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몸문화연구소 번역총서 1
스테이시 앨러이모 지음, 윤준.김종갑 옮김 / 그린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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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읽고 느낀 첫 번째 감상은, 뻗어 나갈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말로 축소해야 했다.
이 책은 농사에 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소농과 관련하여 읽을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과 연관되어 있고, 말,살,흙은 우리가 폄하하고 분리해온 ‘비인간자연‘, 흙, 공기, 물, 동물, 식물, 물질등이 우리 몸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소농의 삶은 ‘비인간자연’이 어떻게 몸에 침투해들어오는지, 우리가 분리하여 생각해왔던 ‘환경오염‘이 언제고 내 바깥에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겪는 삶이다. 오늘날 농촌의 삶은, 논밭 옆에 송전탑이 있어, 보다 많은 농부가 암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양수발전소 건설 예산 확정으로 인하여 미래에 산을 깎고 파괴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삶이고, 골프장을 건설한다며 산이 다 깎여나가는 것을 막으려 싸우는 삶이고, 도시에 공급할 전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하여 논밭에 태양광발전을 깔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정부를 향해 반대투쟁을 하는 삶이다. 밭을 조금 멀리 걸어나가면 공장이 있고 폐수나 오염물질이 흘러나온다. 도시 사람들에겐 ‘흙‘이 더러운 것이므로, ‘흙‘없이 농산물을 생산하는 ‘스마트팜‘에 밀려 소농에게는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나마도 생태적 삶을 지향하며 토종씨앗을 널리 보급하려는 일부 농부는 농진청에게 씨앗채종시기에 최저임금을 받고 씨앗을 넘긴다. 그리고 농진청은 씨앗들을 개량하여 종자회사와 계약하고, 종자회사는 대량생산을 하는 ‘농업‘인들에게 씨앗을 비싼 값에 ‘판매‘한다. 그 종자는 본디 값을 매기지 않고 농부들이 손에서 손으로 전하던 씨앗이다. 파종에서 채종까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씨앗이 종자기업의 이윤논리에 따라 한 해만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지 않는다. 흙과 교감하며 흙을 살려 식물을 기르며, 자연농을 연구하는 소농은 이 틈바구니에서 식민화되고 착취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소농은 도시 사람들이 바깥이라 여기고 착취하는 공간에서, 외부자로, 자연으로 취급당하는 존재이다. 마치 재생산노동,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자본주의는 유급노동이라 지정되고 비용지급을 강제하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가장 많이 돌봄과 재생산, 토지 등 필수적 공공성을 약탈해간다. 그러면서 자유를 제로섬게임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소농을 포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다른 삶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이제와서 다른 존재를 식민화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데, 어떤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을 상상하든, 비인간자연이 외부에 있고, 우리와 단절된 것이라는 시선으로, 비인간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쓰레기를 만들고, 주변을 황폐화하여 지금 당장 편리함을 찾고, 쓰레기를 투척하는 한,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비인간자연이 우리자신을 어떻게 함께 오염시키는지 기억하는 게 좋겠다. 이 문제를 쉬운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오염시키는 구조 안에서 숨쉬고 있는 한,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사람들과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논의하고, 삶을 바꿔나가지 않는 한, 이 책의 시사점은 도로 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비인간자연이 인간에게 항상 친절하고, 안전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인간자연을 격리하여 인간을 고립시켜 살아갈 수는 없고,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드러났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기후재난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계속 바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술‘로 해결하려고 태양을 가리는 시도까지 연구되었으나, 그 정도를 인간이 조절할 수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데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암 치료법이라 말해지는 방사선치료도, 인체의 면역력 이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일정정도 이상 치료법을 이용시, 방사선에 노출되는 일은 암을 증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대기가 ‘희석‘할 것이라고 믿었던 간에, 산업혁명 이후 낭비적 생산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100년 간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100년 전에 비해 1.5도씨를 넘는 것이 현재로선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IPCC의 보수적인 보고서가 2023년에 나왔다. 이는 비인간자연이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고, 늘 인간과 함께,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이 신호를 공포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위기의 시국에, 비인간 자연과 어떤 경계로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다시 배워야 했다. 나는 무엇인가든 해야 했고, 비인간자연에 지나친 영향을 주지 않으며 살아갈 방법으로, 자연농, 소농의 삶을 선택하려 한 것이다. 다만 소농의 삶을 고민하다 보니 얼마나 이제까지 도시의 삶이 비인간자연을 외부화하는 일이었는지, 그게 어떻게 미세먼지, 기온상승으로 되돌아오는지 깨닫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혼자 실천을 잘 하며 살 수도 없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은 셈이다. 혼자만 잘 사는 건 불가능했다.


2.
책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꼽아 보겠다. 하나. 먹던 도리토스를 흙에 뿌리려던 에피소드다. 흙이 너무 소중하고, 도리토스가 흙에 쓰레기같아서 뿌리지 못하는 ‘화자‘는 그걸 맛있게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르게 자각하게 된다. 흙이 식물을 길러내는 데 필요한 힘을 도리토스는 주지 않는다. 흙은 화자가 먹는 식물을 길러내는 존재다. 흙에서 난 것을 화자는 먹는다. 흙에서 난 것이 화자의 살이 된다. 여기서 글의 화자는 도리토스를 몸 안에 소화시키는 일이 쓰레기를 몸 안에 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낸다. 흙과 자신의 살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도리토스를 먹지 않는다. 흙에 뿌리지 않는 것을 몸 안에도 뿌리지(?) 않는다.
오늘날 어디서든 먹는 대상으로 대하는 동물은 운신조차 힘든 철장에서 지낸다. 혹여라도 집단감염되면 전부 죽여야 한다는 논리로, 항시적으로 항생제를 먹인 이들이 사람의 식탁에 오른다. 빨리 자라야 이윤이 되므로, 성장촉진제를 먹인다. 항생제를 먹지 않아도, 성장촉진제를 먹지 않아도, 동물을 먹는 것으로 우리는 성장촉진제 과다복용을 하며, 항생제 내성이 생긴다. 그리고 집단으로 죽인 동물들은 흙이 되고 물이 되고 자연 어디론가, 계속 흘러들어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니, 이미 사람 몸 속에 들어와 몸을 형성한, 동물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자신에게 무엇을 먹이고 있는가? 먹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되고 있는지?

