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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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짝짓기가 필요했던 청년기 이후로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죠.  나란 놈에게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책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세미나에서 만난 지식인, 혹은 성당의 미사나 사찰의 법회에서 만난 종교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란 놈은 참으로 특이한 족속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경계에서 춤추다』를 읽으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서경식 작가와 타와다 요오꼬 작가에게 신뢰를 넘어선 아름다움, 즉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스트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타와다 요코꼬가 열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주고 받았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편지글이 갖는 은근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작가는 '남과 여'라는 이질적인 성별과 10여 년의 나이차가 나는, 속물적 시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작가는 그들이 나누었던 열가지의 주제에 대해 지성인으로서의 폭 넓은 사색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고한 기품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여행'을 주제로 나누었던 두 작가의 편지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툭 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와 더불어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져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p.68 서경식이 타와다 요오꼬에게)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철도에 의한 이동은 육체의 이동입니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수천 킬로미터나 옮겨놓는 것이죠.  이것은 이른바 집필활동이 서재 안에 갇혀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무대예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일본어가 고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언어를 그 내부에 포함하는 까닭에 온갖 언어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형태로부터 또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운동 자체에 창작활동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일지도 모릅니다."    (p.75~p.76 타와다 요오꼬가 서경식에게)

 

이 편지들은 재일교포 2세 작가로서 2006년 4월부터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서경식 작가와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이후 독일에 거주하는 타와다 요오꼬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위에서 짧게 인용한 글만으로는 내가 느꼈던 감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편지가 마치 서로 다른 악기 두 대가 화합하여 멋진 앙상블을 이루는 협주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어가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았을 때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하는 느낌도 함께 말입니다. 

 

두 저자의 사유의 방향은 서로 합치 되기도 하고 때론 어긋나나거나 교차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생한 소통의 현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사유의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의 열가지 주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하고 그에 화답하면서 또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엮여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목소리에 대하여 쓴 타와다 요오꼬의 말은 재밌습니다.

 

"저는 얼굴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음성이나 말할 때의 리듬, 언어 선택 등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드는 편인데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언어를 말하면 이미지가 싹 바뀌어버리기도 해서,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싶어 불안해집니다."    (p.130)

국적, 성별, 세대가 모두 다른 두사람이 ‘언어(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두사람이 지니고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재일조선인인 서경식은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규정해왔으며, 타와다 요오꼬 역시 일본인 여성 지식인이지만 1982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수십년간 살면서 독일어를 제2의 모어로 삼아 살아가는 이민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어와 투쟁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기를 희망하는 두 작가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아름다운 두 지성인의 사유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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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밤을 빠져나와 완전히 다른 빛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늘 있는, 언제까지나 진행될 것만 같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저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낮이 길어진 탓에 미처 산을 다 오르기도 전에 먼 산 위로 하루의 태양이 떠오르곤 하지만 그렇다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옅어지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봄꽃 만발한 숲의 어둠 속으로 속속들이 스며들고 있는 빛의 폭발에 내가 지금 어둠과 빛의 경계에 서 있구나 하는 느낌이 선연해지곤 합니다.

 

이따금 저는 나와 타인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내 의식의 영역이야.'하는 생각으로 든든히 담을 치고 사는 까닭에 경계의 이 편에서 저 편에 있는 상대방과 섞이거나 구분짓지 못하는 '의식의 혼재 상태'를 경험하지는 않지만 문득 그 경계가 무너지는 한 순간, 이를테면 의식의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의 나는 '왜 내가 여기에 있지?'하는 의문에 빠지는 것입니다.

 

어제는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밖에 나갔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며 무심히 앉아 있었는데 제 차의 룸미러에 비친 뒷차의 운전자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SUV차량을 타고 있는 여성 운전자였습니다.  불과 5,6년 전만 하더라도 SUV 차량을 운전하는 여성은 드물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SUV 차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여성 SUV 운전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죠.  그 여성 운전자는 나처럼 신호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핸들에 올려진 손가락으로 핸들을 가볍게 톡톡 두들기면서 박자를 세고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때 라디오를 튼 것도, 다른 음악을 틀어 놓은 것도 아닌데 제 귀에도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있었던 '의식의 무방비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뒷차의 크락션 소리에 놀라 앞을 보니 제 앞에 있었던 차량들은 이미 다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텔레파시도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식의 경계가 무너지고, 심지어 너와 나의 구분도 모호해지는 상태.  산을 오르며 등산로 근처의 나무 둥치에 손을 대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의 경계가 분명한 나로서는 나무의 생각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담을 없애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 인간사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나무와 꽃과 이름도 모르는 풀과, 더 나아가서 우주의 모든 것들과 스스럼없이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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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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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오후 3시경이었나 봅니다.  흐린 하늘에 휙 긋고 지나가는 빗줄기.  창유리로 맥없이 떨어지던 빗방울.  바람이 불고 지난 가을의 마른 낙엽이 스산하게 흩날렸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섞바뀌는 계절의 빈 자리에서 고독처럼 머물렀습니다.  이 순간에도 삶의 가장 밑바닥을 밟고 있는 어느 예술가의 고독한 외침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 예술입니다.  피를 토하지 않는 예술은 다 거짓처럼 보일 뿐, 한 점 감동도 전하지 못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는 워낙 유명하여 그림에 무지한 저도 몇 번이나 읽고 보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문학가요, 명철한 철학자였던 듯합니다.  그가 그린 그림의 기저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색의 물결들이 암반처럼 자리했겠지요.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았던 예술가의 삶을 더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화가 이중섭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이중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미술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소개된 그의 그림을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황소>였지요.  국어 교과서에도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 한 편이 소개되었던 듯합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받아적었을 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어떠한 호기심도 없었던 듯합니다.  제 머릿속에는 그저 이중섭이라는 이름이 서 푼짜리 지식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우연처럼 손에 잡았을 때, 저는 그저 서 푼짜리 지식에 약간의 윤기를 더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가벼운 지식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듯  그도 시대의 우울함을 온 몸으로 겪어낸 듯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두고 그가 견뎌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그림에 대한 희구와 갈망은 제가 읽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무척이나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말할 것도 아닌 것이 고흐의 그림이 사색과 순간적 느낌,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었다면 이중섭의 그림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태현, 태성에 대한 그리움과 순수, 강한 생명력에서 비롯되었던 듯합니다.

