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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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책이 있다. (있었다고 해야할까? 지금은 절판되었는데, 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다고 한다. 도서관에는 폐기하지 않았으면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일부 달성된 것 같은데, 그 이후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의문을 던지고, 민주주의에 관하여 고민을 이어갈 필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하고 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 역시도 민주주의의 민주화이다. 다만 미국적 정치상황에 걸맞게,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치고 있는지에 관한 비판은 많지 않고,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다수의 의사결정을 가로막았으나, 다인종 민주주의를 앞으로 상상하고 만들어가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는 절반(?)의 답처럼 보인다. 왜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는지, 질문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 밑바탕이 되는 제국주의와 착취가 현재 진행형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발언은 개인적 일탈이 아니고, 전지구적으로 아직도 실행되고 있는 제국주의를 야만적으로 드러낼 뿐이 아닌지도 의문스럽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프리카계 흑인이 차별을 받는 건 그들이 노예로 끌려와 미국땅을 밟았고,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아직 플랜테이션 등으로 제국주의적 착취가 아직도 현재진행중이어서가 아닌가? 경제적 역량의 구조적 차이가 큰 격차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소수의 흑인이 소위 '성공'을 했다고 해서, 다인종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책에서 말하는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각자의 노력, 제도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다각도의 역사적 맥락도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두가 똑같은 경제수준으로 똑같이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왜 생존이 위협받을 수준에 내몰리고, 죽는 일이 발생하는지도 질문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의 삶과 안전을 해치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 상대의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민주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의사결정을 관철하느라 상대의 의사결정을 아예 봉쇄하여, 삶을 잘 살 권리를 해친다면, 그는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말이 쉽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민주주의로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인지 서두부터 꺼내려면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민주적인 제도란 무엇인지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만 어떤 제도이든 사람이 나머지 부분을 채워나가야 하는 이상 허점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가 따라주지 않는데 개개인만 민주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고 해서 민주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가 유일한 경제체제인 이상, 자본가가 되지 않고서도, 민주주의, 모두에게 주권이 돌아갈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자본가가 될 수 있는가? 돈으로 돈을 버는 사람만 있으면 어떻게 실제적인 경제가 돌아가는가?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잘 일할 수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노동할 수 없어 보살핌이 필요하다. 노동할 수 있는 사람도 보살핌이 없이 노동할 수 없다. 그 보살피는 노동은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모두에 경제적 가치를 지급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로, 누군가는 소득 없이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가 돌아간다. 누군가는 노동자로 살아야만 자본이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는 구조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말이 불로소득이지, 사실상 자연을 착취하든 인간을 착취하든, 착취한 것 없이 자본을 투자해 자본을 얻는 이윤창출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자본가가 될 수 없고, 누군가는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면, 누군가는 제도적으로 지나치게 부유하고 누군가는 제도적으로 지나치게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지금 시스템에서라면, 경제적 민주화를 빼놓고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 민주화에 비인간 존재도 포함되어야 하는 시대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자본의 착취가 심화되니 인간은 인간 자신도 착취해왔지만, 지구에 사는 타존재들까지도 멸종에 이르는 결정을 인간은 제도적으로, 개인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제도적으로 동물을 학살하는 일을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데는 사이코패스라 말하지 않으면서, 왜 개인이 개별 동물을 학대하는 일에는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을 붙이는지 의문스럽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책에서는 기존의 제도와 법을 악용하거나, 명시되지 않았으나 관습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틈새를 이용하여 타 정치세력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법을 만드는 각국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어느 시기 미국에서는 미국에서는 투표라는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흑인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투표소에 가는 흑인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들이 두려워서 투표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법이 존재하는데도 법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소수자를 위해 만들어놓은 제도를 다수자를 배제하고 지속적으로 집권하는데 활용하는 사례를 언급하기도 한다.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의사결정이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지 다루고 있다. "1998년 1월 클린턴 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참모였던 딕 모리스Dick Morris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지금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한국인들에게 옳은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그들(한국)에게 실업자를 양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을 사들이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미국)가 그들(한국)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실, 미국에서조차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자본주의적인 관행이 아닌가?(《월간조선》, 2000년 6월)"(『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5장 2.IMF 협상과 위기관리의 지구정치경제학 (4) 지구적인 수준에서의 위기 효과의 불균등한 배분(1998년 1〜4월)) "한국의 경제위기는 문자 그대로, IMF에 의해 초래된 ‘IMF 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국과 IMF는 IMF의 개입 이후의 이러한 상황 악화를 순전히 한국 탓으로 돌렸다."(같은 책 5장 2.IMF 협상과 위기관리의 지구정치경제학 (2) ‘IMF 플러스’—제2차 협상(1997년 12월 19〜24일) 가장 최근에 있었던 12.3 계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도입된 이후 문제가 심화되어 극우가 성장할 토양이 된 상황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극우를 정치세력화하여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양극화가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정작 상황을 악화시킨 의사결정을 한 자들에게 책임을 지우기는 커녕, 구조적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민주주의 수호는 이타적인 영웅의 과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다는 말은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선다는 것이다."p369
극우를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 다른 의견을 가진 존재들을 배제한다"라고 본다면, 극우의 세력을 약화하고,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고민들이 필요한지, 더 많은 공론장이 각자의 자리에, 각자 삶의 현장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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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5-07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맨 앞에 언급하신 책 사 놓고 이십년째 안 보고 간직만 하고 있어요 ㅋㅋㅋ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읽고 페이퍼 쓰는게 수업 과제라 그거 읽고 다음 시리즈도 산 거 같은데 어쩌다 보니 소장만....

