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풍경은 봄보다 가을이 좋다.
생명이 움트는 시기에 타오를 듯한 생명력을 지닌 젊은이들이 넘실대는 교정은 감정이 격해지는 장소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는 곳이다.  부산스럽다.  때론, '오!'하는 탄성을 남발하며 자신의 감정을 과하게 소비하기도 한다.  뜨거운 입김이 확확 뿜어져 나올 듯한 젊은 날의 열정에 계절이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감정을 가누지 못해 처음 보는 남자의 한 마디 사랑 고백에도 자신의 입술을 내어주고 마는 장소가 바로 봄의 교정이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가을은 오히려 젊음의 열기를 어느 정도 잠재우는 시기이다.
가을을 응시하는 젊은이의 눈에서 쇠락하는 계절의 탓인지 젊음의 철없음은 찾기 어렵다.  치기가 사라진 얼굴은 아름답다.  길지 않은 그들의 삶을 고요히 돌이킬 수 있는 이 귀중한 시간을 젊은날엔 알지 못한다.

얼마 전 한 대학병원으로 친구의 병문안을 갔었다.
대학 교정의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잘게 부서지는 가을 햇살을 바라보았다.  링거줄을 매단 그의 깡마른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설멍한 다리 위에 걸쳐진 헐렁한 병원복이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것도...
괜시리 찔끔거리는 내게 친구는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넨다.  먼 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선연한 피빛 광채의 화살이 물기 어린 내 시선을 뚫고 가슴에 박힌다.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붉은빛의 그라디에이션.  친구의 가슴도 저 노을처럼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어느 순간 막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지나 않을지...

싫다는 나를 잡아 끌고 친구는 가까운 대학건물로 향했다.
주인 없는 빈 건물에는 안으로 굳게 잠긴 강의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어두운 복도에는 괴괴한 적막감이 흘렀다.  친구는 순간 비틀거렸다.  그만 가자며 그의 한쪽 팔을 부축했을 때,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친구는 왜 빈 강의실에 들어가려 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건재하다는 것을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확인 받고 싶었던 것일까?  잠겨진 문을 확인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의 분명한 구획이 그를 절망하게 했던 것일까?
           
마지막 햇살이 붉은색 듬뿍 찍어 푸른 하늘 멀리 길게 사선을 긋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걷는 친구의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누군가 옆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든든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아무런 사심없이 그저 고맙고 감사했던 적이 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 살아 숨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고마운 나이.  이제 그 고개를 향해 묵묵히 걸어야 할 나이가 되었구나.

친구를 병실로 데려다 주고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친구야, 암이라는 무거운 병이 네 발목을 잡더라도 그때처럼 걷는 일은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완서님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읽으면 너는 또 다시 기운을 얻어 보란 듯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지 않을까?
   
 "그냥 은은한 잔광만 남기고 꼴딱 질 적도 있지만 산정에 구름이라도 몇 점 머물러 있으면 기가 막힌 노을을 보여줄 적도 있다. 구름은 부드러운 솜털구름보다는 터치가 힘찬 약간 성난 구름이면 더욱 장관을 보여준다.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온몸을 나사처럼 죄어오다가 순식간에 풀어 준다. 그러고 나면 속은 것처럼,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서럽고 막막해진다.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박완서님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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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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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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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뜨겁게 내리 쬐는 햇살, 그러나 가을 바람은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감질나게 하던 한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초가을의 향수가 마음 가득 안겨오는 주말의 아침.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벌써 한 해가 다 간 듯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버석거리며 밟힐 듯한 낙엽과 과거로 향하는  가을 한낮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꽤나 낯이 익은 문인들의 수필을 읽었다.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는 방민호 교수가 가려 뽑은 것인데,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문인들의 산문 중 지금 읽어도 그 생생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였다고 한다.  가을은 할 말이 많은 계절이다.  가끔 떠오르는 옛친구의 얼굴에서, 지금은 잊혀진 아련한 첫사랑의 미소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샘솟을 듯한 계절.  그 계절의 초입에서 나는 숱한 이야기의 향연에 초대를 받았다.