둘. “동물성 지방과 유방암의 관련성을 공표하지 않는 미국암협회..“”환경을 청결히 관리하는 것보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 더 쉽다.“”우리는 이윤경제에 살고 있고, 암 예방에는 어떤 이윤도 없으며, 오로지 암 치료에서만 이윤이 생긴다”[말살흙]p212….. 인용한 문구는 오드리로드 개인의 몸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가 바다에 투기되는 이유는 그 방도가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사능물질은 노출정도에 비례하여 암을 발생시킨다. 현재는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핵폐기물을 증가시키는 핵산업을 부흥하려 보조금을 지급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를 보라. 한 번 투기한 오염수, 또 빌미를 제공할까 걱정된다. 이미 투기가 시작되었지만 언제고 중단할 수 있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윤논리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기후재난에도, 바다오염에도, 예방에는 이윤이 없다.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집단‘에게만 이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집단은 자본을 가진 집단에게서 이윤을 얻는다. 현대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집단은 누구인가? 처음 공장을 세워 스모그를 만들었던 집단. 석탄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생산하여 부산물을 만드는 집단.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해온 집단이다. 기후재난에 기여하고서 기후재난을 막겠다 말하는 집단이다. 철저하게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사회를 파괴해도 이윤이 우선인 집단을 신뢰하고 정치를 내맡길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집단의 일부인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 이윤을 우선시하는 집단의 바깥에서 생존하는 게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소농의 삶이 가능할 방도라고 여겼는데, 그마저도 이윤을 우선시하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가능하지 않아보인다. 정치, 정치밖에 없는 것 같다. 남에게 내맡기지 않는 정치.

셋. 화학물질과민증을 가진 사람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아프게 하는 환경을 만든 집단을 탓할 것인가? 조금 더 분명한 사실은, 화학물질과민증을 앓는 사람에게도 안전한 공간이 과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장애운동의 논리와 닮아있다. 장애인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이 비장애인에게도 편하다는 것. 다만 인간에 국한되지 않도록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비인간자연에까지도. 오염되지 않은 공간에서 살 때 증상이 빨리 발현되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다.

3.
자급운동을 하고 싶다. 나는 농민들이 농협에 앞집, 옆집 5억씩 빚을 져가면서 자신을 갈아 농사를 짓고, 이주민을 식민화하고 착취하는 방식으로만 굴러가며, 석유산업에 의존하는 ‘농업‘이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속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속하는 일이 나 자신도 오염시키는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국가간 빈부격차로 인한 임금격차로, 이주민은 값싼 노동을 지속한다. 그들은 태어날때부터 가난한 국가에서 태어나 그를 감수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착취할 권리가 있는가? 태어날때부터 식민화된 곳에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같은 논리로 식민통치가 조선을 풍요롭게 했다는 논리도 있다. 돈이 되는 농사만 지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단절된 도시의 정책을 비판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살아있는 땅에서 난 식물이 ‘고급‘식품이기만 한 많은 도시인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는가? 그들은 도시에 산다는 이유로 영양가도 덜하고 맛없는 채소를 먹어야만 하는가?
제조업, 공업등 각종 개발로 대기, 물을 오염시키고도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는데 보통의 많은 사람은 이 때문에 많은 기간을 미세먼지에 고통받는다. 언제까지 시달려야 하는가? 피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공기청정기는 그 필터를 만드는 데도, 그를 돌리는 전기를 생산하는 데도, 또 다른 미세먼지를 발생시킨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자유가 제로섬게임이 맞는가? 아니, 아니다.

4.
정치를 남에게 맡기지 말자. 내 몸이 정치의 장이다. 이 몸을 통과해 비인간자연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는 비인간자연에 내 몸의 물질들을 내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내 몸이 이 지구의 병을 함께 앓고 있다. 나는 이 몸을 신뢰하고, 이 몸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이 몸으로, 남에게 맡기지 않는 정치를 배우는 중이다. 지역에서부터 삶을 바꾸고 지역을 바꿔야 이윤중심 사회에서, 공공성 중심 체제전환이 가능하고, 정치가 가능하지 않을까? 도시에서도 경작할 땅이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하면서 농촌에서의 소농의 삶을 이야기하고도 싶다.

다른 고민을 하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읽고 소감을 남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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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2-07 2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기전인데 우끼 님 리뷰 읽으니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커집니다!!

우끼 2024-02-10 00:2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리뷰 기다립니다!!

난티나무 2024-02-08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리토스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아요! 1장만 읽고 별 다섯 백자평 쓰고 싶은 1인 ㅋㅋㅋ

우끼 2024-02-10 00:24   좋아요 0 | URL
꼭 써주세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4-02-08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마다 쿡쿡 찌르네요. 특히 3번은 마음이 아픕니다.

우끼 2024-02-10 00:24   좋아요 0 | URL
ㅠㅠㅠ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요

반유행열반인 2024-03-07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 축하축하 ㅋㅋ 흙하면 (현실?맴속?) 도시농부 우끼님 자동 인출되는 신기한 현상 ㅋㅋㅋ

우끼 2024-03-08 09:39   좋아요 1 | URL
하하 ㅠㅠㅠㅠ 고맙습니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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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계속 졸음이 밀려왔다. 요즘 스트레스 받으면 종종 몸이 졸음을 강제하여 스트레스 수치를 낮추려고 했다.. 