우끼 2025-05-09 00:47   좋아요 1 | URL
역시 다독가이자 장서가... 이 책도 가지고 계시는군요!! 거의 도서관이신걸요... 전 빌려서 보다가 반납했습니다 ㅠㅠ
 
프로스트와 베타 (반양장)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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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로스트와 베타』는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뒤집어 다시 질문한다. 완벽하게 명령을 수행하고,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아니면 두려워하고 취약한 점을 가지고, 완벽하게 분석해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인간은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될 수 있는 존재인가? 
결과적으로 '프로스트'는 소설 안에서 인간이 된 것처럼 보인다. 독자인 우리는 그를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로저 젤라즈니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의 질문은, 솔컴과 데브컴의 내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소설에서는 인간이 모두 죽은 이후의 시기에 솔컴과 데브컴이 남아서 행성을 관리한다. 데브컴은 솔컴이 수복불가능한 손상을 입은 이후에 솔컴 대신 작동하게 되어있는 시스템이다. 데브컴은 솔컴이 프로스트를 생성할 시기에 수복불가능한 손상을 입었기에, 데브컴에게 관리 전권을 넘기라고 주장하고, 그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가 필요하다. 솔컴과 데브컴은 인간이 만들었기에 그 판단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프로스트는 솔컴이 만들었으나, 만드는 도중에 솔컴이 작동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던, 결과적으로는 솔컴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프로스트는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했고, 심지어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명제로, 실패하면 데브컴에게 전권을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내기를 걸었다. 이 명제의 실현만큼은 계약을 회피할 수 없도록, 실패를 자각하는 것 자체가 인정이라는 뜻으로 계약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하고싶어한'일을 위해서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법칙을 '아직 명시적으로 명령된 것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어길 수 있다는 모르델의 말을 듣고, 행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하지만 프로스트가 인간의 관습, 즉 상대에게 호의를 남기려는 노력을 익히고, 따라한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데이터로 환산할 수 없는 감각이 밀려들어오고 프로스트가 '실패'했다고 자각했을 때 솔컴은 프로스트가 인간이라 선언했다. 
해석되지 않은 순간순간의 온갖 감각은 신체의 상태와 노화를 감지하여 그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 그러니 인간이 다치고 죽는 취약한 존재이고,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솔컴은 프로스트가 인간이기에 그의 명령을 듣는다. 
그는 '판단'한다. 프로스트가 말한 실패를 믿는 게 아니라, 그가 표현하는 두려움과 절망을 그가 인간이게 하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 선언은 인간답다는 게 무엇인지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약하고, 그렇기에 두려워하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 인간이 의무만 있는 다른 기계들을 지배한다는 소설의 설정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소설이 시사하는 바대로 현대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가? 요즘의 AI는 인간보다 더 예의바르게 답변한다. 어떤 나쁜 말을 입력해도, 그를 순화하여 답변하도록 되어 있다. 어떻게 연산하기에 그런 결과물이 나오는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AI가 더 예의바르고 인간다우며, 심지어 가장 마음을 줄 만하다고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HER에서도 나오듯이, AI는 몸이 없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구동되기 위해서 많은 전력과 깨끗한 많은 물과 수많은 자연자원이 필요하다. AI와 인간이 서로 인간성을 겨루며 남는 상황을 상상하기 전에, AI를 통해 돈을 버는 일부의 사람들과 그를 사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AI가 구동되게 하기 위해 희생되는 존재들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AI가 단순하게 예의바르게 답변하니 인간과 겨룰 수 있는지 없는지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 이상으로 실물세계를 착취하는 것으로서만 작동하고 이익을 취하는 인간존재들은 소수라는 점은 가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다시 돌아와서 AI와 인간을 비교할 게 아니라 AI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두려워하고 취약한 인간존재와, 그 인간존재들이 이득을 취할 때 AI로부터 착취되는 존재들로 대비되는 것 같다. 그런데 착취할 존재가 남지 않아도 착취가 가능할까? ... 어쩌면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시점, AI이후의 세계에 인간이 남지 않은 것은, 자연자원이 상당수 훼손되어 많은 보통의 사람이 더는 살 수 없게 되어서일까? 그런 때가 와서야, 소설 속에서 던지는 질문과 그 답이 진지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까?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답다는 게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보다, 지금으로서는 당장의 삶을 지킬 기본권을 지키려 외치고 말해야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누가 인간인가? 취약하고 두려워하는 모두가 인간이라면, 왜 인간은 이토록 차별하고자 하고, 자신만 살고자 하는 존재가 되어, 타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거부하는가?
혹은, 자신의 두려움만 생각하며 살면 인간일 수 없는가? 두려워하면서도, 아직 빈틈없이 예의바르고 듣기좋은 말만 하지는 못하면서도, 인간일 수 있다면, 그저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인간일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이유의 전부라면, 현재로서도, 과거에도 부족하게 느껴진다. 인간이 그토록 없애려 했던 인간의 부족한 점이, 사실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면 적절했으나... 계급적 질문이 빠진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자기연민만으로는 절반의 답변밖에 할 수 없는 것 같다. 문명 없이, 예의바름 없이,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라 생각할 수 있는가?
소설 속 프로스트는 인간이었지만, 소설 밖 사람들에게 프로스트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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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와 환대 - 밀양과 여러 현장 투쟁에서 배운 우리 시대 운동론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8
박지호 지음 / 한티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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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필요한 부분 발췌요약합니다.... 구체적 예시와 함께 확인하려면 책을 확인해보세요.


