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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글의 제목은 이상의 시 '절벽'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얼마 전에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의 작품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 여행의 초반부에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만, 아버지를 찾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중인 그 순간만이 희망이다. 그 희망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은 없다. 어떤 사건도 길을 막지 못한다.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찾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너는 네 문제로 우리를 따분하게 만들고 있어. 너는 살아 있잖아. 그걸 복으로 알고 살아.” 127p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에게 안도했는데,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로에게서 확인받고, 살아있음 그 자체에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과거를 잊은 척 하며, 과거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망명자들은 각자의 치열한 삶을 버텨나간다. 살기 위해 망명해온 망명자들이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그 가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중요성을 잃은 것처럼 산다. 하지만 그들은 산다는 행위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았는가?’ 사는 행위 자체에만 의미부여를 하다가 그들의 존재가치를 묻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낙천적인 세계’인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만들어 서로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했는데, 그렇게 부여한 의미가 그들의 과거에 의해, 과거가 쌓아올린 그 자신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잔인하다.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음식을 나누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그들은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들은 그 안에서 어떤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환희에 가득 차 있었는데, 자신이 마주한 사건의 진실 앞에서는 ’돌이킬 수 없다.’ 진실을 마주하고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정확히 말하면 살기 위해 잊을 수 없었던) ‘안개 속의 풍경’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 이야기를 미셀이라는 화자를 내세워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건이 미셀과 미셀의 가족에게 어떻게 투영되어 일어나는지 맞물려 보여주면서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미셀은 호기심때문에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을 만나고, 그 이후로 자신이 겪는 사건들을 그 사람들에게 상담하면서 그 사람들과 우정을 다져간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클럽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셀의 가족 역시 역사적인 배경이 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역할이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양 그렇게 산다. 그렇기에 미셀의 가족도 좌충우돌을 겪는다. 살던 대로 사는 방식을 고수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어떤 조화점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일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재단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서, 그 조화점을 찾으려면 역사를 벗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환경 안에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졌는데, 자신의 어떤 경향이 환경 탓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애초, 그것은 쉬운 일이었던 적은 없다. 알아도 얼마나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 지 모르겠다. 그것을 뒤집는 일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뒤집는 일이고, 그것은 자신이 실존하는 일일 수 있지만 동시에 실존하지 못한다는 위험에 스스로를 빠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준거기준이 없이 인간이 어떻게 정상적인 사고활동을,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생명 그 자체, 공동체가 모든 것을 지탱하고 서서 개개인을 지탱해주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은 개인을 스스로가 지탱해야 한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고군분투해야 한다. 실존하고 있다는 감각이 살아있음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을 스스로, 혼자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은 욕구는 늘 존재하지만, 그런 복잡한 와중에 나 자신을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는 걸까?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근거를 무너뜨려가면서까지 나 자신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일은 이 사회를 파악하는 일이고, 그건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혼자’ 찾아야 한다. 서로의 이익은 상충되고 살기에 급급하여 내가 정말 여기 존재하고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겨를 조차 없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지탱할 ’희망’이 없다. 환상이 없다. 그저 나에게 그것이 너의 실존이야 라고 지칭된 어떤 명분들을 마치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는 양 받아들인다. 그 명분 안에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도 없고, 공동체를 지탱해야 겠다는 믿음도 없이 오직 ‘나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나 자신을 먹여살리는 것 자체도 공동체가 지탱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건데, 마치 별개인 양. 이미 주어진 명분만을 고스란히 따른다. 마치 미셀의 가족처럼.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거나,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늘 불안에 시달리는 스스로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진짜 명분이 뭔지 왜 사는지 늘 고민하지만 밥벌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 고민에 치여 제대로 사는 법을 잘 모르겠다. 알았다가도 금새 잊어버린다. 오래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나에게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은 , 건강한 공동체를 꿈꾸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남을 제한하지 않는 건강한 도덕적 규율 안에서 사는 것이지만, 도대체 그 추상적인 낱말이 가리키는 실재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실재를 알지 못해 알려고 노력한다. 사는 대로 살지 않으려고, 역사가 나에게 준 명분대로 살지 않으려고, 나 자신의 실존을 굳건하게 사는 동안만큼은 지키고 살려고 노력한다. 


공산주의의 선의를 믿었던 낙천주의자, 샤르트르는 까뮈가 교통사고로 죽은 지 며칠 지난 후 이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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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와 나는 사이가 틀어져 있었다. 사이가 틀어진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고- 설령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작고 좁다란 세계에서 서로 멀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따름이다. 그와 사이가 나쁘다 해도 나는 그를 생각했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 그의 시선을 의식했으며, ‘이것을 두고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지금 이 순간 그는 무어라고 말할까?’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 고집스런 인도주의, 좁고 순수하며 엄격하고도 관능적인 그 인도주의 때문에 그는 이 시대의 거창하고 기이한 사건들에 맞서 의심스런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는 완강한 거부를 통해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에 맞서, 현실주의의 황금 송아지에 맞서, 도덕적인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해주었다......”166p

 

비록 소설의 결말은 ‘구제불능낙천주의자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흩어져 버리는 것으로 났다. 그건 아마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건강한 규칙, 혹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일까. 살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자신을 반성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결론으로 끝나도 좋은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어떤 ‘희망’을 찾는 일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희망’은 찾는 행위 그 자체로 ‘희망’이기 때문이고, 그 희망은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찾는 것이라 믿는다. 살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이 지켜지고, 서로를 믿을 수 있고, 서로 의견이 갈라서더라도 ‘사랑’이라는 믿음 아래서 결국 “이 작고 좁다란 세계에서 멀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방식”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성능력을 지나치게 활용하면, 모든 일을 판가름하려고 한다. 판가름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도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좋았는데, 그가 쓴 소설에는 그가 쓰지 않은 것도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능력으로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 감성적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조화점을 찾은 게 아닐까. 그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희망’을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조화점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작가의 가치판단이 지나치게 개입되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였고, 그 사이사이 들어있는 진실들이 너무 좋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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