시험은 정말 공정한가? 시험이 그나마 채용시장에서 직접 차별당하는 것보다야 공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시험에 뛰어들면서도 시험밖에 남지 않은 현실이 공정한가? 왜 먹고 살기 위해서, 차별당하지 않기 위해서 시험에 올인해야 하는가? 시험은 시험이라는 제도에 특화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있지 않은가?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은 누군가는 반드시 시험에 의해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왜 말하지 않는가? 시험을 잘 보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마저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현실을 왜 함께 말하지 않는가? 시험이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더 유리하도록 계속 변형되고 있다는 사실, 시험의 판을 짜는 일은 노동력만 가진 사람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왜 외면하는가?
시험 하나 통과한다고 함께 살자는 일을 하기란 어렵다는 사실을 왜 공유하지 않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고립감에 몰렸던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냥 위안이 되지만은 않았다. 이미 노력했음에도,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게으르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갈음하는 사람들이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아닌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건데, 어떻게 바꿔야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쉽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능력주의적 평가 기준이 성별고정관념을 배제해 성차별을 완화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젠더 혹은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기업 내부의 객관적 혹은 주관적 평가 기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분석한 해외 연구들에 따르면, 표면적으로 젠더 중립적인 평가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소수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의 개입은 제거될 수 없다. 우선 구성원들 간 존재하는 지위의 격차는 구성원들에 대한 기대치를 상이하게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144p

위 사안은 싱어게인 역대 우승자 3명 모두 남성인 것에서도...발견했던 것 같다. 심사위원 투표든, 시청자 투표든, 남성이 연속으로 우승한 것이 이상했다. 그 외에 내가 속한 조직에서도,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남성보다 월등히 뛰어나야 했고 비슷한 수준일 경우에는 여성이 하향평가 받곤 했다.


내가 사회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해방을 위해서이다. 혼자 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고, 사람 뿐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서 함께 숨쉬는 식물들과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삶을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적응이 어려운 건, 나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나를 바꾸려 애쓰는 게 나를 위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시장에서 나 자신의 삶만 구하려 애쓰는 일로는 나 자신도 구할 수 없고, 누군가의 희생을 항상 방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희생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리라는 마음 때문이다.
돌봄 대상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운명이라 여기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함께 서로를 돌보며, 돌보는 일로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살 수 있는 삶을 간절히 바라고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더 맡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어떤 형태의 돌봄을 내가 전할 수 있을지, 어떤 형태의 돌봄을 받을 수 있을지, 그것을 개인의 힘만으로 해내도록 내던져버리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시스템이 돌보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도울 수 있는지 고민하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이 꿈은 함께 만드는 꿈이 아니고서야, 누락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할 수 있는 것부터 말하되, 열려있는 꿈이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청년여성이 자신을 탓하지 않고 사회를 탓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고 했는데, 그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 책이 당신에게도 힘이 되기를, 나 혼자만 괴로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숨을 쉴 수 있는 결정들을 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 길이 함께 사는 길이기를 바란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0년간 한국의 자살률이 감소하다가 2018년을 기점으로 다시 증가한 현상에 주목하면서, 청년여성의 높은 자살률이 전체 자살률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간 남성의 자살률은 증가하지 않았다.”p11-12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교육에 개입되면서 자신이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패배감이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쳐 이들 중 대부분이 불안증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앓는다고 지적했다.” p13

"아빠는 원래 성격이 그래. 너가 성격을 고쳐."p74

"딸로 하여금 지금까지 수행해온 가족규범을 준수하게 만들고 그녀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균열의 존재를 지워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어머니들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딸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유도한다."p75

"승진도, 성과평가도 없는 직군이라는 여성들의 직장 내 지위는 중심부 노동자들의 책임 전가뿐만 아니라 괴롭힘에 대한 고용주(사용자)의 방관을 낳는다. 불안정한 고용관계는 이들을 일회용 노동자로 인식하게 되고 회사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을 지체하며 피해자들이 스스로 회사를 떠나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 괴롭힘 문제를 처리한다."p97

"교육상품을 구매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 임금노동이 제한된다는 사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청년여성들에게 그 자체로 위험부담이 된다."p102

"게다가 노동시장에 만연한 성차별은 시험이 가지고 있는 공정성을 부각한다."p106

"기업별 노조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꾸려 집단주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 내부노동시장은 경력직을 채용하기보다 공채, 즉 대규모 신입사원 채용을 선호하기에 외부노동시장에서 경력을 시작한 노동자들이 내부논동시장으로 이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도전에 가깝다."p109

"이들은 짧은 근속연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직에 성공했는데, 이는 많은 지원자들의 근속연수가 짧아 그것이 유의미한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그만큼 대부분의 회사들이 서로 유사한 수준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p118

"앞선 참여자들이 경험한 반복적 이직은 열악한 노동지위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러한 '선택'은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행위로 이동을 의미화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압박에서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체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즉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고 그러한 삶을 위하 어떤 행위를 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인식하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는 틀로도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특정한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위치 지으면서, 그러한 삶을 향해 정진하도록 우리를 통치한다. 모든 사회관계의 토대를 시장으로 간주하여 시장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명령하면서 국가를 넘어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합리성을 구축하고 동시에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전 영역에서의 합리성의 세계를 그려낸다." p118-p119

"남성 노동자에 대한 선호 앞에서 여성들의 노력은 무화된다. 남성들과 함께 경쟁하는 직군에서 여성들이 경험하는 성차별은 남성 노동자와의 직접적인 비교 속에서 이뤄진다...비대졸 여성의 경우 이들이 경험하는 차별은 대체로 여성집중직종에서 이뤄지는 여성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다. 이러한 가치절하는 사회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성차별로 의미화되기도 어렵다." p135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일환으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야기된 실패를 개인의 무능력으로 포장하여 도덕적 멍에를 씌우는 역할을 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는 '노력'이라는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되고 은폐뙤며 성공하지 못한 나머지 '잉여'들은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p143



"청년여성들이 자신의 '회피'성향의 원인으로 이야기하는 게으름은 실제로 무기력하거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p152

"자신의 현재적 결함에 대한 성찰이 지속될수록 이들의 결함은 과거로 소급된다. 특히 양육담론이 발전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어린 시절의 부모 양육에 의해 형성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서사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확장된다."p153



* 이 책이 궁금하여 서평단을 신청했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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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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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관념이 아니다. 평등은 실천이다.…우리는 원칙을 포기하는 ’결정자‘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일이 다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관여자’가 필요하다˝14-15p