 "이 산문 선집을 펴내며 글을 고른 기준을 들라면 바로 이 영원한 현재성을 꼽고자 한다.  오늘의 우리가 읽을 때 그 글이 우리 선배들의 글이라는 점 말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막막한 심정을 위로해 주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구성해 가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글이야말로 훌륭한 글이 아니겠는지?  나는 이러한 글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였다."  (P.286)

1920년대부터 해방직후의 근대문학 공간에 발표된 명산문 91편(51명)을 가려 뽑은 「모던수필」은 발표 당시의 판본을 토대로 당대의 명문장가를 비롯 카프계열, 친일계열, 소수파 여성계열 등을 망라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됐는데 첫장에서는 계절과 자연물, 음식 등을 둘째장에서는 문사들이 느끼는 생활자로서의 번민을, 셋째장에서는 문화의 변화를 바라보는 문학인의 시각을, 넷째장에서는 요절한 문인을 추모한 조사와 예술관을 소재로 담았다. 작가연보와 주석이 실려 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글도 일단 국어 교과서에 실리면 가장 재미없는 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거야.  왜 그런고 하니 그 글은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으로서의 자격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심지어 너희들이 즐겨 보는 만화도 교과서에 실리면 재미없다고 느낄걸."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수필의 취지에 걸맞게 정형화된 글쓰기 방식으로는 쉽게 담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생각들을 자유롭고 솔직한 태도로 표명하고 있지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글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재주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암울한 시대에 씌어진 글들이니 그 분위기 또한 그렇겠거니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일상에서 벌어졌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는 등 글은 비교적 경쾌하고 밝다.  특히 노자영의 <오천 원의 꿈>과 엄흥섭의 <탈모주의자>는 시종 웃음을 머금게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대목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만일 기아가 닥쳐든다 하더라도 쥐의 기사(饑死)는 멀리 인간 기사 후에 속한다.  그런 까닭으로인지 식(食)에 복(福)하고 한쪽에서 굶어도 먹을 것이 풍요한 사람은 대개는 쥐 상(狀)으로 보인다."  (김광섭의 <꽃을 먹는 쥐>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현실 정치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금의 세태와 그렇게도 잘 들어맞는지.

그런가 하면 문학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세대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상으로 창작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시 작가에게 있어서 최대의 교훈자요 최후까지의 동반자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 현실을 응시하고 이것과 결리고 여기서 배우고 그 밑에서 얻어내는 바가 없이는 진정한 창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설야의 <고난의 교훈>중에서)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고 김기림 은 예지적이며 정지용은 단소(短小)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强仍)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 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고 저자는 평한다.  그러나 나의 소회로는 그 시대에 씌어진 글들을 읽을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풀 먹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듯, 글의 풍모는 고고한 난초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의 작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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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 무더위가 며칠째 기승을 부린다.
높아진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지평선을 경계로 가을과 여름이 함께 머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오늘도 한낮에는 양산을 받쳐 들고 허위허위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뒤를 무더위에 지친 나른한 권태가 졸졸 뒤쫓는 듯했다.  이따금 건듯건듯 불어오는 바람에 그나마 가을이 멀지 않음을 느낄 뿐이다.

금년 여름에는 산행을 거의 하지 못했다.
까닭인즉 모기 때문인데,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에는 긴소매, 긴바지를 입고 모기떼에 대항했으나 모기보다 무서운 것은 더위였다.  산행을 하고 땀을 한 바가지쯤 흘리고 나면 제풀에 제가 쓰러지는 격으로 아침부터 피곤이 몰려오곤 했다.  그래서 산 대신에 다른 운동 장소로 선택한 곳이 근처의 체육공원이었다.  가운데 축구장만한 잔디밭이 있고, 바깥에는 650m의 트랙과 여러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딴에는 흡족하였다.  더군다나 반바지,반소매 차림에도 모기에 물리지 않으니 그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내가 그 공원으로 아침운동을 나가면서부터 내가 가르치는 아이 중 한 학생이 자신의 아버지를 대동하고 아침운동을 나왔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나와 동갑으로 평소에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라 그 또한 좋았다.  방학 기간에는 새벽 6시에 나가 1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조촐한 아침 식사를 하여도 그리 서두르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개학을 하자 학교에 늦는다며 30분 앞당기는 바람에 덩달아 나의 기상 시간도 빨라졌다.

