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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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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덕과 명예
도덕을 만든다, 한 국가, 혹은 공동체를 잘 지탱하기 위해 도덕은 필요하다. 이 도덕은 선입견의 영향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공정하지 않은 도덕은 도덕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도덕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공동체를 지키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로서 개인이 온전히 사회에 어울릴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일은 선의를 가진 사람을 오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선입견, 자아도취, 등 
나는 조지에게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 읽어보면 소크라테스는 기존 관념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관습, 관념들이 소피스트의 밥벌이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지와 오해와 악의, 선입견들이 무고한 소크라테스를 죽였음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한다면서 정말 자기가 생각하는 이성적 진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성은 파훼한다. 쪼개고 나누어서 옳음을 증명한다. 잘잘못을 칼로 나눈다. 마치 아이를 둘로 나누어 해결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솔로몬처럼.(솔로몬의 판결은 정말 아이를 둘로 가르라는 의도에서 내려진 것은 아니라 알려져 있으니, 적절한 비유는 아닌가?) 그렇기에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애초 소피스트들이 그토록 선입견으로 꽉꽉 들어차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소크라테스는 그렇게까지 변론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아닐 수도 있다.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인정한 것까지도, 소크라테스는 존중하고 인정했을 테니까. 소피스트들이 꽉막힌 사람이라 소크라테스를 더 몰아간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진리'자체를 믿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각한 순수한 인물이라 여기고 있으니, 어떤 점에도 아량곳하지 않고 비판하고 싶은 것들을 비판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 믿는 순수함은 그 자체로 폭력으로서 상대에게 작용하기도 하니까. 어떤 것이 답일지는,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당시 희생당한 혹은 진리에 순교한 사람으로 비추어진다고 생각했다. 어떤 해석이 더 적절할까? 다른 해석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공격을 받은 소피스트들의 선입견은 밥벌이가 걸려 있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너를 찌른다.' 마치 전쟁터같다. 
전쟁중에도 도덕이라는 건 필요하지 않나? 어떤 평화가 더 좋은 평화인지는 수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고, 그 논의는 끝나지 않아야 하지만, 그 와중이라 하더라도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중요하다. 보통 전쟁중에는 평화라는 것이 어디로 숨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다르게 보이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역동하며 평화를 찾아 헤맨다고 믿는다. 피난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평화를 찾아 떠난다. 그러면 상대편이 적이라면서 적군을 죽이는 사람들은? 역설적이지만,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적을 죽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편은 죽이지 않는 '도덕률'을 적용한다.
스텐퍼드셔에서는 기이하게도 평화를 위해 조지가 희생된다. 조지를 위한 도덕적인 판단은 배제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조지를 제거한다. 조지는 터무니없는 고발과 변호와 증언때문에 감옥에 갇힌다. 죄가 없는데도. 앤슨 대위는 자신의 자아도취를 지켜내려고 조지를 계속 유죄로 몰고 간다. 그 일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방식을 지키는 일이고, 그가 손에 쥔 권력과 밥벌이를 지키려는 일일 것이다. 어쨋든 그들, 자아도취에 빠진 자들은 증거물 앞에서, 철저한 논증 앞에서 다시금 항복을 선언한다. 그럼에도 밥그릇은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타자가 평화의 상태에 있지 않은데 내가 평화로우리라는 주장은, 도덕적이지 않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를 억누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건 진정한 평화를 위한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소외된 조지가 그나마의 평화를 얻은 것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도덕적인간인 '아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다른사람에게만 평화로운 상황이 되어있는 이 불편한 상태를 바꾸려고 나선다. 그러니까, 도덕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떤 사람이든, 명예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도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덕이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덕목이고 그건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인지시켜주는 동시에 함께 살 궁리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명예가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상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러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나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길일지도 모른다. 


