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시인이 쓴 산문집은 단순하지 않다.  주제에서부터 문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긴 삶의 틈새를 메우는 시인의 섬세한 손길이 없었다면 삶은 그닥 아름답지 않은 그 무엇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딸', 동질적이면서도 반쪽의 다름으로 영원히 남을 둘의 관계애 대해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인생의 황혼기에 서있는 시인의 아련한 그리움이 책의 제목에서 묻어난다.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두려움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지금도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많이 겪어야 나는 죽는 순간에도 담담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나는 매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아직은 담담하게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죽음으로 귀결될 내 삶의 끝조차 담담히 바라볼 용기는 아직 내게 없다.

 

 

 

 

 

 

그저 머리로만 기억하던 어떤 것들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까닭도 없이 환한 빛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리 단순하고 명확한 지식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계기가 주어진 것도 아닌데 기적처럼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그렇게 제각각일 수가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기적과 같은 순간을 기대하며 이 책을 고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기하학의 눈'이 아닌 '감성의 눈'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을 소설로 옮긴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작가의 친절한 배려로 생각되어진다.  다소 낯설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소설 쓰기를 해 온 작가가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는 소설은 조금 다를 듯하다.  나는 여전히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열광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설의 관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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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추리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초등학생인 아들녀석도 요즘 그의 작품 '명탐정 셜록 홈즈'에 푹 빠져서 산다.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작가였으니 그와 연관된 책들은 보이는 족족 다 읽어치운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때 읽었던 것 중에는 그의 일화를 담은 책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분이니 전해지는 일화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중에 전보와 관련된 일화는 그의 위트와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느 날 코난 도일은 국회의원, 사업가, 변호사,경찰 등 고위층에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낸다.

"이런 내용의 전보를 받으면 누구나 놀랄테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그의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보,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게 말이오. 사람들은 흔히 자기는 전혀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행동하거든.  그래서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지 알아보기 위해 내가 전보를 띄웠소."

그러자 아내는 "전보를 뭐라고 띄우셨는데요?"하고 물었다.

코난 도일은 아내의 질문에 자신이 썼던 전보 내용을 들려주었다.

"<탄로났으니 어서 도망가시오!> 라고 써서 평소 가장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친구들에게 보냈다오. 결과가 너무 궁금하군" 하며 마소를 지었다.

 

다음 날 도일은 그가 전보를 보냈던 친구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러나 전보를 받았던 친구는 단 한 명도 집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쉬며,

"여보, 내 친구들은 모두 죄를 지었나 봐." 하였다.

아내는 도일에게 "모두 숨고 없던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도일은, "다들 어제 집을 나가서 안 들어왔다지 뭐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가족들도 모른다는 거야.  그 정도면 알 만하지 않겠어?" 하고 대답했다. 

 

사실 코난 도일도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지역 의원 선거에 두 차례 출마했었다.  표를 많이 얻지 못해 두 번 다 낙선했지만 말이다.

 

요즘 박 당선인은 내각인선 작업의 고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닌 모양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총리 지명을 받았던 분도 자진 사퇴한 마당이니 누가 선뜻 나서겠는가.  그래서인지 박 당선인의 말은 더 가관이다.  인사청문 신상검증을 비공개로 하자는 것인데, 미국처럼 우리나라의 사정기관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면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뢰도에서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검찰,경찰,국세청에게 신상검증을 맡긴다면 신상검증을 하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비공개로.

 

박 당선인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당선인의 측근 중에는 그동안 권력기관의 비호 아래 축재를 비롯한 갖은 불법을 저질렀던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그들의 과거를 세탁하여 깨끗이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권력의 감시를 받았던 인물들은 그나마 조금 깨끗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이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라 코드가 맞지 않을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국이니 당선인의 고민이 깊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물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식선에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마저 찾기 어려웠으니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게 아닌가.