말은 쉽지만, 평등을 관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까지 자신을 숙고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평등하다 여긴다 한들, 상대도 역시 관계가 평등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평등을 말로만 배우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학습한 것은 의무교육과정을 졸업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발달장애인 시설에 갔을 때, 한 사람과 6개월간 매주 만났을 때, 나는 6개월이라는 기간이 끝나가는 그 즈음에서야 이 사람과 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 이전까지 이 사람이 반응하는 데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으니까. 살아온 삶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므로. 우위에 서지 않고, 그렇다고 끌려다니지도 않으려면, 계속 살펴야 했다. 이때의 경험을, 나는 평등을 처음 학습한 때로 기억한다. 우리가 그 순간 평등하다 여긴게 나의 착각이었을 지라도, 나와 조건이 매우 다른 사람과 오랜 기간이 걸려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경험은 이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경험을 어떻게 다른 평등과 연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그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 원칙을 포기하는 결정자가 되지 않고,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여자로 자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방식으로는 가능해보이지만, 언제까지 그 방식을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매 순간 숙고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대로 사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기의 운명이 다른 어떤 존재나 그 존재가 놓인 운명의 은유로 사용되면서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은유적으로 부재 지시 대상은 원래 의미가 그 단어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위계 관계에 동화되면서 반감되는 무엇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동물의 운명이 지니는 원래 의미는 인간 중심적 위계 관계에 흡수되고 만다. 특히 강간 피해자나 구타당한 여성에 관련해 동물이 경험하는 죽음은 피해 여성의 뼈저린 아픔을 대신 표현하는 데 사용되면서 의미가 반감된다." 105p

"여성이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느낄 수 있고 현실에서 고깃덩어리로 취급받을 수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도살되고 물리적으로 구타당하는 동물은 정말 고깃덩어리가 된다. 급진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사용되는 이런 은유들은 적극적인 상징적 행위와 글자 그대로 동물의 운명을 무시하는 소극적인 폐쇄, 부정, 생략 행위 사이에서 교차한다. 은유 자체는 억압이라는 겉옷 안에 받쳐 입은 속옷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p113

페미니즘 책을 벌써 6권 이상 거쳐왔는데(제대로 꼼꼼히 읽지는 못해서 거쳐왔다고 표현했다) 아직도 페미니즘이 내 삶에 자연스러운 관념인지 의문이 든다. 육식과 페미니즘을 연결짓는 다큐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하는 동물의 삶이 착취란 사실을 깨닫게 되어 놀랐고,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동물에 가해지는 폭력을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은유로 사용하는 일이 또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은유가 함께 쓰여질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지만, 헷갈리기 시작했다. 

실상 비거니즘에 관하여 접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14년경이지만,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한동안 살다가 사정상 식단을 선택할 수 없을 때에 2-3년간 육식도 했으므로, 나는 알게 된 것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은 기간이 꽤 길다. 이때의 부채감이 근 1년간 비건을 도전할 때 스스로를 좀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건을 실천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더이상 동물을 소비할 때 하던, 자신을 갉아먹는 사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미각에 졌다고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비건을 하시는 분들 앞에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바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주늑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내가 비건을 1년 가까이 지속한 건, 엄밀히 말하면, 비건을 지속하면서 비거니즘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분들 덕분이다. 이들의 존재가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분들이 없이 비거니즘을 지속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결국 동물의 고통이 내가 비거니즘을 지속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네트워크가 나를 비거니즘으로 이끈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육식의 성정치>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은유로 쓰이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더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부주의한 부분이 이 부분일 테니까. 동물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내내 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것이기에. 나와 함께 하는 비인간동물인 고양이는, 어쨌거나 타자의 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이니까. 나는 부재지시대상이 된 다른 동물을 계속 무시하는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들을 부재하는 것으로 생각치 않았다면, 아마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다는 점에서도, 이 과정이 내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무결하지 않다. 다만 내가 직접 죽일 수 없으니, 먹지는 않을 것. 도살제도는 인간사회에만 있고(p119), 나는 이 제도가 생산한 것을 먹지 않고 싶다.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라는 헤러웨이 선언문에 나온 문장을 자꾸 들고 오는 것도, 내 감수성이 그정도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 안주하고 싶지 않다. 내게 감수성이 부족하다면, 감수성이 있는 사람을 따라해서라도, 죽여도 되지 않는 방식대로 살고 싶다. 그걸 위해서 동물권 관련 책들도 한동안 읽었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성경을 읽듯이, 나도 동물권 감수성을 불러일으켜서 일상에서 실천을 지속하려고 책을 읽었다. 지금은 감수성을 부르지 않고, 그저 규칙이기 때문에 따르고 있지만 말이다. 

<육식의 성정치>는 어쩐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하는 듯 하다. 

"채식주의와 평화주의는 필연적으로 결부돼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동물이 인간의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지배적 에토스에 저항하는 행동은 전쟁 상태에 있는 세계에 저항하는 행위다. p272

따라서, 채식주의는 어떤 생명을 포기해도 괜찮고, 감수할만 하다는 전쟁을 명령내리는 입장에 있는 결정자가 아니라,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여자가 되려는 시도라고. 신체를 해체하여, 토막내고,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요리한 죽음이 담긴 고기를 먹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와 저 죽음의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그로서 마찬가지로 부재 지시 대상이었던 여성을 다시 연결되게 하는 것. 죽여도 되는 존재라 죽이는 게 아니라, 불가피할 경우를 가르고 가르는 노력들이 담긴 것이라고. 따라서 육식은 포기해야 하는 욕구가 아니라,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상태이며, 채식주의는 그 연결고리를 되찾아 다시 발언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로서 평등을 다시금 실천하는 일이다. 