마무리
명예가 무엇인지 아는 '아서 코난 도일', 그리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때문에 희생된 '조지 에들러' 그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철저하게 각자 화자의 시선에서 서술되었고, 그러므로 독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보지 않으면 화자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어느정도인지 잘 살피기 어렵다. 하지만 그게 많은 단서를 가져다준다. 어쩌면 이런 서술방식은 작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완하는 소설적 장치로서 사용되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작품성을(작품 내에서 모자란 점을) 작가와 긴밀하게 연결시키지 않아도, 그 자체로 화자가 결점을 가진 존재이므로, 소설가의 결점으로 읽히지 않고 화자의 결점으로 읽히는, 그렇기에 작품으로서는 나은 조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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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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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의 제목은 이상의 시 '절벽'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얼마 전에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의 작품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 여행의 초반부에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만, 아버지를 찾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중인 그 순간만이 희망이다. 그 희망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은 없다. 어떤 사건도 길을 막지 못한다.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찾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너는 네 문제로 우리를 따분하게 만들고 있어. 너는 살아 있잖아. 그걸 복으로 알고 살아.” 127p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에게 안도했는데,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로에게서 확인받고, 살아있음 그 자체에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과거를 잊은 척 하며, 과거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망명자들은 각자의 치열한 삶을 버텨나간다. 살기 위해 망명해온 망명자들이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그 가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중요성을 잃은 것처럼 산다. 하지만 그들은 산다는 행위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았는가?’ 사는 행위 자체에만 의미부여를 하다가 그들의 존재가치를 묻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낙천적인 세계’인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만들어 서로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했는데, 그렇게 부여한 의미가 그들의 과거에 의해, 과거가 쌓아올린 그 자신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잔인하다.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그들은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들은 그 안에서 어떤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환희에 가득 차 있었는데, 자신이 마주한 사건의 진실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다.’ 진실을 마주하고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정확히 말하면 살기 위해 잊을 수 없었던) ‘안개 속의 풍경’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 이야기를 미셀이라는 화자를 내세워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미셀과 미셀의 가족에게 어떻게 투영되어 일어나는지 맞물려 보여주면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미셀은 호기심때문에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만나고, 그 이후로 자신이 겪는 사건들을 그 사람들에게 상담하면서 그 사람들과 우정을 다져간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클럽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셀의 가족 역시 역사적인 배경이 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역할이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양 그렇게 산다. 그렇기에 미셀의 가족도 좌충우돌을 겪는다. 살던 대로 사는 방식을 고수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어떤 조화점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일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재단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서, 그 조화점을 찾으려면 역사를 벗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환경 안에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졌는데, 자신의 어떤 경향이 환경 탓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애초, 그것은 쉬운 일이었던 적은 없다. 알아도 얼마나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 지 모르겠다. 그것을 뒤집는 일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뒤집는 일이고, 그것은 자신이 실존하는 일일 수 있지만 동시에 실존하지 못한다는 위험에 스스로를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준거기준이 없이 인간이 어떻게 정상적인 사고활동을,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생명 그 자체, 공동체가 모든 것을 지탱하고 서서 개개인을 지탱해주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은 개인을 스스로가 지탱해야 한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고군분투해야 한다. 실존하고 있다는 감각이 살아있음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을 스스로, 혼자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욕구는 늘 존재하지만, 그런 복잡한 와중에 나 자신을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는 걸까?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거를 무너뜨려가면서까지 나 자신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일은 이 사회를 파악하는 일이고, 그건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혼자’ 찾아야 한다. 서로의 이익은 상충되고 살기에 급급하여 내가 정말 여기 존재하고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겨를 조차 없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지탱할 ’희망’이 없다. 환상이 없다. 그저 나에게 그것이 너의 실존이야 라고 지칭된 어떤 명분들을 마치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는 양 받아들인다. 그 명분 안에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도 없고, 공동체를 지탱해야 겠다는 믿음도 없이 오직 ‘나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나 자신을 먹여살리는 것 자체도 공동체가 지탱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건데, 마치 별개인 양. 이미 주어진 명분만을 고스란히 따른다. 마치 미셀의 가족처럼.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거나,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늘 불안에 시달리는 스스로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진짜 명분이 뭔지 왜 사는지 늘 고민하지만 밥벌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 고민에 치여 제대로 사는 법을 잘 모르겠다. 알았다가도 금새 잊어버린다. 오래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나에게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은 ,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남을 제한하지 않는 건강한 도덕적 규율 안에서 사는 것이지만, 도대체 그 추상적인 낱말이 가리키는 실재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실재를 알지 못해 알려고 노력한다. 사는 대로 살지 않으려고, 역사가 나에게 준 명분대로 살지 않으려고, 나 자신의 실존을 굳건하게 사는 동안만큼은 지키고 살려고 노력한다. 


