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에디트 피아프 외 지음, 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젊은 연인들을 만날 때마다 되똥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없는 사랑은 오직 탐욕과 질투만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 나의 아날로그식 감성이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속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을 실어 나르는 까닭이다.  한번 굳어진 습관은 변화된 환경을 거부하며 제 행동에 대한 합리화의 표찰을 끝없이 만들어낸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오래 전 연인들은 편지를 쓰고 하염없이 답장을 기다리며 마음을 조렸었다.  가슴 가득한 그리움을 기다림의 세월 속에 켜켜이 쌓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나는 그렇게 옛 방식으로 사랑을 배웠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은 가끔 노래로 달래곤 했다.  노래가 없는 청춘을 생각할 수 있을까마는 그 시절의 청춘들에게 노래는 곧 세월을 견디는 위안이자, 사랑의 완성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였다.  하여, 내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면 추억보다 노래가 먼저 흘러나오곤 한다.  저마다의 추억은 노래의 선율을 따라 제각각 흐른다.  조금 더 어린 시절에 들었던 대중가요와 중,고등학교 시절의 팝송과 사랑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샹송과 삶의 무게를 깨닫는 시절의 트로트와...

 

샹송을 처음 알게 된(알았다기보다는 처음 듣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불문학과에 재학중이었던 아내는 유명한 샹송 가수의 노래들을 테이프에 담아 듣곤 했었다.  내가 이브 몽땅, 에디트 피아프, 아다모, 멜라니 사프카, 나나 무스꾸리 등 생소한 이름들을 노래와 함께 기억할 수 있게 된 것도 아내를 만난 덕분이었다.  그때 들었던 샹송은 내 청춘의 강렬한 지문(指紋)이었다.  나는 지금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떨려오곤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를 읽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마르셀 세르당이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에디트는 오열했다.  그녀는 2년 동안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었던 남자의 죽음에 몹시 죄책감을 느꼈다.  이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에 가눌 길 없는 큰 충격을 받은 피아프는 함께 따라죽을 생각을 하기도 했고, 영혼의 교신을 통해 사랑의 부활을 얻으려고 영매술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에디트는 마르셀을 위하여 노래하기로 결심한다.  '사랑의 찬가'는 죽은 뒤에도 영원히 그와 함께 하겠다는 절실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옮긴이의 글'중에서)

 

이 책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여자가수로 꼽히는 에디트 피아프와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그녀의 연인 마르셀 세르당이 여섯 달 동안 주고받았던 사랑의 편지를 모아 엮은 것이다.  마르셀 세르당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생애 마지막 여섯 달 동안 두 연인이 함께 나누었던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한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두 사람 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마르셀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에디트는 세상에 물들지 않은 마르셀의 순수하고 착한 심성애 반했다고 한다.

 

"나는 결코 너에게 어울릴 만큼 충분히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야.  너의 영혼은 너무도 아름다우니까.  나는 너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들을 미워할 거야.  어느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던 나이지만 말이야.  나는 네가 누구보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거야.  만일 언젠가 너에게 근심이 생긴다면 나는 너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그것을 나눌 거야.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p.104-105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중에서)

 

에디트 피아프는 다른 연인들처럼 마르셀의 옷을 골라주고, 그의 스케줄에 맞춰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고, 마르셀의 아들을 위해 손수 놀이옷을 만드는 등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마르셀이 뉴욕에 있던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파리와 뉴욕 사이의 하늘 어드메쯤에서 멈추었다.

 

에디트와 마르셀의 짧고 애절했던 러브스토리는 벌써 반세기를 넘어버린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L' hymne l' amour)'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슬픈 이야기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결코 순탄치 않았던 그녀의 한평생이 가슴 한켠을 아릿하게 적시는 까닭은 그녀의 순수한 열정이 이 순간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삼복의 무더위 속에서도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의 감동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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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녀자 - 나 만큼 우리를 사랑한 멋진 여자들의 따뜻한 인생 이야기 17
고미숙 외 지음, 우석훈 해제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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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늘의 신을 섬기는 그 종교들은 말 그대로 가부장적이므로(하늘은 전지전능한 아버지다) 해당 지역의 여성들은 하늘의 신과 그 지상의 남성 대리자들에게 2000년 동안 멸시를 받아왔다.'는 미국 작가 고어 바이댈의 말로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유교라고는 털끝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서양도 이럴진대 온 몸으로 유교주의를 겪어온 우리나라의 여성들이야 말해 무었할까.  그나마 기독교가 늦게 들어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유교도, 기독교도 유입되기 전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비이성적인 성차별은 받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비록 남자이기는 하지만 '배운 여자라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말 그대로의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비아냥이 섞인 안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을 더 많이 보아왔다.  그 말 속에는 '그래. 너 잘났다'는 식의 비꼼과 아니꼬운 속내가 배어있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이러한 냉소의 이면에는 권력구조의 비열함이 숨어있다고 보여진다.  처음으로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것에 급급하겠지만, 대대손손 내려온 권력을 향유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회현상쯤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러나 그들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차별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 간의 '연대'이다.  그러므로 소위 권력을 득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연대만 막으면 되는 셈이다.  멀지 않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이 땅에 상식과 정의와 연대가 뿌리내리길 희망했던 그들에게, 이름을 기억해 주고, 친구를 만들어 주고, 새로운 논의의 장을 만들어 주려 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직업인으로 사회인으로 제 맡은바 몫을 해내려 애쓰고 있는 언니, 친구, 동생 17인의 이야기를 모았다.  하는 일과 생각하는 것, 지향점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자신이 배우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다."    (p.6  '들어가는 글'중에서)