 

"나만의 사람, 마음의 사람인 남덕이여!  나는 당신의 편지와 그립고 그리운 아이들과 당신의 사진을 기다리고 있소.  지금은 싸늘하고 외로운 한밤중, 뼈에 스미는 고독 속에서 혼자 텅 빈 마음으로 있소.  그림도 손에 잡히지 않아 휘파람,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시집을 뒤적이기도 하오.  당신의 편지가 늦어지는 걸로 보아 혹시 당신이나 아니들이 감기로 눕지나 않았는지요?"    (p.121)   

 

책에는 유화, 수채화, 스케치, 구아슈화, 은종이 그림 등 이중섭의 대표 작품 90여 점과 더불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결혼 전 마사코에게 띄운 그림엽서 등이 담겨 있t습니다.  놀라운 것은 남존여비의 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당시에 이중섭의 편지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하나 숨김 없이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요즘의 연인들이 쓰는 연애편지도 이보다 더 뜨겁고 열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문장이 미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가장으로서의 심경,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복합된 감정이 그의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이 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나는 한없이 사랑해야 할, 현재 무한히 사랑하는 남덕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하늘이 점지해주셨소.  다만,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p.128)

 

이중섭의 그림은 엄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기도요,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던 절실한 소망일 것입니다.  비록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림 속에서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꿈을 꾸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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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3 17:15   좋아요 0 | URL
멋집니다^^

꼼쥐 2014-05-06 17: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모든 사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사실이지만 하늘만큼 그 선명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습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하늘을 바라볼 때의 자세에 따라 우리가 받는 느낌은 사뭇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걸으면서 우연히 보게 된 석양, 찬란한 일출의 풍경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그런 특별한 하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볼 수 있는 하늘,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하늘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제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능선에는 운동기구가 여럿 비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본격적인 산행을 하기 전에 그곳에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윗몸 일으키기, 스트레칭, 철봉 등 가벼운 운동을 하곤 합니다.  윗몸 일으키기대는 경사진 것과 수평의 것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저는 경사진 윗몸 일으키기대에서 대략 25회 정도를 하는데 위몸 일으키기대에 누워서 보게 되는 하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의 우듬지와 넓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때 저의 느낌은 마치 어릴 적 내 가슴에 엊혀지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의 적당한 무게감과 그것으로부터 받았던 안온한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르르 잠에 빠져들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죠.  걸으면서 쳐다보던 하늘의 느낌과는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제 몸 전체가 하늘에 빠져들 듯한, 누군가 적당한 무게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한 행복하고 충만한 느낌.  말로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하늘이 또 하나 있습니다.  호주의 사막에서 보았던 밤하늘.  그때도 역시 사막 한가운데 벌러덩 누워서 보았습니다.  온 몸 곳곳에 박힐 듯 쏟아지던 별빛과 완벽한 암흑.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낮에도 이따금 창유리를 통하여 하늘을 바라보곤 하지만 그런 감동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늘은 역시 누워서 보는 게 제맛입니다.  저는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가끔 권하곤 합니다.  누워서 하늘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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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에세이 신간평가단을 시작하는 첫번째 미션.

잠을 깨우던 간밤의 빗소리처럼 일손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이 일이 어쩌면 내게는 달콤한 휴식처럼 반가운 게다.  새책을 받아 들고 책장을 넘길 때의 '빠닥'하는 탄력 넘치는 소리는 듣지 못할지언정 새로 출간된 책을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재래시장에서 한나절 봄나물을 구경하듯.

 

 

 

 

독일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저서 <작가의 얼굴>을 통해서였다.  처음 접하는 작가는 으레 낯섦과 서먹함에서 오는 부대낌이 있게 마련인데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문체에는 독자를 배려하는 친숙함이 베일처럼 깔려 있었다.  나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비평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독자의 변덕은 사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은 것이지만 나는 기꺼이 그의 팬이 되기로 작정했다.  비평서가 아닌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을 읽음으로써 어쩌면 그와 나는 세대를 떠나서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계절의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서 자연이 아름다워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하기에 자연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랑의 담론을 읽는다는 건 자연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터 트라튼버그의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또 다른 방랑이 아닐까.

 

 

 

 

 

 

 

내가 호주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거라지 세일에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보았었다.  너무나도 사고 싶었지만 내게는 돈이 님아있지 않았다.  그때의 아쉬움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책을 보자 나는 그때 느꼈던 아쉬움이 첫사랑의 추억처럼 되살아났다.

 

 

 

 

 

 

 

 

 

다비드 르 브르통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다.  우연히 읽었던 그의 저서 <걷기 예찬>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좋은 책이었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그가 내놓는 책은 몸과 관련된 어려운 책뿐, <걷기 예찬>과 같은 순순 문학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저자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금도 흥분과 설렘을 가누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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