내가 운동 장소를 바꾼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혹시 아침마다 밀회를 즐기는 게 아니냐며 농을 걸었다.  직장 때문에 주말부부로 사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료들이기에 가끔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둥, 남 모르게 몰래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둥 잊을만 하면 내가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농을 걸어 일깨우던 그들이었다.  내가 숙소 주변의 중고생들을 모아 영어,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그런 농지거리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시각에는 남자들이 대부분이고, 여자라고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 한 분이 홀연히 등장하여 뭇 남성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호리낭창한 체격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걷는 본새가 운동을 여간 오래 하지 않았겠구나 하고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그 여인의 옷 매무시도 돋보였다.  매일 바뀌는 골프웨어에 장갑까지 끼고는 보란듯이 걷는데 웬만한 남자들의 잰걸음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나도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허사였다.  그나마 나는 가볍게 조깅을 하는 탓에 뒤쳐지지 않지만 무작정 걷는 학생의 아버지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지 운동을 마치면 늘 그 여인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 여자도 남자들의 그런 시선을 왜 느끼지 못하겠는가.  아실랑아실랑 걸으며 가끔 표나지 않게 하는 곁눈질을 나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무튼 그 여인으로 인해 이야깃거리가 늘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러 나서는 길이 은근히 기다려지니 말이다.

다음주 월요일엔 나도 기운을 내어 그 여인의 걸음을 앞질러 보아야겠다.  잘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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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1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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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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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란 참으로 질긴 것이어서 아내로부터의 잦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못된 습관도 아닌 듯하다.  아내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내가 지닌 물건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적당한 때를 번번이 놓치는 까닭에 그리 된 것일뿐, 나의 성품이 지극히 인색하다거나 돈이라면 벌벌 떠는 쫌생이 기질을 타고 났다고는 볼 수 없다.  어쩌면 쇼핑을 즐기지 않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내가 꺼리는 일에는 유독 게으름을 피우는 유아기적 태도가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지난 달에 나는 17년 동안 타던 승용차를 폐차하고 장인어른으로부터 11년 된 차를 그 대신으로 물려받았다.  그도 따지고 보면 내 자발적 의사는 아니었고, 손윗 동서가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타던 차를 장인어른께, 그리고 장인어른의 차는 얼결에 내 차지가 되고 만 것인데, 워낙 꼼꼼하신 성격의 장인어른은 거금 100여만 원을 투자하여 잔 부속품 하나까지 교체한 후 내게 주셨다.  기실 그 차는 햇수는 오래되었지만 주행거리는 고작 6만km에 불과하니 내 차에 비하면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군데군데 녹이 슬고 엔진도 골골 노인네  소리를 내던 내 차를 버렸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닥 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차를 가져가라는 장인어른의 권유에도 마뜩찮은 태도를 취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내의 강압에 못 이겨 그동안 정들었던 차를 떠나 보내던 날 괜스레 울적하여진 나는 냉장고에서 몇 년째 뚜껑도 열지 않은 빼갈을 한 잔 마시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어제는 퇴근 후 평소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화장을 한 여학생이 눈에 띄어 계획에도 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요즘은 중학생만 되어도 다들 화장한다는 아이들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내 할 말을 하는데 생각해 보니 조금 멋적은 생각도 들어 '오늘은 숙제를 주지 않겠다'며 서둘러 돌려 보냈었다.

체면이나 외모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골라 태어난 듯하다.
뒷축이 헤어진 구두는 벌써 5년이 넘었고, 결혼 전에 산 옷가지들도 이제는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곤 한다.  그러니 산책 삼아 마트를 다녀오곤 하는 아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군소리 없이 살아주는 아내를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까닭에 아내의 잔소리는 언제나 도를 넘지 않는다.  이것도 천성이라면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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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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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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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0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꼼쥐님! 글이 참 재밌네요 ㅎㅎ
제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데 음... 생각하다가 관뒀어요. 나쁜 습관만 죄다 생각이 나는 바람에... ( '')~ 이 참에 좋은 습관 하나 만들어야겠어요.