공산주의의 선의를 믿었던 낙천주의자, 샤르트르는 까뮈가 교통사고로 죽은 지 며칠 지난 후 이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고 한다

.

“...... 우리는, 그와 나는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사이가 틀어진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고- 설령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작고 좁다란 세계에서 서로 멀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따름이다. 그와 사이가 나쁘다 해도 나는 그를 생각했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 그의 시선을 의식했으며, ‘이것을 두고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지금 이 순간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 고집스런 인도주의, 좁고 순수하며 엄격하고도 관능적인 그 인도주의 때문에 그는 이 시대의 거창하고 기이한 사건들에 맞서 의심스런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는 완강한 거부를 통해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에 맞서, 현실주의의 황금 송아지에 맞서, 도덕적인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주었다......”166p

 

비록 소설의 결말은 ‘구제불능낙천주의자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흩어져 버리는 것으로 났다. 그건 아마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건강한 규칙, 혹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일까. 살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자신을 반성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결론으로 끝나도 좋은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어떤 ‘희망’을 찾는 일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희망’은 찾는 행위 그 자체로 ‘희망’이기 때문이고, 그 희망은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찾는 것이라 믿는다. 살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이 지켜지고, 서로를 믿을 수 있고, 서로 의견이 갈라서더라도 ‘사랑’이라는 믿음 아래서 결국 “이 작고 좁다란 세계에서 멀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성능력을 지나치게 활용하면, 모든 일을 판가름하려고 한다. 판가름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도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았는데, 그가 쓴 소설에는 그가 쓰지 않은 것도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능력으로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 감성적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조화점을 찾은 게 아닐까. 그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희망’을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조화점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작가의 가치판단이 지나치게 개입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였고, 그 사이사이 들어있는 진실들이 너무 좋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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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읽고 싶은 소설들..

 

 

 

나는 밀란쿤데라를 좋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감정을 숭배하는 소설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나는 그의 발언에 놀랐다. 소설은 어떤가 하고 읽어봤더니, 정말 잘 쓰더라. 도스토예프스키의 화자는 감정적으로 작중 인물들을 왜곡하고 비꼬는데, 쿤데라는 화자를 내세우지 않고 작가가 직접 개입한다. 담담하다. 작가랑 인물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 않는 것 같기도.

그 쿤데라가 추천한다. '스스로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한 점도, 신기하다.

 

 

 

 

 

 

문단에서 금기시 된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쓴 작가의 배짱이 대단하다. 양철북도,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한 데 얽혀 큰 서사를 이루어낸다. 그의 글로 버무려낸, 그 사건이 듣고 싶다.

 

 

>출판사 책소개 <

 

 

이념과 수치(數値) 속에 감춰진 죽음의 표정들, 단 한 측면만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 왜곡 위험 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역사의 거시적 차원과 그 알맹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필립로스가 쓴 미국의 목가를 읽고, 작가에게 반했다. 개인차원의 일을 역사적 차원의 일과 연결시키는 능력이 잘 발현된 소설이라 생각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포착해내는 관찰력을 배우고 싶다.

 오늘을 사는 나는 내가 어느 흐름에 속하여 가고 있는 지 알아채고, 발버둥치고 싶기 때문이다. 산다. 산다. 살아야 한다.

 

 

 

 

 

 

 

 제목에 눈이 휙 돌아갔다. 나는 한국이 싫다.  태어난 땅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투표했는데, 다수결로 뽑힌 정부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냥 정부 욕을 하기에는 나 역시 무지해서 어떤 대안을 못찾겠다. 그때문에 공부하려는데도, 갈 길이 너무 멀다. 이런 건 한국이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 싶으면서도, 부당하게 해를 당한 사람들을 보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얄팍한 얼음위의 자유가 참 하찮아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을 질문하게 한다.

 

한국이 싫어서 라는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작가는 한국을 좋아하는 구나 싶었다. 한국이 싫어서- ~한다. 라는 말을 기대하게 하는데, 그게 소설 제목이라는 건 그만큼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 한국이 싫어서라면서 한국 이야기를 하겠지. 작가가 느끼는 한국이 펼쳐지겠지. 읽고 싶다.