나는 육식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기를 향한 어떤 욕구나 갈증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p282

동물의 신체는 의미를 수반한다. 이런 의미는 동물이 고기로 전환될 때도 지각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음식 선택을 통해 의미를 발산한다. 음식을 얻으려고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페미니즘의 문제다. 페미니스트들은 음식 선택의 긴장도니 분위기와 부재지시대상의 구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다. 채식주의 신체를 가까이 하면 부재 지시 대상을 , 그리고 신체에 매개된 지식을 회복할 수 있다. p312

채식주의는 육식사회를 향한 비난을 넘어선다. 육식이 남성 권력에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채식주의는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비난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소고기 취식, 남성 통제, 식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식민주의자인 영국인 육식인들은 당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p335

채식주의의 현상학은 동물들 또는 동물의 운명을 여성의 상태하고 동일시한다. 그리고 접합의 문제들, 곧 크게 말해야 할 때 또는 침묵해야 할 때의 문제, 음식 선택을 통제하는 문제, 육식을 승인하는 가부장제 신화들에 도전하는 저항의 문제를 동일시한다. ... 우리가 핵 절멸을 위해 행사할 권력 또는 경직된 사회의 관행에 근거한 개개인의 잔혹 행위에 맞서 행사할 권력을 고려하게 되면서 채식주의가 가부장제의 도덕 질서를 바로잡는 핵심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p344-345

인간동물이나 비인간동물이나 고통받을 때는 별개의 존재로 대해야만 부재 지시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연결되어 있을 때는 우리는 다른 위계 속에서도 어쩌면 평등을 실천하는 관계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이 간극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앞으로 더 고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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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8-04 0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이 리뷰 다음달에 우수작 주시면 안 되요 알라딘??? 우끼님 논문 많이 써 본 사람 티가 나는데요…근데 또 몸으로도 실천하심…키보드만 털던 방구석 악성리뷰어는 쮸글…

우끼 2023-08-04 09:05   좋아요 2 | URL
오잉 ㅋㅋㅋㅋ 저는 학부졸업생으로.. 그나마도 논문과 관련없는 본전공이라 … 논문 한 편도 써본적이 없습니다 ㅠㅠ 대학원… 복수전공했던 학과로 돈 있으면 가고 싶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마 없으니 안가도 상관없습니다.

유수 2023-08-04 11:33   좋아요 3 | URL
제가 드립니다 우수작! 니가 뭔데라고 하시면 그 말도 받아들임.. 너무 좋다 우끼님 리뷰 많이 자주 써주세요…

우끼 2023-08-07 21:23   좋아요 2 | URL
반열님 유수님 ㅋㅋ 용기주셔서 고맙습니다

유수 2023-08-04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연결고리..!

건수하 2023-08-04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잘 모르는데.. 점점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것들끼리는 다 통하는 걸까요? 우끼님 앞으로도 또 써주세요..

우끼 2023-08-07 21: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수하님!! 저도 제가 길을 잃고 다시 나아가는 것이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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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p77 (사이보그 선언문)

요약하자면 서구 전통에서는 특정 이원론들이 유지되어왔다. 이 이원론 모두는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 - 간단히 말해 자아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하라고 동원된 타자-로 이루어진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논리 및 실천 체계를 제공해왔다. 이 골치아픈 이원론에서는 자아/타자, 정신/육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원시, 실재/외양, 전체/부분, 행위자/자원, 제작자/생산물, 능동/수동, 옳음/그름, 진실/환상, 총체/부분, 신/인간과 같은 것이 중요하다. 지배되지 않은 주체이며, 타자의 섬김에 의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자아다. ...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p77

기원이 없는 사이보그. 뿌리를 잘라내는 사이보그. "타자를 거울 삼아 자아를 재생산하는" 인간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범주조차도 사라져버린. 신화조차도 없는. 언어가 나와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분리하면서 하나보다 더 많지만 둘보다는 작은 것을 생성하듯이. 나는 이 사이보그 선언문으로 되고자 하는 인간이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잘라내고 하나보다 더 많지만 둘보다는 작은 존재가 되려는 시도로 읽혔다. 그러나 그의 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계는 생명을 불어넣거나 숭배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이고, 우리의 작동방식,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를 책임감있게 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p83

그는 잘라낸  무중력의 관계에 책임을 넣는다. 그러니, 그가 꿈꾸던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관계의 재조립이었다. 구태의연하고 지킬 이유가 없는 고리를 끊고, 책임의 관계로 재창조하는 꿈. 그것이 사이보그의 꿈이었던 것. 

첫째, 보편적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고안하면, 아마도 언제나, 지금은 확실히, 현실 전반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둘째, 과학기술의 사회관계에 대한 책임은, 반과학적 형이상학과 기술의 악마학을 거부함으로써,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능숙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p85-p86

그의 의견과 이상에 동의하나, 사이보그로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반려종 선언에서 그 나머지 답을 찾는다.

2. 더불어 되기의 기쁨. (반려종 선언)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p123

창발된 실천이 필요하다. 서로 다르게 물려받은 역사, 그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 모두를 책임질 수 있는, 부조화스러운 행위 주체들과 삶의 방식을 적당히 꿰맞추는 작업, 취약하지만 기초적인 작업 말이다. 소중한 타자성은 내게 이런 뜻이다. p125

<반려종 선언>은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다양한 존재자가 그 이야기 속으로 호명되고, 그 이야기는 위생적 거리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 나는 독자들에게 기술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와 사실 모두의 차원에서, 자연문화의 공생발생적 신체조직을 가진 존재인 우리가 되었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다. p136

이와 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영원한 합일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 번역이 필요하다. p147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주문은 우리 대부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바로 그것, 더 정확히 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추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대일 관계, 연결된 타자성을 통해 개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p173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p178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를 통해 발견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필수적인 놀이다.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육신으로 만들어져 있다. p240



나이든 부모님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돌봄을 할 수 있을까? 

참여하는 세미나에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상호 돌봄"이라는 말. 자식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동안  나 역시도 나 한 몸 먹여 살리는 존재가 되었으며, 내가 자식을 돌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고. 당신 혼자였으면, 엉망으로 살았으리라고. 그러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본 것이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상호 돌봄이므로, 돌봄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끝없이 우울로 치닫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를 어떻게든 살게 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 할 수 있는 게 있었겠는지. 아마도 아니었을 수 있다. 당신이 살아남은 것은 당신이 결심한 일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결심한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은 까닭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적어도 나는 그렇다. 삶이 아무리 무의미해도, 당신의 마지막은 보고 끝내자고 생각했으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남았고. 그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하자. 지금은 살아남았지만, 언젠가는 자의가 아닌 이유로 이별하겠지. 

우리는 어떻게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을까? 당신의 사소한 습관부터, 신경질적인 면모까지, 나는 당신을 닮아 있었으니, 나는 당신과는 다른 몸을 가지고, 어느 날에 다른 소통방법을 배워왔고, 우리는 어느 순간엔 말로 소통하는 것을 중단하고, 우선 포옹을 한다. 