 

그렇다.  이 책에는 17인의 여성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어쩌면 남성인 나와는 어떤 연관도 없을 듯한 이 책을 굳이 읽고 리뷰를 쓰고자 한 데에는 어떤 계획이나 구상도 없었다.  아주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뿐이다.  MBC [피디수첩]의 프로듀서였던 김보슬, 배우 김여진, 무료 치과 진료를 하는 이웃린치과 홍수연, 인권활동가 류은숙, '한경희 생활 과학' 대표 한경희, 고전 평론가 고미숙 등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여성들이 등장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와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과 생각에 나도 모르게 리뷰를 쓰게 되었을 뿐이다. 

 

"다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살 거다.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이 내게 '그러지 마라'고 협박해도 소용없다.  나는 내 맘대로 살 거다.  내 인생이다.  한 번 사는 내 인생이다.  나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인생들과 교류하고, 구경하고, 같이 놀고, 배우며 그렇게 살 거다.  그래서 나는 배우는, 배우, 여자, 사람이다."    (p.43-44  '김여진'편에서) 

 

인간을 사랑하고, 보듬고, 아파하는 방법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따로 있을까.  여성의 취업률이 젊은 증에서는 남자와 대등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그닥 부족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밥을 굶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불만에 가득한 자와 미소를 띠는 자로 양분되어 삐그덕 댄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어쩌면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 진정성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가식과 눈가림이 판을 치고 있다는 얘기다.  그 가면을 벗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순전히 우리 사회 구성원의 '앎과 실천'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나는 노동자들이 물적 토대를 확보하면 당연히 삶의 비전을 위한 고매한 지성을 탐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차별과 억압을 벗어나면 자유롭고 당당한 사랑의 주체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오판이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공부하지 않고,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인간 욕망'에 시달리고 있다.  부자건 노동자건 여성이건 남성이건 삶의 가치는 오직 자본의 증식이고, 그걸 투여하는 욕망의 대상은 오로지 가족이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꿈꾸던 세상인가?"    (p.263  고전평론가 '고미숙'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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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8-07 09: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여성만으로 쓰여진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왠지 흥미롭네요^^
우석훈 해재가 특히요~~ ㅎㅎ

꼼쥐 2013-08-08 12:35   좋아요 0 | URL
촛불집회 이후에 엮은 책인 듯해요. MB시절의 촛불집회로 인해 우리 세대는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석훈도 아마 그 점에 착안하여 이 책을 생각했겠지요.

Char 2013-08-07 10: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꼼쥐님 ^^
댓글 남겨주신 것 보고 저도 와보았습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보듬고, 아파하는 방법에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따로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마음이 참 좋았어요. 이렇게 다른 이의 후기를 읽고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는 건가봐요. 고맙습니다. :)

꼼쥐 2013-08-08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왠지 다른 사람의 리뷰를 꼼꼼히 읽는 편인지라 비록 형편없는 제 글도 이렇게 꼼꼼히 읽어주는 분이 반갑더군요. 비록 어떤 비판의 글을 댓글로 남길지라도 누군가의 글을 꼼꼼히 읽고, 그 뜻을 파악한 후에 남긴 것이라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 싶어요. 제가 오히려 고맙습니다. ^^
 

장맛비처럼 한차례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빗물이 깊게 주름져 흐르는 창유리를 맥없이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소나기는 그 짧고 역동적인 행위로 긴 침묵을 가르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순한 양처럼 그렇게 침묵하고 있었으니까요.

세찬 빗줄기의 무지막지함이 사진 속 고요처럼 여겨지는 것을 보면

역설 속에 진리가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그 짧았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비는 멈추었습니다.

물동그라미처럼 잔상만 아른거립니다.

습한 더위가 몸을 휘감을 때까지 다들 그렇게 고요와 함께였습니다.

찰나의 고요 속에는 펄떡이는 일상이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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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처음' 또는 '첫-'이라는 말은 언제나 설레임과 흥분으로 사람을 달뜨게 한다.

13기 신간평가단!   

유난히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더위를 대비해야 하는 시기.

더위를 잊고 오롯이 책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나고 싶다.

 

 

생일 선물로 책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책장의 여백에 서툰 마음을 글씨로 담아 낯을 붉히며 수줍게 건네주던 순수의 시절을 기억한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많았던 시절, 남는 것보다는 부족한 게 많았던 시절이었다.  퀴퀴한 곰팡내가 위안이 되고, 용기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낡고 오래된 책에서는 그 시절의 냄새가 난다.