 

 

 

-- 잘 쓰고 싶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글들만 겨우 구상하고 내지른다. 별로 좋은 글이 아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적당한 글을 무미건조하게,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나는 목마른 척 하면서도 아직 덜 절박한 것이 아닐까..

좋은 문장들을 필사해볼까. 좋은 문장이란 게 뭘까.

아니면 내 사유가 아직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뚝뚝 끊겨서 그런 걸까.

이상하다. 하여튼, 모자라다. 많이.

더 많이 읽어야 겠다. 더 꼼꼼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온갖 형용사를 다 동원하여,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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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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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서 동떨어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떨어져 지내려 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는 거 아닐까 싶네. 내 소설은, 대개 그런 개인을 그리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 시대정신의 표현을 지향하고 있지 않나.(조코 코기토)" 제 5장 거대 현기증 <익사> - 135p

역사를 인간 개인 차원의 문제로 끌어내려 독자가 전체 그림을 관조할 수 있도록 쓰여진 소설이다. 미궁의 사건을 던져주고 실마리를 한나씩 제공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든 이야기가 풀려나갔을 때 이야기는 예상가능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예상가능하지만 소설 마지막을 읽을 때까지 예상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는다. '익사' 할 운명이었다는 듯이,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소설은 익사를 향해 간다. 넘을 수 없어 절망적인 한계때문에 익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기가 익사할 정도의 시기까지밖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익사한다. 그러므로 익사 이후의 미래는 남겨두고 익사가 진행된다. 
도대체 왜? 이 소설은 익사와 어떤 관련이 있기에?
모든 일은 소설의 주인공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가 익사하는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조코 코기토는 이 일이 전후 일본을 다시 전쟁으로서 일으키려는 아버지의 시도가 우스꽝스럽게 좌절되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젊을 때 <손수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날>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고 그런 아버지의 시도를 조롱한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는 그가 교육받은 그대로, 아버지가 지향하는 가치를 숭상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란 이후 이성을 가지고 판단한 결과 그는 그 가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를 온전히 그 자체로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의 시대를 부정해야만 하기에 그는 그의 내면에서 어떻게 화해를 이루어야 할 지 모르겠다. 

[(<마음>의 선생님)"그런데 한창 더운 어느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마음>의 선생님께 질문) 당신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동시대 사회에 등을 돌리고 또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사람이 아닙니까? 시대정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정신이라는 게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천황에 빗대어 말한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 역시 시대가 끝나려 하자 미리 '순사'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나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을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들이라고 판단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대를 인식하는 방법, 시대의 정신 아래서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전후 일본, 그들은 극복해야만 하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전쟁에서 진 상흔을 어떻게 자주적으로 극복할 것인가. 국가를 어떤 방식으로 재건할 것인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고쳐야 할까? 그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 고민이 시대를 지배했으리라 생각한다.
소설가인 조코 코기토는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서 살지만, 역사가 어떤 무게로 어느 정도의 상황으로 스며들었는지 모른다. 소설 안에서  조코 코기토는 그 내막을 끊임없이 탐구해나가고, 그를 소설로 만드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상황을 목도한다. 