나는 품안에 들어오던 우리의 온기를 기억할거야, 살과 살이 맞닿지는 않아도, 옷 사이로 스미는 온기를 기억할거야. 맞닿은 것처럼 고요하게 박자를 맞추며 뛰는 심장소리를 기억할거야. 그 순간들이 당신을 돌보는 일을 해내도록 만들기를, 당신과의 이별을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만들기를 바라면서, 나는 매번 힘을 내기 위해 포옹을 준비한다. 억지로 붙들지도 않고, 꽉 매달리지도 않으면서, 느슨하게 마주안은 품 안의 온기를 내내 기억하면서, 이별 후에 내게 남은 삶을 힘내서 마저 살아가다가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이별을 준비할 수 있기를. 매 순간의 만남이 끝을 예감하는 일인 것처럼, 나는 슬퍼졌다가, 할 일을 도로 내일로 미뤘다가, 다시 오늘 해야할 일을 끌어온다. 이 온기를 기억하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자주. 생각나는 때에는, 매달리고 싶을 때에는 당신의 품을 요청한다. 나는 자주 그렇게 당신 앞에서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게 당신에겐 만족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지만, 포옹하는 순간에는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는 그 순간에는 당신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이 포옹이 우리가 찾아낸 놀이였다. 기쁨을 담아, 증오를 담아, 상대를 꽉 쥐었다가 놓고, 들어올리고, 키를 비교하고, 등을 토닥이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우리는 그때 그 순간 우리의 기분을 포옹이라는 틀 안에서 전달했다. 언젠가 내가 감당해야 할 노동도, 이 기쁨으로 감당해내기를 바랐다.

3.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p288 (반려자들의 대화)

절멸, 멸종, 종 학살의 시대에 진정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요? 
"죽일 수는 있지만 살해할 수는 없게"뿐만 아니라 또 "죽이지 말지어다"가 아니라,...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가 됩니다. ...
'우리'의 '삶'의 방식 전체가 엄청난 규모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의 폭력으로 수식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죽임이나 처형이 아니라, 분명히 죽일 수 있지만 살해할 수는 없게 만드는 관행을 통해 대대적으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 말이죠. 공장식 축산의 경우 처럼요. p286-289

인간이든 아니든 죽여도 괜찮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죽이는 것이 가끔은 가장 책임 있는 행동, 심지어는 좋은 행동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절대 무고한 행동은 아닐 거에요. 어떻게 하면 정말로 무고하지 않음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로요. 저는, 생명우선 입장을 취하는 한은 책임감 있게 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함에 대한 추구는 절멸주의와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는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우선이 아닌 지속우선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291


사람이든 동물이든, 이 자본의 소용돌이에 묶여 자본을 생산하느라 자신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거나, 타자를 죽여도 되는 존재로 파악한다. 나는 여기 탈피하고자 내 죽음과 나와 연결된 사람의 죽음, 나와 연결된 동물의 죽음에 내 손이 닿는 한 책임을 다하고 싶다. 이 다짐에서부터 시작하자. 우리각자가 각자의 삶에서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쌓아올린 관계들을 발견하고 귀히 여기자. 

4. 마무리하며.

요즘 집중하는 게 너무 힘들다. 그건 아마 내가 나를 보기 힘들어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문득 깨달았다. 내내, 사는 동안은 친구일 줄 알았던 친구와 관계가 단절되고 난 이후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 책을 읽는 게 힘들었다. 내가 오래 좋아하던 친구는 행복할 때 연락하라고,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 말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를 감당하는 게 힘들었다. 계속 달라지고 싶었는데, 내내 나를 벗어나고 싶어했는데, 그게 나를 갉아먹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친구는 내가 고장난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오히려 고장난 상태에서 머무른 게 아니냐 했다. 어찌되었건, 관계의 춤을 출 수 없었던 건 내가 고장난 사람이었기 떄문이다. 어차피 관계가 단절될 거라면 나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고장난 채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오늘에야 글자가 하나씩 읽힌다. 결론이 이상하지만, 이게 내가 존재의 춤을 추는 방식이라 인정한 이후엔, 나는 내가 지금 당장 존재하는 형태 때문에 나를 더 갉아먹지는 않을테니, 이제부턴 독서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도망치려 했던 나를 도로 거둬들일  수 있으니, 나는 이제 준비가 된 것도 같다. 

0. 여담으로 남은 의문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쩐지 제이슨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가 많이 생각난다 싶더니.. 296p에 인용하시더라. 제이슨 무어의 책에 해러웨이의 추천사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무어는 마르크스의 사고체계를 비판한다고 여겼기에 마르크스주의 정치생태학자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서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자본을 비판하면.. 마르크스주의로 분류되는 겁니까? 맑스가 자본을 비판하던 틀을 비판해도? 맑스 세계관의 확장은 어디까지..? 아니면 내가 뭘 잘 못 읽었나. 
맑스무식자 혹은 학문분류체계 무식자의 의문은 여기선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으니 우선 내버려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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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07-14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나는 적고 둘은 많다 - 라면 먹을 때마다 느끼는 말입니다.

우끼 2023-07-14 17:32   좋아요 1 | URL
그렇담 한 개 반을 끓이고 냉장고에 반 개를 킵해두는건..?(아무도 해답을 묻지 않았다)

2023-07-14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4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3-07-14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이네요. 역시 해러웨이....
분류체계 해체하세요.ㅋㅋㅋㅋ 용기가 안나신다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추천드립니다. 세상에는 분류학이라는 학문이 있답디다. 체질에 맞는 사람은 모를까... 그거 하려고 하면 우회로에서 길을 잃을 테니 지금 하시는 것 처럼 직진하시고요.

우끼님. 고장나있는 나를 인정하기 싫어서 나도 어떤 친구와 단절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느니 친구를 보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까지가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이 더 심해지기도 했어요. 세상에는 타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더 수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나를 더 생각하자가 아니라 타인과 내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더 집요한 더더 집요한 인식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걸 더 파고 들면....

