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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소요리문답 (상) ㅣ 특강 소요리문답
황희상 지음 / 흑곰북스 / 2020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8쪽
"유한이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일하심을 인간의 두뇌에 다 담을 수 없습니다.
109쪽
"창조"의 반대말이 "진화론"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과 창조를 서로 대립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여 서로 비교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화론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일 뿐, 애초에 그 근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발생했다고만 말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진화론이라는 것 자체가, 세상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 게 아니라 생물학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의 전제가 우주 전체를 하나의 계속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은 맞지만, 진화론 자체가 창조를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조의 진짜 반대말을 찾으려면 철학의 영역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론에 반대되는 이론을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오히려 "우연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천문학이나 물리학에서 주로 언급하는 빅뱅 이론은 우주의 시작이 우연히 발생한 어떤 거대한 폭발에서 비롯하여, 그 폭발로부터 모든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는 몇 가지 증거들로 인해 지금은 거의 의심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빅뱅'이 생기게 된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저런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시작을 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실험을 통해 입증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그러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워놓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질 뿐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뺴고 만물의 시초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허무할 뿐입니다.
창조론보다 진화론이 더 과학적이지 않나요?
과학이란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지식의 체계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세상의 시작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아니었습니다. 실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조차 신앙의 힘(?)으로 무조건 무시하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우리는 창조와 과학을 대립된 자리에 놓고 싸우려 합니다. 마치 과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라도 된 것처럼 매도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적힌 내용이 무조건 과학적 사실이라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사실을 기록했지만, 그것 자체로 과학책은 아닙니다. 창조는 본질적으로 신비입니다.
과학과 신앙은 대화해야 합니다. 과학이 교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도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습니다.
114쪽
창조의 때가 있고, 앞으로 이루어질 종말의 때가 있을 뿐입니다. 즉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끝"이란 모든 것이 다 끝장나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러한 허무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영원한 안식을 향한 지향점이 있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과 끝이 있는 세상입니다.
131쪽
우리는 자기의 기분에 따라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나 봐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내 손목을 틀어쥐고 계십니다. 아니, 손목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틀어쥐고 계십니다. 맨 처음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그 사랑의 대상을 '존재'하도록 하시고, 부르시되 인격적인 관계로 부르시고, 지으시되 지음받은 자에게 '굴복'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섭리 가운데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도록 만드시는 그 분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147쪽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스스로 진리입니다. 그 내용과 방식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으며, 또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알맞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든, 없든, 우리 한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 변치 않고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렇게 스스로 증거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대상을 택할 때, 조건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실 때도, 인간의 타락을 미리 다 보시되 더 갈 데 없는 어마어마한 심각한 상태까지 다 보시고, 그래도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일말의 인간적인 의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이 없었습니다.
상급이 무엇입니까? (중략) '내가 너의 상급이다'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정작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는 것을 다 주시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상급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194쪽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왜 당장 없애버리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은 성도를 각별히 생각하시되, 모든 인류에게 일반적인 은혜를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불신자에게는 햇빛을 주지 않거나, 불신자가 지나가면 거기에만 마구 폭우가 쏟아지는 형태로 세상을 다시리시지 않습니다.
273쪽
천국은 왜 좋은 곳인가요? .. 날마다 찬송가나 부르며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니 너무 지루할 것 같은데요?
어린이집에 맡겨진 어린아이가 거기서 놀 때는 장난감 가지고 몰두하고, 다른 아이보다 더 가지고 놀려고 애쓰고, 수집합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친구보다 뭐라도 하나 더 가지려고 땀흘려 다투고 투쟁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 부모가 데리러 오면, 그 순간 그 귀하게 여기던 장난감 다 집어 던져버리고 부모에게 뛰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아이에게 부모가 최고의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시 소요리문답 1문입니다. 천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그 분이 최고로 좋아지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바로 그 아이처럼 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최고의 상급은 하나님이시요,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302쪽
보이는 교회만 보면 답이 안나옵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생각할 때 비로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자는 어떤 환란에도 마치 온 세상에서 교회가 다 없어지는 것 같아 보여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그 보이지 않는 교회의 멤버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코 그 신앙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신앙 생활, 교회 생활, 말씀, 성례, 기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확정된 자의 것이라고 믿을 때, 삶 자체가 달라집니다.