 

 

 

 

 

 

 

 

성석제의 책을 읽으면 어느 순간 마음의 주름이 활짝 펴지곤 한다.  세상살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 성석제의 글은 그래서 좋다.  우울하거나 깊이 가라앉는 기분은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없다.  어쩌면 이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의 글은 분명 다를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피터 메일의 <나의 프로방스>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에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딱히 '이것이다'말할 수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련한 향수처럼 남았다.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을 여러 권 읽었지만 정작 그의 책은 기억에 없었는데, 그가 청춘을 보냈던 프로방스를 노교수가 되어 다시 찾아 감회와 여정을 책으로 엮었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나의 학창시절은 헤르만 헤세의 '계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고민하고, 그로 인해 아팠고, 밤잠을 설치며 한동안 서성였던 기억.  헤르만 헤세는 내게 그런 작가였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는 청춘의 시원을 더듬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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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꼼쥐 2013-08-06 09:00   좋아요 0 | URL
아~~그랬었네요. ^^
고맙습니다. 임시저장을 했다가 이어 썼더니 그렇게 되었나봐요. ㅎㅎ

2013-08-06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6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즈 2013-08-0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기 신간평가단 안정숙 엘리사벳입니다.
황망하게도, 이렇게 먼저 찾아주신 덕분에 요란한 천둥과 번개, 소나기가 지나가고 매미 소리만 남은 오후, 즐겁게 시작했습니다.

막상 첫 임무를 시작하려니까 이 수많은 작가들 책 기획자들 중에 몇 가지를 고른다는게 무척 어렵더군요.
꼼쥐님께서 격려해주시니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습니다^^

블로그를 보니 무척 많은 글들이 있어서 즐겨찾기를 해두었어요.
시간 날 때 틈틈히 읽고 가겠습니다.

남은 여름, 좋은 시간 되시길 바라며.
어떤 도서가 선정될지 두근두근 하는 맘으로.

안정숙 엘리사벳 드림.

꼼쥐 2013-08-06 19:27   좋아요 0 | URL
엘리 사벳은 세례명인가요?(궁금해서 말이죠. 제 세례명은 라파엘인지라)
되도록이면 읽었던 책의 리뷰는 기록으로 남기자고 생각한 탓인지 낙서 수준의 글들만 가득하답니다. 저도 즐겨찾기를 해두었으니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

세실 2013-08-07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의 묘약이 겹치네요~~~ ㅎㅎ

꼼쥐 2013-08-08 12:39   좋아요 0 | URL
네~~왠지 끌리는 마음이 세실님과 같았나봐요. ~~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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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초등학교 친구 중에 괴짜로 소문난 친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덩치가 좋았던 친구는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유도 선수가 되었다.  그것도 무제한급 선수로.  친구는 고1인가 고2의 여름방학에 친구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체력 훈련을 하겠다며 산으로 들어갔었다.  친구들은 다들 그러려니 했다.  운동선수이니 체력훈련이 필요할 테고, 체력훈련 하면 뭐니뭐니 해도 산악훈련이 제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되어서 만난 친구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분위기가 친구를 감싸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던 나는 한동안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고향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친구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에 내려가 풍수지리를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선수로서 유도를 계속하거나 적어도 은퇴한 후 유도 코치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풍수지리 강사라니...  그 친구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한의원을 운영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한자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셨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탓인지 친구는 다른 과목에 비해 한문 실력은 늘 좋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도를 하던 친구가 풍수지리 강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쓴『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사주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업으로 그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그저 관심으로만 그칠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시도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공부를 해볼 요량으로 <주역>을 집어 들었다가 채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미련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이라는 가정 속에서 지루하게 시간만 보냈을 뿐 실행에 옮길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부터의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그 기회마저 밀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는 사주니, 운명이니 하는 처음의 호기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했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 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    (p.31)

 

이 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사주명리학이 왜 '미신'으로 치부되고 있는지, 또는 왜 '신비주의'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탐구하며 기초적인 사주명리학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힐링'과 '치유'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는 요즘,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사람들은 넘쳐나고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까닭을 우리의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과 행 사이의 간극이 질병과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    (p257)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말했다.  "나 이외에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료해줄 사람이 없다.  행복을 나 자신이 만드는 것과 같이 불행도 나 자신이 만들 뿐이요, 또 치료도 나 자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나 자신의 구원자인 나는 그럼에도 나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라고 철학자 니체가 지적했듯이.

 

근대성 비판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문명의 발달은 결국 사주명리학만 버린 것이 아니라 이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아픈 것이라고.  나 자신으로 향하는 길은 사주명리학이며, 그 지도를 들고 내 자신에게로 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향 친구를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는 마음 속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던 '언젠가'를 '지금 바로'로 바꾸어 놓았다.  저자 고미숙으로 인해 나는 사주명리학 관련 서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음에 읽을 책도 준비해 두었다.  이러다 혹시 철학관을 내는 건 아닐까?  선무당이 사람 잡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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