나는 나라는 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생각해요. 친구한테는 좀 더 관대해지잖아요?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내게 하는 말이 될 때도 있습니다. 관계는 유한하지만 나와의 관계는 살아있는 한은 계속되니까요. 잘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우끼 2023-07-14 18:00   좋아요 1 | URL
앗 저도 그 책 읽었어요 ㅎㅎ 결말부분은 조금 허탈했지만요 ㅎㅎ 분류는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타인과 내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집요한 인식 ㅜㅠ 이 말씀에 정말 공감 도장 꽝꽝 찍고 갑니다. 나라는 친구 사귀고 있다는 표현에도요!! ㅠㅠ 저도 그렇게 정리했거든요 ㅎㅎ잘 지내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난티나무 2023-07-14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 2222222

우끼 2023-07-14 17: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난티님!! 저두 항상 난티님 글 잘 읽고 있어요 ㅎㅎ
 














역자서문 

"근대와 근대적 인간은 주지하다시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기호를 달고 탄생하였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인간과 지구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작위성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서술할 수 없는 신을 배제하면 모든 관심이 우리가 알 수 있고, 만들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집중된다. 이런 관점에서 근데의 이데올로기는 '가능한 것은 만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근대인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 전체주의의 핵심적인 체계는 전체주의적 정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p31-32


인간의 삶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인간조건을 파괴하는 기술의 근본악을 이해할 수 있는가? p34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 생명, 세계성, 다원성(신판:다수성)을 인간 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탄생성과 사멸성은 이들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p35-36


전체주의는 그것이 정치적이든 기술적이든 간에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떄문에 궁극적으로 수단만을 영구화할 뿐이다. 목적이 없으면 시작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인간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창조라는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p36


정신은 본래 신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을 추구하는 자기애는 이미 올바른 이웃사랑과 동시에 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한편으로는 인간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신을 추구할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정신을 추구할 때에만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거부하는 어떤 완전성의 추구도 결국은 탄생성의 조건을 스스로 파괴하기에,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이 유한한 세계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행위양식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다. p37


노동이 인간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라 다른 여러 활동양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탄생성의 회복은 인간조건에 대한 성찰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나치의 전체주의를 겪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에게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줄 '공통의 공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단언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를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적 활동을 제외하고 신체적 활동(Vita activa)을 '노동', '작업', '행위'로 범주화하여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철학적 인간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나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유하지 않음'과 실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진단한다.p38-39



언제부터 할 수 없다는 느낌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면의 나와 화해하지 못한 채로 결국 스스로 내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봄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느낌을 존중하지 않기로 하고 나를 최대한 갈아넣었다. 노력의 결과물을 얻지 못한 채로 건강만 망친 채로 살던 와중에, 돌봄을 행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에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그는 마땅한 직업도 가지지 못할 나이부터 돌봄을 시작하여, 늘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빚을 지다가, 그의 돌봄을 받던 사람의 허락 하에 생명유지장치를 껐고, 그떄문에 살인죄로 재판장에 섰다. 그 기사를 보고, 그것이 내 미래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내내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설령 그게 내 미래가 되지 않더라도, 그 일을 겪어야만 했던 그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했나. 그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서 죽였겠는지. 그는 그 순간에 이미 몇 년을 미친 상태로 버텼는데. 그리고 사법부가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누구도 그를 그 순간까지 도울 수 없었는지. 왜 우리에겐 돌봄을 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왜 돌봄이 오롯이 개인의 몫이기만 한 것인지. 
















기후정의라는 책을 쓴 저자가 쓴 서문이 어렴풋이 기억났고, 여기 적기 위해서 찾아보았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자신은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않는다고, 애를 써야겠지만, 자신할 수 없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강연을 하고 나서, 자신의 강연을 듣던 청소년의 눈을 보게 되었다고. 그제서야, 아, 자신이 잘못하고 있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겁을 줘서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다 생각했던지, '기후우울증'을 배설하고 있었던 것인지. 무슨 권리로 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일지 싶었고, 그 이후로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합류하여 사회운동을 했다고 했다. 나는 요즘에야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 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기후우울증을 배설하지만, 이것이 널리 퍼지기를 바라지는 못했다. 같이 우울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아예 기후위기가 아무 일도 아니라 여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그냥 내가 너무 우울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사람을 만나기에 적절하지는 않았다는 걸 나도 알아서, 공감했던 것 같다. 

나는 내내 기후우울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매일 기후위기를 느끼기 이전에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를 본 이후에는 동물을 먹는다는 사실에 우울했고, 안티 페미니즘 사태와, N번방 사태를 맞닥뜨린 이후에는 그에 관한 우울을 앓고 있었다. 내내 우울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내가 우울한 사람이라 우울을 끌어들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 사건들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는 내 우울을 감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내 기후우울증을 전시했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무엇을 해야할 지 갈피를 못잡던 사람이었다. 