꼼쥐 2011-09-03 08:5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
생각해 보면 저도 나쁜 습관만 있는 듯해서 조금 찔리지만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답니다. 어차피 똑 같은 사람은 없잖아요? ㅎㅎ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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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인터넷에서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창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못 들어선 길이라면 그 일이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이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하는 말과 함께 숫제 화면도 열리지 않는다면 비극적 운명 앞에서 좌절하거나 지난 일을 후회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테니 말이다.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츠바이크의 중편소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색했던 그의 소설은 언제나 탁월한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한때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던 츠바이크는 체게바라 역시 그의 작품을 자신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킬 정도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였지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가 망명했던 브라질의 리우에서 그의 아내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한다.  작가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 소설은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따금 눈앞이 캄캄해지곤 합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끝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남은 힘을 다해서 일생에 단 한번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시는 당신에게"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한 작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여인과 여인의 편지를 유서로 읽는 중년의 작가.  그들의 엇갈린 운명은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자식의 주검 옆에서 쓴 여인의 편지는 편지의 수신인, 즉 여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작가 R이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읽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종의 액자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편지를 읽는 순간과 다 읽은 후의 묘사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한 여인의 편지가 그 주를 이룬다.
 
일찌기 명성을 얻었던 작가 R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그를 따르는 많은 여인과 교제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첫눈에 반한 여인은 엄마의 재혼으로 2년여의 시간 동안 잠시 떨어져 있던 시기에도 그를 잊지 못한다.  결국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남자의 곁으로 돌아온다.  직장을 다니며 남자의 곁을 맴돌던 여인은 한 순간의 유희를 좇는 남자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그의 청을 수락한다.  여전히 남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소녀였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성적 욕구만을 채운다.  그 후 남자는 여행을 떠나고 여인은 잊혀진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남자의 눈을 피해 아이를 낳게 되고, 언제든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그 아이를 통하여 상실의 고통을 잊는다.  여인에게 있어 아이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분신이요, 삶의 목적이었다.  여인은 그런 아이를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사창가의 여인처럼 몸을 팔아 그 비용을 감당한다.  여인의 주변에는 많은 남자들이 기웃거렸고 청혼도 하였지만 여인은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당신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에든 구속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언제고 당신이 부르시면 기꺼이 달려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로부터 한 여자로서 눈을 뜨게 된 이후까지 저의 전 생애는 오로지 기다리는 것, 당신이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여인은 우연한 기회에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은 다음날 아침 자신의 모자에 놓인 지폐 몇 장을 보고 좌절한다.  아이를 키우며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  비록 그 남자의 의식 속에 없는 애닯은 사랑이었지만 그의 생일이면 매년 꽃을 보냄으로써 언젠가 있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가 죽고만 지금, 그녀 역시 자신의 분신이자 핵심이었던 운명적인 애정을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기에 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러짐으로써 가치를 잃게 될 그녀의 사랑이 그 남자를 통하여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며 편지를 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무명인의 소중한 사랑,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질 수많은 사랑의 본질적 가치를 아쉬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미사 또한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속에서만 살아가려 합니다. 아,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때처럼 조용히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부디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당신께 드리는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내 사랑, 부디 안녕히......" (P.132)

자신에게는 없는 밝고 명쾌함 그리고 자유로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된 첫사랑의 기억을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한 여인의 편지를 읽는 남자.  그가 느끼는 것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웃집 소녀에 대한 기억과, 어느 낯모르는 처녀에 대한 기억과, 술집에서 만났던 어느 여인에 대한 기억들이 한데 뒤엉킨 것이었다. 그것들은 불명료했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서 형체 없이 반짝이며 떨고 있는 돌멩이와도 같이.

"그는 한 여인의 죽음과, 자신을 향한 그녀의 불멸의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을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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