 

차라리 코난 도일처럼 탄로났으니 도망가라는 전보를 띄우면 어떨까?  아니면 카톡 메시지를 날리던가.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장관을 맡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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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기출문제집 2 - 대한민국 이십대는 답하라 인생기출문제집 2
박웅현 외 15인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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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획일화, 코드화에 반대한다는 데 있다.  합리적인 원리, 규칙, 질서, 코드 등에 강하게 반발함은 물론 때로는 비틀거나 부숴버린다.  이른바 '해체(deconstruction)'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비단 예술이나 철학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기존의 모든 질서로 인해, 그것에 비판없이 순응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우리 사회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나아가서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중,고생들의 공부를 돌봐주면서 그런 의문을 강하게 품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경쟁과 줄세우기의 학습방식은 분명 아이들을 기존의 틀에 순응하고 반항하지 못하도록 길들이는 데에는 무척이나 효과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10대는 한 해에 446명이 자살해 10만 명당 6.5명'에 달하고(2009년) 같은 해 15∼19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10.7명에 이르는데 과연 우리나라를 정상적인 나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의 기성세대는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런 현실이 화가 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병들면 젊은이들이 제일 먼저 열을 내게 되어 있다.  3ㆍ1만세운동에서도, 4ㆍ19혁명에서도 그랬고, 5 ㆍ18민중항쟁에서도 그랬다.  만일 젊은이들이 정의감을 잃고 화를 낼 줄 모르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병든 몸이요 희망이 없는 공동체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해열제와 얼음찜질에 익숙해서 그럴까?"    (P.155)

 

『인생기출문제집』제2권은 연예인, 예술가, 언론인, 종교인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인정받는 명사들이 우리시대 청춘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질문을 던진다.  정답은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배우 김여진, 광고인 박웅현, 방송인 노홍철, 만화가 최규석, 종교인 김인국, 영화인 양익준, 기자 이진숙, 그리고 빈민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 인디고 서원을 운영하는 허아람 등은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책을 읽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하다.  그것이 우리 기성세대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행했던 모든 폭력과 착취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쓴 모든 이들의 속죄의 표현일 수는 있겠다.

 

"우리, 그러니까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충고, 조언도 우리가 할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짐 지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때만 해도 나같이 머리가 별로 좋지 못한 사람도 운 좋게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는 친구들도 먹고사는 게 녹록지 않다."    (P.229)

 

나는 중학교 무렵부터 '학교를 그만 다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6남매의 다섯째였던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학교만큼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악착같이 공부하여 장학금으로 대학까지 마쳤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내 인생을 되돌아 보며 하나 결심한 게 있다.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말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아이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우리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 중에 그 말보다 더 폭력적인 말을 알지 못한다.  육체적으로 배가 부르다고 없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재미와 소명의식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이에게 그 말을 할 때는 '나도 배고팠으니 너도 배고파야 한다'는 기괴한 논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불안을 증폭시키면 시킬수록 비례하여 체제 순응도는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 기성세대는 현실의 냉혹함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에게 없는 재능을 쥐어짜는 느낌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아이가 다 성장하여 웬만큼 밥벌이를 할 때 쓰게 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잔혹할 정도로 냉정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감히 모험을 시도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린 셈이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은 예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종, 국적을 막론하고 전세계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한계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러분 중에도 혹시 먼저 포기하고 물러서는 분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한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정하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나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차별, 한계, 제약 등이 얼마나 볼품없는 껍데기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껍데기들에게 순순히 당신의 알맹이를 내어주지 마십시오.  과감히 그것들을 제치고 나와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직 나만이 듣고 말할 수 있는 언어라면 당신을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P.328)

 

우리 주변의 젊은이들 중에는 가상현실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서서히 파괴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소위 '게임폐인'이 그렇고, '은둔형 외톨이'가 그렇고, 공부만 하는 지독한 '공부벌레'가 그렇다.  우리 기성세대가 그들을 탈출구 없는 화마 속에 그들을 가두고 한발짝도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척한다.  한 국가의 미래는 반항하는자의 열정에 의존하며, 각기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에 의존하며, 꿈꾸는 자의 자유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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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봄날씨처럼 포근한 하루를 맘껏 즐겼다.