하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그런 시도 자체가 약간 어긋난체 소설화되면 가문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시대를 맞으려는 시도와 무관하게 죽었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관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고, 아버지는 시대정신을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가 배워왔던 마을의 정신과 대치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정신과 연결되지 않았는가? 그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마을의 정신이라는 것도, 그가 고유하게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고, 어쩌면 마을의 정신 역시 전체 시대정신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떤 형식으로든 그의 행동과 죽음은 시대정신과 연결되었다. 국가공동체를 지키는 방법의 일환으로, 더 나아가, 지역공동체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도 '순사'를 선택한 것이다. 그건 그가 살았던 세대의 논리였을지도 모른다. 
둘. 여성을 국가의 앞날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으로부터 배제하고, 마치 도구취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이는 시대정신과 멀어진 상황이라 볼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여성 역시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고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동하였으면, 과연 일본 국토에 전쟁참여라는 참혹한 상황이 일어났을까? 아버지의 '순사'마저도 어머니의 손에서는 보잘것없고 평범한 일로 죽은 게 되었다. 만약 어머니와 상의했더라면 '순사'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선생님이 아내의 뜻을 받아들여 메이지 정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했더라면? 그 비판적 시선과 순사하려는 정신이 만나서 새로운 시대정신이 탄생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알레고리는 우나이코라는 여성 연극단원에게도 적용된다. 그녀는 시대를 비판하는 극을 많이 만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방해를 많이 받는다. 그녀가 방해를 받았던 것은 아직 시대정신이 그녀가 바라는 사상을 융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후 일본의 과제로 고스란히 남았다. 이것을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아마 이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여지를 없애지 못하고 과오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소설에서 풀어놓은 많은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우나이코는 큰아버지 식구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을 연극에 삽입하여 고발하려다 실패하고, 다시 큰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다이오는 우나이코의 큰아버지를 죽이고 스승인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를 따라 '순사'한다. 화해에 실패하고 다음 세대로 가는 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대는 아직 변화하지 않은 상태이고, 과거의 잔재로 인해 발이 묶였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술술 풀릴 수 없었으므로 '익사'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익사'이후의 미래는 열려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정말 놀랐다. 소설인데 현실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인물의 다양한 측면을 다 말해주면서도 이야기의 초점이 흐려지지 않고, 모든 인물을 다층적으로 그려내면서도 스토리를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무리지어가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소설이 가리키는 지점이 한국과 별다르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아직 전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국가에 살면서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굉장히 모호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가 쓴 '시대정신'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아서 그를 엮어서 소설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했지만 평면적인 것 이상으로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개인과 시대정신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어떻게 엮어 설명해야 할 지 몰랐던 것은 아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범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 잘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나는 도대체 나의 역사는 어떤 시대정신 아래에서 걷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앞으로 몇 번의 익사가 더 필요할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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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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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것이 내 어릴적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을 꾼 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사람이어서 꾼 꿈은 아니었다. 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꾼 나 자신을 대단하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도 행복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기뻐서 이것저것 살을 붙여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그로서 기쁨을 창출해내려는 조악한 시도였다. 그 시도는 곧 시도를 빛나게 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손쉽게 실패했다. 너무 거대한 꿈이라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꿈조차도 한없이 하찮은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까닭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
이 책은 내 어릴 적 꿈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에서 소외된 사람이 비참하게 짓밟히는 광경을 그대로 목도해야만 했을 때, 나는 소설에 개입하여 아무것도 못하기에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못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해야만 했던 나 자신을 소설에 비추어 봐야만 했기에 역겨웠다. 역시 희생당하는 사람을 제외하고서라도 그것을 목도해야만 하는 목격자도 속죄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연을 마주하면 거울처럼 그 심연이 나를 비추리라. 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만 행복해서는 진짜 행복이 아닌 것이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행복일 뿐. 아니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체 느끼는 조각난 행복이거나. 그렇기에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싶었던 게 기억났다.

파르마코스(Pharmakos)란 ,

"고대 그리스어로 속죄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염병이나 기근, 외세 침입, 내부 불안 등과 같은 재앙이 덮쳤을 때, 재앙의 원흉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 자체의 경비로 인간 제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파르마코스라고 칭했다. 소나 송아지 같은 동물들 이외의 인간 파르마코스는 대체로 희생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위험이 없거나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 가난한 자, 불구자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특히 르네 지라르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희생제의 속에 내재된 욕망의 구조를 분석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이 말을 논의의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고 있는데,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어떤 집단이 신에게 동물이나 인간과 같은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풀고 신의 은총을 기원하는 의식이 아니라, 집단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속죄양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통해 집단의 질서와 일체감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고안된 문화적 장치이다.
따라서 파르마코스는 어떤 불확실한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는 속죄양이 아니라, 집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어 언제든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제적인 폭력을 상징적인 폭력으로 해소하는 역할을 떠맡은 희생물이다. 일종의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속죄양 제도를 통해 사회는 불순한 폭력(violence impur)을 응징하는 순수한 폭력(violence pur)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희생제의는 '해로운' 폭력과 '이로운' 폭력을 차별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폭력의 희생자인 속죄양에게 성스러운 순교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게 되는데, 이 성스러움은 바로 '이로운' 폭력의 폭력성을 감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문학비평사전 - Pharmakos)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소설은 그 욕망을 무참히 짓밟는다. 읽는 내내 부조리함을 소거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축적되고 집약된 분노가 가해자를 향하지 않고 희생자를 더욱 무참히 짓밟으면서 발효된다. 그건 희생자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연민의 시선이 기괴하게 비틀린 까닭이다. 그로서 독자가 온전히 연민할 수 있도록 더욱 잔인하게 희생자를 비튼다. 그건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스스로에게 향하는 분노이기도 할 것이다. 한없이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방관자가 되는,  방관자가 되었기 때문에 속죄양으로 작동하게 되기에 일어나는 분노 말이다.
오에 겐자부로 소설<익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시대에서 동떨어져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떨어져 지내려 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는 거 아닐까 싶네" 익사 - 135p
시대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그런 이야기였다. 속죄양에게 죄를 떠넘기려다가 되려 스스로가 속죄양이 되어버리고 마는 사회의 비극을 가리키는 데도 적합한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는 타자를 계몽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을 두배 세배로 짓밟음으로서 독자가 그에게 연민을 가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연민하지만 그 연민을 역설적으로 발화함으로서 되려 그 인물의 편이 되어 그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든, 어떤 짓을 저질렀든, 저지른 것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으며 지금 소설가에 의해 발화되는 것과 반대되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작은 실수가 재앙급의 잘못이 되는 일은 막고 싶다고. 