내가 몇년 전에 살던 곳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쓰레기를 하루만에 배출했는데, 대부분이 배달음식쓰레기였다. 아무도 그릇을 씻어서 내놓지 않고, 음식물과 분리하지 않고 배출했으며, 매일 플라스틱 컵을 새롭게 버렸다. 분리수거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하루만에 몇봉투의 쓰레기가 쏟아졌다. 그곳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매립장이 곧 찬다는 뉴스를 보았고, 배달음식 쓰레기를 수거하다 과로하는 청소노동자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뉴스를 보았다. 또 생분해 컵이 친환경이려면 이것을 6개월간 특정 온도를 유지하며 묻을 장소가 필요한데, 그런 처리를 위한 시설이 또 필요한데 국내에는 없으며, 그냥 매장시에는 플라스틱과 같이 썩지 않아서, 결론적으로 순환할 겨를도 없다는 뉴스도 보았다. 나는 쓰레기를 마구 양산하는 행동이 미웠다. 왜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에, 어떤 생물들은 먹이가 아닌 것을 먹고 죽어야 하는 건가 싶어졌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내가 느끼는 심각성을 같이 이야기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담스럽다는 말과 함꼐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쓰레기를 계속 많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고 언제까지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문제인데. 왜 나만 노력하는 건지. 내가 이들을 질투하여, 이렇게 편하게 쓰레기를 버리며 사는 것을 질투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 무렵부터 누군가와 이와 관해 대화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신뢰하는 사람이 점차 줄었다. 사람을 믿지 않았다. 편리함 앞에서는 공동의 책임도 무시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그 무렵 하던 일을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성과가 잘 나오지 않았는데 몸이 버텨주지 않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어차피 우울할 거, 무엇이든 해보자 싶어서, 체제전환과 기후정의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강연을, 반쯤은 냉소하면서 들으러 갔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간 것이었고. 나는 거기서 강의 중반부부터 눈물을 쏟았다. 지금와서 기억나는 건 많지 않다. 광물을 캐기 위하여 파헤쳐진 땅. 거기 남은 거대한 구멍. 돈을 벌기 위해서 하나둘씩,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던 도덕성을 철회하고, 그 이후로 자연이 얼마나 많이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는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어떻게 수탈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수탈당하고 있는지.  기후위기로 인한 가뭄과 홍수가 어떻게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지. 그리고 이윽고, 에너지 및 식량을 통해서 사람을 종속시켜 돈을 벌려고, 우리 삶의 필수품까지 수탈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들었다. 
이전에도 거대종자회사에서 1년만 생산할 수 있는 종자를 매년 비싸게 판매한다고 농사짓는 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한국 어딘가에 설치된 태양광발전에 해외자본이 투자되었으며, 이윤이 나지 않으면 이 자본을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그렇게 되면, 여기서 나는 이윤 이상으로 빚이 나면, 한국정부가 우리 세금을 또 빚 갚는데 써야 하는 형국이 될 수 있단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이 사람은 진짜 체제전환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구나. 깨달았다. 우리의 문제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연자에게는 다가가지 않았다. 무엇이든 하려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무서워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토록 절박한 까닭에,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다가가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이미 행동하는 사람은 나를 비난할까봐 믿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미워했다. 사람 자체가 미운 게 아니고, 행동이 미웠다. 그렇지만 그게 구별되어 표현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아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면서,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4.14 기후정의파업을 설명한다는 사람의 강연을 들으러 간 건 또 울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의무감으로. 함꼐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 운동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를 밀어넣어서,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다른 동력을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꿀벌이 노동하는 시기와 올해 꽃이 피는 시기와 겹치지 않을 수 있어서, 꿀벌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였을까. 삼척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화력발전소를 없애야 한다고, 자신의 일터를 없애고, 그들 자신에게도 일자리를 마련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뤄야 한다는 마음으로 4.14 기후정의파업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였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간헐적으로 울고 있었지만 울컥 눈물이 터져나왔을 때가 기억난다. 2021년 선진국 국가 17개국을 대상으로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가족인데 한국만 물질적 풍요로 답했다고 했다. 강연자가 이게 한국인이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이 하나도 없어서, 물질적 풍요로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서 그런거라고. 공공재로, 기본재로 있어야 하는 게 전부 사유화되고, 경쟁체제로 내몰렸기 떄문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마스크에 눈물이 흡수되었고, 나를 굳이 보고 뭐라 할 사람이 없었어서, 그냥 울고 있었다. 그리고 강연자는 말했다. 개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투자자본으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것을 막는게 더 중요하다고. 개인이 발생시킬 수 있는 이산화탄소는 한계가 있지만 거대자본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는 한계가 없다고. 그래서 이 기후위기 시대에, 금융기업,포스코,두산 등 대기업들이 투자한 석탄화력발전소가 새로 지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이들이 핵발전소, 육식산업, 생명자본주의에 투자할 때,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것이라 절대 감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들에게 책임을 묻게 해야 한다고. 이번에 민간에서는 에너지 비용이 상승했는데, 거대 투자기업들은 횡재세도 내지 않고 이익을 취득하지 않았느냐고. 내내 공기업이 적자라고 말하는 내막에는, 주주배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당신은 아직 희망을 믿는다고. 행동하면 그게 당신의 말이 되고, 설득력이 생긴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화를 내기만 했지, 믿고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누구든지 속도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가지지 않았다. 현실을 보고 절망할 때면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후붕괴의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되려고 그들이 노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산화탄소는 대기중에 100년 유지되고, 메탄은 25년이니, 우리는 지난 세기의 이산화탄소와 우리가 현재 내뿜은 이산화탄소의 총체로 현재를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할 행동이 누적되어 미래세대의 대기환경이 결정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넷제로. 즉 탄소 중립이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표를 마주하고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멈추지 않을 테니까. 이것은 불가능해보이지만, 사회가 경쟁체제로 가지 않으면, 산업부문의 에너지를 확 줄일 수 있으니 가능할 수 있다고. 그러니,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가능해지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모두 실어서, 반자본 대정부 투쟁으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려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 어떻게 어그러질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배우고 싶다. 


 지금 당장 완벽할 것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건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운 전체주의적 태도였다. 내내 할 수 없다 여긴 걸 스스로에게 강요해왔고, 그걸 마찬가지로 타인을 대할 떄도 그렇게 행동한 거다. 그러니 타인을 대할 떄도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 나도 변하는 존재고, 타인도 변하는 존재니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나는 긍정적으로 아직은 변화가능하다고 믿고. 그 방향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행동해보고 싶었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긍정적인 나비효과가 되기를. 우리 자신을 살리기를. 이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나는 나를 초월한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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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5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26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0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4-13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점심 먹다가 또 눈물 닦네요;;;
우끼 님 페이퍼는 점심 먹다가 저 눈물 닦는 용....?

- 2023-04-13 13:22   좋아요 1 | URL
내 글도 읽다가 울어줄래요?

잠자냥 2023-04-13 14:10   좋아요 1 | URL
미안해 그런 적이 없었어.......
도리어 최근에 쟝 페이퍼에 단 내 댓글 보고 울컥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끼 님이 위로받았다는 그 댓글) ㅋㅋㅋㅋㅋㅋㅋ

- 2023-04-13 14:28   좋아요 2 | URL
자신에게 울컥하는 냥 ㅋㅋㅋㅋ

우끼 2023-04-13 22:27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과 다락방님, 공쟝쟝님 대디님 등등 서재에 계신 분들 덕분에 쓸 수 있던 리뷰입니다 ㅜㅜ ㅋㅋ 사실 저번에 시집 리뷰에 달아주신 댓글 보고 울컥했거든요 .. 감사하기도 하구요. 열려있으려는 노력을 해야하는구나 생각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그래야할 이유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