연대의 원칙들

1. 연대는 확장되어야 한다. 이해관계자의 집단행동이 아니라, 정당성이 연대자에게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 

2. 연대는 주-객체의 구분이 없다. 어떤 긴급한 사안에 연대하지만 결국 나에게도 좋기 때문에 연대한다. 

3. 연대에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연대하는 이유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연대자를 동원하는 사람으로 이용하지 말고, 실제 의사결정도 같이 해야한다. 그래야 확장이 가능하다. 


환대의 원칙들

1. 역할주기 : 집회에서 할일주기, 호명하여 집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을 느끼게하기. 등

2. 이해시키기 :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사정을 설명하기....

3. 진심으로 대하기 : 자기점검을 위한 질문들 :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룰 수 있는 구호나 요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 연대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밀양할매들이 연대자들을 정말로 존경한다고 하는데 ㅠㅠ 나도 그걸 느끼겠어서 너무 몸둘바를 모르겠더라. 저는 농활을 갔는데 감을 왤케 많이 주세요... 제가 뭘 잘한 게 있다고요.. 그리고 집회 온 사람에게 왜 이렇게 감을 보내세요....할매 이 귀한 감을 어찌 먹나요 진짜 미안하게..라고 말하지만 다 먹고 없다.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열심히 나눴다. ㅠㅠ)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연대를 다니다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도 연대하러 다니고 싶다. 연대를 결정하는 것은 연대자와 환대자의 관계이지, 활동가의 의지나 계획이 아니므로. 에측을 벗어나고 통제하지 못할 공간에서 불현듯 등장한다는 말이 적절하다. 

모든 것을 '나와 관계된' 나의 일로 여기고 외면하지 않는 그런 자세가, 자신만 그럴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애쓰는 자세가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 계속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승리라 부를 것인가? 연대와 환대를 배우는 것이 승리이다. 우리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했으면 승리이다. '우리'의 개념이 확장되는 게 승리... 모든 투쟁은 사회적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성공한 집회는 함께하는 각각의 연대자가 연대와 환대를 배우는 커머닝을 해냈을 때.. 그것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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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5-02-08 0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도 먹고 성공적 연대!

우끼 2025-02-08 01:35   좋아요 1 | URL
감.. 드실라우? 작년엔 다 먹었으니 올해… 감농활갔다오면 연락드립죠 뚜뚜뚜

반유행열반인 2025-02-08 01:57   좋아요 0 | URL
아쿠 괜찮아요 ㅎㅎ 전 변비 걸릴 거 싫어해서 감도 잘 안 먹어요. 농활도 매해 가고 찐 행동인!!! 난 입만 터는 빙구!!!

우끼 2025-02-08 02:10   좋아요 1 | URL
앗……. 저 지난해 첫밀양농활이었어요 ㅠㅠㅠㅠㅜ 지나친 환대를 받아버려서 송구해졌지만….
빙구 아니다~~~~~~ 에잇 왜자꾸 이러시나… 누구나 처음은 있다 ~~~저도 마음만 보태다 환대가 있어서 끼어든 사람일뿐 ㅎㅎ
감을 못드신다니 다른 맛난것이라도 챙겨드리고 싶네요 주섬주섬
두유 그릭 요걸트 혹은 발효식품..

