거미가 나오는데 그 거미마저 밖으로 보냅니다. 화자는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가 재회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른 새끼 거미가 어미를 찾으려고 헤맵니다. 화자는 슬픈 감정을 느끼면서 이 새끼 거미도 밖으로 내보냅니다.

맥거핀 2016-01-27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저도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작은 기록에서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떻게보면 참으로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한나는 약자도 강자도 되어보았기 때문에 양쪽의 사이에서 그렇게 불안하게 위치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리뷰를 읽다보니 소설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르는데 한나가 그 흑인여성을 돕겠다고 나섰을 때 매음굴의 여성들이 보이는 어떤 이중적인 태도 말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우리들 대부분이 가지는 일반적인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군요.
 
[댓글 부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글쓰기를 읽었다. 그 자신감이 불편하다. 책을 덮고 나서 더더욱 불편해졌다. 나는 소설이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상에 상상력을 더하는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에 작가의 가치관이, 세계관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객관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작가가 발견한 세계의 진실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을 상상해도, 더 깊숙히, 아주 깊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온 소망이 담겨야 한다고 나는 믿었다. 이야기에는 이야기 바깥에서 스며든 꿈이 필요하다. 이 책 어디에 그 꿈이 있는지 나는 찾지 못했다. 고발하고,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마치 그것이 객관이라는 듯 너저분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왜 사는가? 이들은 왜 살아 숨을 쉬고 먹고 일하고 잠을 자는가? 작가는 이 인물들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그의 책임을 묻고 싶었다. 작가가 더한 것은 사실에 덧붙인 상상력 뿐인가? 작가의 철학은?

사람에게도 때때로 쥐구멍이 필요하다. 물러설 곳이 없는 공간에서, 몇 배는 더 악랄해진다. 자폐적인 섹스를 반복하고, 승리를 만끽하며 자리를 보전하려는 삶을 이들이 계속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미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작가는 진보진영을 까려고 한 것인가? 보수진영을 까려고 한 것인가? 왜 그들이 보수가 될 수밖에 없는지, 왜 그들이 댓글부대를 이끌어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는지, 그들의 내면을 파고들어서 더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서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아무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럴듯한 인물들이지만 살아있지 못하다. 아직 살아있지 못하다. 특히 그 안에서 여자는 철저히 대상화되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못하다. 작가조차도 인물들을 쓰고 버린다. 그 안에서 자신을 보전하려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처럼. 그들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작가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책은 비난해야할 한 쪽 면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하는 표준같은 게 있을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문학이다. 왜 이상한 것처럼 보이는 저들이, 나와 같은지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희망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어서, 희망을 말해야만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인물에게 몰입하여 옹호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인물의 곁에서, 작가가 최대한의 통찰력을 발휘하여, 드러내고 말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이미 알거나 상상하고 있는 것 너머에 있는,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서사의 힘으로 소설이 되었고, 이미 출간되었지만, 이 이야기가 조금 더 생명력을 갖기를 원하는 나로서는, 이 이야기가 이대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영화같은 빠른 서술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간다운 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6-01-25 0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가와 소설가는 분야 중에서 제일 근접하다고 생각해요. 인간과 환경을 재구성하는 그 방법이나 기술로 봐도. 그들은 자신이 파악한 원인으로 그 수많은 것들을 해석하고 분류하고 배치하죠. 그것은 그가 보는 시대이기도 하겠으나, 그 자신이 시대에 속한 방식을 보여주죠. 너무 가까이 가면 편협하거나 단순하거나 오류가 되기 쉽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글을 쓰고 여지도 없이 재단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끝까지 모를 수도 있고 너무 뒤늦게 알 수도 있다는 게 언제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강명 작가에게서 계속 느껴지는 아쉬움은 `거리두기의 실패-이성적이라 생각하겠지만 매우 감정적`입니다. 자기 분석에 빠져 있단 느낌 또한.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뛰어넘은 작가, 철학자들도 있다는 게 희망이겠죠. 하나의 세기와 싸웠던 니체는 참 대단했다 싶어요. 끝이 그리 되어 안타깝지만...

우끼 2016-01-25 10:57   좋아요 1 | URL
새삼 소설 안의 인물들간의 관계에서 조차도, 끊임없이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면서 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개척하기를 바라듯...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관계가 되려면, 왜 이 사람이 이렇게밖에 행동을 못하는지 이해하고, 나 역시 왜곡된 방식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도 바라보면서, 그것을 넘어서서 나와 그 사람을 바라봐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장강명작가의 불편함을 지적하는 제 말하기 방식과 태도도, 그와 닮은 것 같아서 글을 올리기 많이 망설여졌는데 더는 리뷰를 미룰 수가 없어 올렸네요.. 그래서 더더욱,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고민됩니다.

