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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이 코앞이다.

이맘때면 당연히 느껴야 할, 또는 그렇다고 믿는 '여유로움'과는 사뭇 동떨어진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연휴가 주는 푸근함보다는 피곤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마저 들게 마련이다.  명절은 그저 의례적인 것, 어쩔 수 없는 행사쯤으로 사고의 폭이 한없이 좁아진다.  내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독서가 아닐까 싶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책이 <인생의 목적어>였다.  카피라이터 하면 으레 떠오른 것이 기발한 발상과 말장난에 가까운 유희가 아닐 수 없지만 나는 그 책을 읽고 '정철'이라는 한 인간에 대해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저변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씨와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인에서 오는 묘한 느낌은 글을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 '정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반갑기 그지없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언제나 말랑말랑한 감성을 자극한다.  피곤하고 무기력한 시간이 계속될 때 그녀의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왠지 모를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인간답지 않게 살아가는 나에게 '인간다움'의 모르핀을 주사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 모르핀을 맞고 몇 달쯤 거뜬히 살아내곤 한다.

 

 

 

 

 

 

 

 

주말부부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았다.  학창시절에 나는 그림에는 그야말로 젬병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림을 배우고 연습한다는 사실에 아내는 놀라워했다.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함이 용기를 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림에는 젬병이지만 아무튼 나는 그림을 그린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얼마 전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입장표명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것이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적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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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두 가지 대비되는 원색이 혼합되어 원래의 색을 구분할 수 없는 파스텔톤의 색깔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예컨대 허공을 날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새도 없이 불시착한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과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식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이 바로 그것이다. 느낌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우리는 두 감정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비록 여러 감정이 혼재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충격에 버금가는 두 감정이 느닷없이 찾아왔을 때 나는 그 감정의 출처를 오래도록 의식하곤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지 보름쯤 지나는 동안 나는 두 감정의 경계에서 어찌할 줄 몰랐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오늘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아, 돌아가셨지' 하고는 이내 무기력한 현실로 되돌아오기를 수차례. 또는 화장을 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모시는 과정을 또렷이 지켜봤음에도 그것이 마치 남의 일이었던 듯 기억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가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시도 때도 없이 선명하게 각인되곤 하였다.

 

근 이십여년을 병원에서 지냈던 아버지로 인해 가족 모두의 뇌리에는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나 보았다. 부자간의 각별한 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토록 혼란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비기 오락가락 했던 오늘, 하릴없이 창밖을 보며 우울한 상념에 젖었었다. 궂은 날 찾아오는 오래된 지병처럼 가슴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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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9-0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혈연이란 그래서 진하다고 하는 것 같아요. 마음대로 이을수도 끊을수도 없는.
여긴 이제 비가 그쳤어요. 내일은 말간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꼼쥐 2014-09-05 19:47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시작된 추석연휴 탓인지 거리에는 차가 넘쳐나네요. 하늘은 맑고 연휴 내내 비도 오지 않는다 하니 hnine 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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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등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예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학생의 봉사활동 기록이며 수상기록뿐만 아니라 독서기록에 이르기까지 학생의 일 년 생활이 어떠했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품행이 방정하고 학급의 모범이 되며'로 시작되는 두어 줄짜리 학적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따금 나의 인생 기록부를 매년 작성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다.  고등학생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담임선생님처럼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자신의 운명에 이끌려가는 한 인간의 비극을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  "부끄럼 많은 인생을 보냈습니다."로 시작되는 주인공 '오바 요조'의 수기는 소심하고 겁 많았던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궤적을 그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아기 때부터 스물일곱 살로 죽기 전까지 한 인간의 심리적 궤적을 좇은 이 소설은 자신의 생각을 사회에 외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쪽으로 이끌어갔던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

 