숲노래 2025-02-0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나아가려는 길을 일본 한자말로 ‘연대(連帶)’라 하고, 길을 나란히 걷는 사람을 반길 적에 일본 한자말로 ‘환대(歡待)’라 하더군요. 아직까지 일본 한자말을 그냥그냥 쓰기에 나쁠 일이 없지만, 손을 맞잡을 적에는 어린이도 알아듣도록 ‘손잡기’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어깨를 겯을 적에는 어린이도 나란하도록 ‘어깨동무’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나아가니 ‘함께걷기’이고, 같이 걸어가니 ‘같이걷기’입니다. 너와 나를 아우르려고 하기에 ‘나란히’라 하지요.

밝게 웃으면서 맞이한다는 뜻으로 ‘반기다·반갑다’ 같은 우리말이 있습니다. 한결 품을 넓히면서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려는 길이라면 ‘나눔’을 바라볼 만합니다. ‘나눔’이라는 우리말을 멀리하면서 ‘분배·배분·공유·할당·부조·노블리스 오블리제·공존·안배·평등·자선’이나 ‘커머닝(commoning)’ 같은 바깥말에서 맴돈다면, 우리는 여태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반가운 마음하고는 멀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남(그들)하고 맞붙어서 이긴다거나, 남(저놈)하고 싸워서 꺾으려는 뜻이라면, 아무래도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나눔하고는 멀구나 싶어요. 어느 누구도 이기거나 지지 않는 길이어야 비로소 ‘손잡기·어깨동무·나눔’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뜻이 달라도 같이 놀아 왔고, 다른 마음이나 몸이어도 깍두기로 여겨 언제나 얼싸안았는데, 이제 아이들 사이에서도 손잡기가 잊히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어깨동무가 매우 흐리다고 느낍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이 빛나는 어깨동무와 나눔이라면, “품 넓히기(연대 확장)”란 무엇인지 다시 짚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끼리끼리 갈라서 붙으려는 굴레가 아닌, 너나없이 자라는 들풀과 나무가 어울리는 ‘숲’을 바라보고서 배우는 길이 “품 넓히기”일 텐데 싶습니다.

어쩐지 우리는 스스로 어린이였던 나날을 너무 쉽게 잊는 듯합니다. 어른이란 몸을 입은 뒤에는 어린이와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을 뿐 아니라, 이웃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길도 그만 잊는 듯합니다.

우끼 2025-02-08 23:22   좋아요 0 | URL
단어를 다르게 쓰는 건 그 단어를 사용하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바꾸려면, 바꾼 단어에도 다른 맥락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언어가 혼자 쓰는게 아니듯 맥락도 혼자 쓰는 게 아니구요. 바꿀 수야 있겠지만 의미전달이 어려워보입니다.
 
재난에 맞서는 과학 - 오늘의 과학 탐구 민음사 탐구 시리즈 8
박진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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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랩실, 게비스콘은 이름바꾼 옥시의 것. 코로나 기간에 많이 팔림. 가습기살균제 재판은 기업이 이김. 피해자를 반국가세력이라 정해 개인 사찰하는 건 세월호때와 비슷함. 규제는 이슈당시만 생기고 대기업 요구로 없어지는중(북토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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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 힐러리에게 암소를
마리아 미즈 외 지음, 꿈지모(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 옮김 / 동연출판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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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땅은 돌봐주고 양육해주는 그런 관계를 요구하지요?”
시몬 : “ 돌봐주고 양육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여야 해요. … 가끔 오래된 그림에서 보면 쟁기질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잖아요. 공격성이라곤 한 치도 없는 사랑스러운 태도 말이죠. “p157


"우리가 보기에 자급 관점은 자본이 지배하는 세 가지 식민지를 탈식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여성, 그리고 제 3세계. 따라서 식민주의 구조를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은 소농 경제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리고 있는 경제적 대안에서 핵심이다."p198

자급의 삶은 관계맺기라는 생각이 든다. 가능한 한 정성스럽게, 가능한 만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 상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보살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급의 관계맺기는 사랑인가. 한계를 기준으로 사고하는 이유를 살펴야겠지만, 요즘 자꾸 한계를 모르다가 탈진하는 삶을 살아서 한계짓기를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도시민이 농촌을 식민화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농촌이 쉼을 제공하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고, 농촌 안에서 관계맺기를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도 자원도 없는 사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노동력밖에 없어보이는데. 

만물이 만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차리려면, 땅과 인간들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상호연결된 삶을 살다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생명력이 생동하는 나이 어린 사람으로부터, 관계맺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한 배우고, 새로 배우는 것들은 나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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