맥거핀 2016-01-2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소설이 확실히 어떤 지점에 멈춰서다보니까, 일종의 관찰에 머무르고, 관찰 이상의 성찰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대로 심지어는 인물을 쓰고 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주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 찻탓캇을 바다에 던져버리기 전에 그에게 물었어야 했죠. 왜 그랬어, 왜 여기까지 왔어,라고 그 왜를 집요하게 캐물었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 작가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같은 소설에서도 계나에게 조금 더 물었어야 하고요. 너는 왜 여기 호주까지 와서도 행복하지 않지?,라고요.

아무튼 저는 장강명 작가의 이런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장점도 분명히 있는 작가라고 봅니다. 다만 그런데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이런 식의 소설 작법이 단지 미숙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함에도 다른 어떤 것을 노리고 의도한 것이라면..조금 우려되기는 합니다만.

우끼 2016-01-29 01:13   좋아요 1 | URL
저도 그게 참 아쉽습니다. 시사적인 중대한 문제를 잡아내는 눈, 그것을 풀어내는 서사, 플롯 모두 훌륭한데, 그것을 드러내는 문장이, (어떻게 보면 사유가) 너무 앙상합니다.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걸 이성적으로 치우쳤다 말한다면, 감정이입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적당히 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가 작중인물에게 갖는 연민이 없습니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려면, 그 사람의 편에서도, 그 사람의 반대편에서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사실을 르포처럼 드러내고서, 그 한계 이상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넘어서는 게 연민 혹은 슬픔이라는 감성이라 보고 있습니다. 단지 폭력으로 쭉 밀고 나갔기 때문에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절실히 하고 싶었던 말이 제외된 채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아쉬웠습니다. 저는 그게 혹시, 기자로서 오래 생활했던 탓에 생긴 습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전달하려고, 물러서서 글을 쓰는 습관?... 감정을 객관으로 포장한다고 표현해야 할까요...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좀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아요.
 
[리틀스트레인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욕망의 끄트머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아래 리뷰는 책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몰락해가는 헌드레즈홀에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무엇이 감추어지고 드러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화자인 페러데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헌드레즈에 집착한다. 페러데이의 서술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의사인 자신의 직업상 누군가에게 비밀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것을 발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성직자에 비유하여 어떤 자백을 받아내는 모습이라든지, 그 자백을 이용해 로더릭이 겪는 일을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는 일이라든지.. 실재로 이 저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공포만으로 모든 일이 조작되었다고는 믿기 어렵다. 범인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저택을 가지려고 모든 것을 조작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그 욕망을 여실히 드러낸 닥터 페러데이다. 그는 저택을 살 만큼 부자도 아니고 능력도 없지만, 야망에 가득차 있다. 그것을 헌드레즈홀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손쉽게 메우려고 한다. 게다가 책 표지에 적힌 소개말로도 이미 그가 범인이라는 점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으니, 독자가 무언가 추리할 만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작가가 마련한 반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저택의 ‘리틀 스트레인져’가 닥터 페러데이라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닥터 페러데이가 어느정도 그 일에 기여했으리라는 점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책의 묘미는, 그가 어디까지 개입한 범인일지, 혹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할지 추측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욕망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지 살펴야 할까. 원했으나 가질 수 없다. 혹은 몰락을 원하지 않았으나 몰락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닥터 페러데이와 에어즈가가 이런 점에서 비슷한 인물들이라 이들이 교차점에서 만난 게 이 책이 묘사한 부분이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거나, 공포에 떨거나, 더더욱 욕망에 매몰되어 욕망만을 쫓거나, 어떤 아비규환이든 소환해내는걸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에어즈가 사람들은 돈이 없기에 헌드레즈 홀의 땅들을 하나 둘 처분하고, 수많은 고용인들이 청소하고 보수하던 저택에는 하녀가 한 명 있으며, 유일한 수입원인 농장에서 귀족이었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고용된 사람과 일해야 했다. 깨진 컵들은 이어붙여서 사용하고, 몇개의 방들을 제외하곤 먼지가 쌓인 채 빗물이 샌다. 관리가 되지 않는 헌드레즈홀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묘사한 것을 읽으면서나는 몰락의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에어즈가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런 외부적인 몰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뻣뻣하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구분하며, 비슷한 집안이라 판단한 곳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페러데이는 아직도 같은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욕망을 헌드레즈홀에 사는 에어즈가의 유모 자식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헌드레즈홀에 고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페러데이와 같은 욕망을 표출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에서 오는 차이, 무관심 그는 욕망 그 자체에 이끌려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하다. 케럴라인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케럴라인이 무엇을 바라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그녀와 결혼해 그가 가지게 될 지도 모를 저택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나 그 저택을 가진 이후에 관한 계획을 들어보려 해도, 거기엔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일단 욕망이 실현되면, 자신의 지위도 올라가고, 갑자기 돈도 생기는 듯, 어릴 적부터 키워온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의사가 되는 건 덜 중요해진다. 어쩌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면서 키우는 야망보다, 눈에 보이는, 어쩌면 허영을 더 손쉽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으로 헌드레즈 홀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케럴라인 역시 페러데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 듯 페러데이를 보지 않고  집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궁리만 한다. 한때 페러데이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힘든 순간에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통해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가 계급적 지위를 버리려 한 것인지, 그것도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닥터 페러데이에게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방안을 사귀는 동안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닥터 페러데이가 표출한 저택에 대한 욕망, 계급적 욕망 때문이었을까. 사랑이 보은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러면 이들이 행복하려면 도대체 어떤 방법이 필요했을까. 