지난 연말연시의 혹독했던 추위도 그저 옛말이 된 듯, 이대로 봄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요즘 부쩍 독서에 열을 올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농을 자주 듣게 된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하며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올해 목표가 뭐길래 그렇게 책만 파는 거야?'하고 직설적으로 묻는 경우도 있다.  어느새 우리는 '독서란 큰 맘을 먹어야만 가능한 행위'쯤으로 인식하고 있음이다.  책이란 언제나 곁에 있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임에도 말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나도 모르게 책에 대한 두려움만 쌓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늘 그렇듯 마을 뒷산을 올랐다.  몇 년을 한결같이 올랐던 산인데 나는 단 하루도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어떤 날은 기온은 비슷한데 달이 뜨지 않았고, 어떤 날은 지난 해 태풍 볼라벤에 쓰러진 나무 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달아나는 청설모에 자지러지도록 놀라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푸슬푸슬 눈이 날리기도 하고...  요즘은 내가 집을 나서는 아침 여섯 시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는다.  한 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산을 내려올 즈음이면 먼 산마루가 청자색으로 변한다.  그 어슴푸레한 여명에 비친 능선의 실루엣은 마치 카펫의 올처럼 나무들이 보송보송하다.

 

내가 운동을 하는 시각에 매일 만나는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오늘은 제법 날씨가 풀려서인지 지난 가을에 보고 겨우내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간간이 만났지 뭔가.  반갑다 못해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통통하게 살을 찌운 모습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묻는 통에 그저 '잘 지낸다'는 대답이 고작이었지만 그 외에 달리 뭔 말이 필요할까?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어도 사는 모습이야 거기서 거기인 것을.

 

저녁에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일주일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다.  요즘은 가끔 피곤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나는 아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야유회라도 가고 싶은데 서로가 편한 시간을 맞춘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자랄 때와는 다르게 요즘 학생들은 바빠도 너무 바쁘다.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한다.  그래서야 어디 그게 폭력이고 고문이지 학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내가 '레미제라블'을 한 번 보라고 권했는데 나 역시 여직 못 보고 있다.  '봐야지, 봐야지'하며 미루다가 그만 시기를 넘긴 것이다.  그만한 시간이야 내려고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혼자 영화관을 찾는 것도 쑥스럽고,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는 저녁이면 밤공기 마시며 외출하는 것보다 이불 속이 마냥 그리운 탓에 나는 아내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게 후회투성이다.  사는 게 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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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라이프 -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이한중 옮김, 피터 포브스 사진 / 돌베개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 개발에 많은 돈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자기기만인 이 위선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위선'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에 이르는 첫 단계인,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경계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대가이기도 하다."    (P.170)

 

둘째형은 손재주가 많은 편이었다.  언젠가(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6학년쯤이었을 것이다) 겨울에 형은 내게 나무로 스키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형과는 다르게 손재주라고는 전혀 없었던 나는 형이 하자는 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살던 강원도에는 11월이면 눈이 오기 시작하여 3월까지 녹지 않았는데 활동적이었던 형은 긴 겨울 동안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이 못내 갑갑했던 모양이다.  형과 나는 톱과 낫을 들고 눈밭을 헤맨 끝에 어른 팔뚝보다 굵은 물푸레나무 두 그루를 잘라 산을 내려왔다.  눈 쌓인 산을 헤매느라 신발과 양말은 속까지 다 젖었고, 허술한 목장갑도 매한가지였다.

 

꽁꽁 언 두 손과 발을 녹이는 동안 우리는 엄마와 누나의 잔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베어 온 나무를 어떻게 다듬을 지 궁리하느라 건성으로 대답만 '응,응'하였다.  그렇게 손을 녹인 후, 앞집에서 대패를 빌려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젖은 나무를 다듬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더구나 켜지도 않은 원형의 나무를 송판처럼 얇게, 그리고 면과 두께를 고르고 일정하게 하기란 대패질에 서툰 우리에게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쉬지도 않고 온 종일 매달려 앞이 둥근 판재를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하였다.  다음은 이제 나무가 뒤틀리지 않도록 말려서 앞부분을 둥글게 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깎은 나무를 빛이 들지 않는 광에 며칠을 두어 제법 말랐다 싶었을 때 장작불 위에서 나무를 구으면서 앞을 휘느라 진땀을 흘렸다.