"이제 가능한 한 월급이 표시하는 만큼의 일을 객관적 절차에 따라서만 할 것이고 사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다음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밀한 지향보다는 표면적 당위로 변질되어 부질없기만 했던 선언 - 누군가를 구제한다는 착각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며 봉사는 나의 모자람을 타인으로 인해 채워가는 행위라는 - 도 남몰래 코를 푼 휴지처럼 변기에 던질 것이다." 이물異物 192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지금까지 겪어온바 맘먹고 들이대는 사람에게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이 적지 않았다. 몸을 격렬하게 뒤치는 지렁이 앞에서는 구둣발도 어디를 밟아야 치명적일지 몰라서 잠깐은 멈칫한다. 그 뒤에 지렁이를 기다리는 운명이 압사뿐이라고 해도, 끝내 꿈틀하지 않으면 여기 아닌 다른 데로 가기란 요원하다." 여기 말고 저기, 그래어쩌면 거기  43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무엇보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하해와 같은 베풂과 나눔을 실천한들 바퀴나 엔진 소리로 미루어 이제 이 차도 오래가리라는 보장이 없어서 나중 가면 피차 난처해질 뿐만 아니라, ...... 최악의 경우 시신을 둘러메고 다녀야 할지 모른다. 누군가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품속에 몰티즈 한 마리나 무사히 지켜내는 게 정신적으로 남는 장사이며, 이 순간의 외면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문득 차창 너머의 디귿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눈 속에 담긴 혐오 내지는 공포 아니면 간구의 빛을 포착 했다고 느꼈음에도 니은은 다만 불가능한 행운과 안녕을 비는것이 서로에게 최선이라 믿으며, 디귿의얼굴거의 절반이 녹아내리는 이 순간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동등해진다." 식우蝕雨 164-165p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그건 그의 소설 '이창'에 나오는 주인공의 행동과도 대비되는 방식이다. '이창'의 인물은 현실을 바꾸려는 계몽적인 노력이 역반응을 일으켜서 희생자가 희생되는 형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화자의 노력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을까? 나는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희생당하게 되었다 해서 연민과 참견 자체를 나쁜 일로 매도해야 하나. 아니다. 연민의 방식을 좀 더 섬세하게 가꾸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할 뿐. 목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 것이다. 
지독히도 현실적이기에 환상층위를 끌어와서 더 몽환적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소설을 읽고 나는 더 차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내 눈에는 환상기법이 드러내는 선명한 현실만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주세요. 현실에 안주하지말고, 분노해주세요. 하지만 그 분노는 타인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되요.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기에, 그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서로를 돌보는 방법이 온전한 길이에요. 그리고 그런 연민과 돌봄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볼 수 있기를, 그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기를"
이 이야기를 여태 꼬아서 보았지만, 다시 정방향으로 보면  구병모의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으면 건강한 집단을 이끌어갈 수 없는 우리 사회를 겨냥한 소설적 파르마코스인지도 모른다. 그로서 현실이 더 이상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는 바람이 담긴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왜 파르마코스가 되어야 했나? 파르마코스를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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