결국 에어즈가는 누군가가 불씨를 지핀 공포에 물들어 하나 둘 미치거나 죽는다. 이미 몰락의 예감때문에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공포는 어쩌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까. 이 소설에서는 단 한명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있더라도 묘사되지 않는다. 어딘가 모두 불만족스러워한다.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미신에 기댄다. 자신이 바랐기에 결혼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도 나온다. 그러면,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세월의 흐름을 잘 슬퍼하고 흘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당신을 부른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저 쪽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온다. “지금도 여기 있어요,” 아직 서로의 곁에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의 존재가 있기에 내 존재가 의미가 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듯 당신도 나를 의지하기에 나는 힘이 난다. 존재가 존재에게 존재만으로 온기를 전하는 일은 위대하다. 서로가 없다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은 물이 되어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스며들어 온 이 온기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새 고스란이 몸 안에 흘러 핏줄기 사이에 줄기줄기 뿌리내린다. 어느 무엇도 이 순간을 갈라놓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뿐. 서로의 존재를 확신하는 우리들만 남아서 다시 서로를 확인하고 쓰다듬는다. 

이 위대함이 없이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가? 미치지 않고 세상에 살아남은 게 용하다는 말이 그릇된 말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 이유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정합적인 과학정보만 진짜 취급하느라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곁을 나눈 사람 뿐이다. 그런데 곁을 나눈 사람과 함께 잘 살다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지? 그 사람은 나와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지? 세계가 전쟁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복수심에 가득차서 서로를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 둘만 곁을 지키며 잘 살 수 있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나와 당신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내 곁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위대함을 쫓아야 하는가.


『파묻힌 거인』에서 엑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암용이 내뿜는 숨 때문에 안개가 세상을 뒤덮어서, 그들 자신도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닥쳤던 전쟁을 잊어버린다. 부부는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당시엔 판가름하지 못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 망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증오심을 기억하고 물려주기를 바란다. 작가는 이것을 동화처럼 그려낸다. 가웨인은 망각을 부르는 암용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스턴은 암용을 죽여 증오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고 하는 역할을 맡는다.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제는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오래된 상처들이 영구히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거요. …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오래된 두려움이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기를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땅속에 하얀 뼈로 묻힌 채 사람들이 파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 p426-427『파묻힌 거인』


유럽의 어떤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세계2차대전을 언급하며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세계 2차대전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세계 1차대전도 있었나요?” 

아직 한 세기도 체 지나지 않은 싸움을 잊어버린 학생이 유럽에만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젊은 세대가 교실에 앉아 있다. 이들이 전쟁을, 민주화 과정을 기억하지 않고 평화를 평화로 유지할까. 

일본 우익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데서 비롯한 증오를 자식세대에게 학습시키려고 교과서를 왜곡한다. 자위대를 키운다. 

누군가가 수직적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지적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와 소통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끼리만 대화를 주고받는다. sns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내뱉고, 다른 세대가 대화에 끼는 것을 어려워한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도,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말들이 아닐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기억이다. 삶으로서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어버릴 정도로 바쁘기만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자기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하면서도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살아온 그대로 주어진 생명을 연명하는 걸까. 알 껍질은 너무도 단단하기에, 패배감을 가슴 깊숙히 눌러놓았기에,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아서? '암용은 무시무시하고, 그것을 잊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려면,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암용을 죽일 힘은 없지만 암용을 없애는 데 동의한다. 아서왕 시절 법을 세우고 그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액슬, 그것을 부수고 암용이 세상의 기억을 지우도록 도와서 평화로운 상태를 꿈꾼 가웨인, 평화를 기억하지만 그 이후 경험한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에 복수를 실현하려는 위스턴, 그리고 아직 어린 세대인 에드윈. 에드윈에게 위스턴은 분노를 학습시키려고 하고,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하다. 무슨 방법이든 논의하려면, 소통이 필요하다고, 서로의 존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대화가, 아프지만 평화로운 약속을 담은 대화가, 각자의 아픈 역사를 품을 자세로 나누는 대화가. 여전히 "관습과 의심은 사람들을 갈라놓을지라도,"(p443『파묻힌 거인』) 기억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니까."(p468『파묻힌 거인』)


신화적으로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그리고서,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p.s.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궁금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은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 사회를 향한 목소리일까, 아니면 조금 더 부드럽게 마음에 가닿기 위한 장치일까? 피카소가 폭격당한 마을을 묘사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린 것은, 우리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진작가는 잔인한 전쟁 장면을 찍어서 사진전을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것에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사진이 아닌 글로만 책을 냈다. 작가가 리얼리즘 형식이 아닌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