 

생각보다 모양새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였다.  우리가 만든 나무 스키에 신발을 묶을 끈을 고정하는 것으로 모든 공정이 마무리되었다.  형과 나는 그렇게 만든 스키와 함께 폴대로 쓸 바지랑대를 몰래 들고 집을 나와 뒷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스키는 잘 미끄러지지 않았다.  박닥면을 제대로 다듬지 않은 까닭이었다.  우리는 맥없이 산을 내려와 사포로 면을 다듬고 그 위에 양초를 수차례 발라 면에 광택을 냈다.  우리는 그 해 겨우내 바지랑대가 다 닳도록 스키를 타며 놀았다.

 

형은 그 후에도 외발 썰매며, 쇠구슬을 박은 팽이며 갖가지 놀잇감을 직접 만들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떤 일에 그때처럼 집중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워했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형과 나는 벌써 아이들을 키우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야 했던 그 때에 비하면 세상은 분명 살기 좋아지고 편리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전보다 더 공허해졌고 뭔가 근본에서 멀어진 것 같고, 우리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때에 기계문명의 시스템을 거부하고 실험적이고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핸드메이드 라이프>(A Handmade Life)를 쓴 윌리엄 코퍼스웨이트(William Coperthwaite)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메인 주 북부 해안에 있는 농가에서 소박한 삶을 추구해 온 교사이자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자 작가다. 소로, 간디, 디킨슨, 니어링 부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고 필요한 것은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자연 속에서 땅에 사는 모든 생명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하나에 역사와 땀과 애정이 깃든 물건을 사용하고, 동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땔감을 만들고 풀을 베고, 배를 저어가서 장을 보아 오고, 자신이 살 집은 손수 짓는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삶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코퍼스웨이트는 한 개인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기계문명의 편의와 편리만 좇아 근원적인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 교육의 의미와 직업, 검소함과 배려 등 우리가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가치있는 방식에서 너무나 멀리 와버렸는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그런 방식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식들에게,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들에게 삶의 고통과 폭력적 자기 착취의 방식만 전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자가 원시적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손으로 직접 삶을 디자인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며, 바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생명에 대한 존경과 배려를 잊지 않는 삶, 그것은 꿈도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우리는 그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졌다.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온 탓일까?

 

"오랜 세월 동안 비폭력의 삶을 살고자 한 사람들은 분노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주의자'나 '순수주의자' 혹은 '완벽주의자'나 '이상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더 큰 포부를 품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비폭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해주거나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한번 얹어주는 일이다.  온전한 삶이란 것이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다 하더라도 붙잡으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P.162)

 

이 책은 저자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지만,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작가의 주장이 명확해진다.  1.삶을 디자인하다, 2.아름다움, 새로운 시선, 3.일과 밥벌이의 즐거움, 4.배움과 가르침, 5.비폭력, 정중한 혁명, 6.자발적인 가난함, 7.자연을 닮은 소박한 삶, 8.평생 작업을 찾아서.  작가가 말하는 '디자인'은 물건의 형태가 가지는 기능성과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소박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행위도 포함하고 있다.  즉 디자인은 사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태도 및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디자인에 우리의 노력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핸드메이드'는 단순히 물건을 직접 만든다는 뜻을 넘어 내 손으로 만드는 인생, 내 손으로 만드는 새로운 세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온전히 경험하는 모든 행위는 내 가족과 이웃과 전 인류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우리가 사는 지구 전체의 모든 생명을 착취하거나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만 살 수만 있다면 삶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도 그런 삶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즐길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형과 함께 나누었던 경험을 중년이 된 지금까지 잊지 못하듯 아름다운 기억은 오래도록 그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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