308쪽
내가 꼭 무엇을 '해야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닌데, 자꾸 뭐라도 하려고 드는 것이 종교심인 것 같습니다.
309쪽
성경에는 상급에 대한 말씀들이 나와 있는데, 그것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상급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지금 배우는 중보의 유익들을 가리키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유익들이, 계산적이고 세속적인 상급 개념과 얼마나 다른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331쪽
성화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화는 구원받은 자가 이제 자기 힘으로 거룩해져 가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따라! 효과적인 부르심의 결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입니다. 많은 경우, 칭의나 양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후 성도답게 자라가는 것은 이제 '나에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39쪽
성화는 점진적으로 되는 것인가요? 꾸준히 자라가는 것이 맞나요? 저는 요즘 오히려 퇴보하는 것 같아서요.
맞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으로 보고 자라가는 모습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일이시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성화는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고 열심을 낼 때가 있지만, 늘 '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부모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은 좋지만, 부모님 출퇴근 하실 때마다 늘 울먹이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건 좀 그렇지요? 차분할 때가 더 많은 법입니다.
340-341쪽
대요리문답 79문
문 : "참 신자일지라도 불완전성과 무수한 유혹과 죄들 때문에 은혜의 자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나요?"
답 :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그 분의 작정과 은혜의 약속(궁극적으로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와의 떨어질 수 없는 연합, 그들을 위해 계속되는 중재, 성령, 그들 안에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씨앗으로 인해 참 신자들은 완벽하게, 최종적으로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 받습니다."
대요리문답 80문
문 :참 신자들은 절대 확실하게 확신할 수 있는가?
- 그들이 은혜의 자리에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원을 향해 가는 데 있어 견뎌낼 것임을
답 : 특별한 계시가 없어도, 하나님의 진리의 약속들에 기초한 믿음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자들과 주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걸어가기를 애쓰는 자들은 절대 확실하게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대요리문답 81문
문 : 모든 참 신자들은 항상 확신하게 되는가?
- 지금 이 순간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게 될 것임을
답 : 은혜와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신자들은 확신을 얻기 전에 오랫동안 기다기리도 하고 확신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린 후에도, 확신이 약해지거나 멈출 수 있습니다. 갖가지 불안정함과 죄, 유혹, 황폐한 상태로 인해 그러나 철저한 절망으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지키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조차 사라질 정도로 그들이 버려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344쪽
때때로 확신이 약하거나 없는 것 같다고 해서 나의 구원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의 조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 구원의 확신이 약하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나의 확신이나 간절함, 어떠한 체험이나 그로 인한 감정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에만 근거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사실 하나를 붙잡고, 지금 내 형편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성도는 주님 품 안에서 평안히 거하는 것입니다.
361쪽
그리스도와 연합이 유지된 그 몸도, 안식을 누립니다.
우리가 아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생명이 그친 육체는 이제 분해되어 사라질 뿐입니다. 그런데 소요리문답의 개념으로는 그 몸이 안식을 누린답니다. ..(중략)
죽으면 내 몸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맙시다. 편안히 쉬는 것입니다. 사실 무덤 안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나요? ... 죽음을 생각하면 참 괴롭습니다. 그래서 죽기가 싫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죽음은 이런 공포가 아닙니다. 안식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안식은 또한 한시적인 안식입니다. 영원히 무덤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안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안식은 무덤에서 부활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도 육신을 잘 보존해야 하나요?
육신도 중요하다고 하니까 이것을 너무 극단적으로 오해해서 이상한 미신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세시대에는 시체를 훼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화형제도였습니다. 이 사형 방식에는 사람을 산 채로 태워서 고통스럽게 죽이려는 잔인한 의도도 물론 담겨 있지만, 그것보다도 나중에 부활할 몸이 타서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심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미처 화형을 시키지 못하고 묻힌 경우에는 무덤에서 다시 꺼내서 목을 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몸을 훼손해서 부활 후에도 괴로움을 지속시키려고 한 것인데, 사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믿는 자의 몸이 부활 후에 무슨 손해를 보거나 하지 않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의 대 경기장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사지를 뜯겨 죽으면서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체계적이고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