오래전의 블로그 포스팅에서 나는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중독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좋아하는 대상에 끌리는 현상을 중독이라 이해한다.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라고.  나는 중독현상에 대해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대해 겁을 먹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중독 현상은 피할 수 없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도 그랬다.  인간에 대한 요조의 공포는 끔찍한 것이었다.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쨋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어있어." (p.19)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p.27)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는 그 인간 세계에 스스로 동화되기 위해 ‘익살꾼’을 자처해 가며 노력하지만 번번이 좌절한다.  중학교 시절 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한 그의 익살이 일부러 지어낸 것, 즉 허위라는 사실이 친구 다케이치에 의해 밝혀지던 날 요조는 충격을 받는다.  도쿄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요조는 호리키와 교제한다.  그를 통하여 요조는 술과 여자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방탕한 생활을 영위한다.  우연히 알게 된 사기범의 아내 쓰네코와 동거를 시작하고 결국에는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여자만 죽고 그는 살아서 구속되었지만 기소 유예로 풀려난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62p)

 

술과 여자를 전전하던 그는 결국 마약에 중독되고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거듭된 동반 자살 기도에서 여자만 죽고 혼자 살아남은 요조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본가로부터도 절연을 당한다. 그는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만다.  이해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인간 세상과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정면으로 다룬 <인간 실격>은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돼가는 패배의 기록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인간 실격>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주인공 요조가 현실도피의 일환으로 중독에 빠져드는 과정으로 읽혔다.  말하자면 요조는 허위에 가득찬 인간들과 제정신으로는 한시도 같이 살 수 없었던 까닭에 어려서는 익살로 자신을 숨기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술과 여자에, 최종적으로는 마약에,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자살기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결국 익살과 술,여자, 마약, 자살은 그 형태와 대상만 바뀌었을 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저는 그렇게 반미치광이처럼 원하던 모르핀을 실로 자연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같은' 요시코의 무지에 감동한 것일까요.  저는 그 순간 이미 중독자가 아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p.130)

 

자기 안으로 한없이 침잠해 결국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버린 오바 요조는 비록 패배자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가장 정직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소설의 구성은 ‘나’라는 화자가 서술하는 서문과 후기,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요조가 쓴 세 개의 수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은 요조의 수기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수기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씌어 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p.134)

 

고등학생의 생활기록부처럼 저마다의 인생기록부를 받아볼 수 없는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삶의 행로에 리셋 버튼을 눌러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는다 할지라도 인생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판단되면 과감하게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용기.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그것일지 모른다.  용기 하나만 있으면 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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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 실격>이라는 소설이 있다. 제목처럼 꽤나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이다. 나는 아마도 대학시절쯤에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별 감흥도 없이 이 책을 읽었다. '아,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로 가벼이 읽었었고, 그때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시기였으니만큼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가 느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공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며칠 전 그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 자리를 오르내리는 한 사람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그의 행위에 동조하는, 김영오 씨의 단식과 단식 중단을 조롱하는 많은 글들이 트위터에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참으로 썩은 내가 풍기는 '인간 결격자'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들을 두고 인간성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말하자면 잘못된 인성의 소유자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판단이다. 인성의 결여는 그들도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적어도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인간의 실체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인간의 허위와 기만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 실격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바 요조보다 못한, '인간 실격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결격자'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자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는, 인간의 자격 조건이 결여된 '인간 결격자'라는 말이다. 그들의 행위는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인 스스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신념인 양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어울릴지 모른다. 세상을 모르는, 인간에 대해 무지한, 도덕심이나 배려심은 눈곱만치도 없는 하룻강아지는 자신의 방종조차 신념이라고 우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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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락시아 - 정현진 사진집
정현진 지음 / 파랑새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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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억지가 있겠지만 사진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본다기보다는 오히려 읽는 것에 가깝다. 사진을 읽는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느껴지지만 시간을 두고 찬찬히 곱씹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사진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하곤 한다. 그날 날씨는 어땠을까, 구름은 많았나? 바람은? 주변에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지? 조금 추웠을까? 주변 도로에는 개미가 몇 마리쯤 이동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갑작스런 카메라 렌즈에 놀란 어린 새가 푸드득 날아가지는 않았을까?

 

별의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 장의 사진을 놓고 웬만한 책 한 권 읽는 시간을 소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진을 그리 한다는 건 아니다. 예컨데 여행 책자에 실린 선명하고 화려한 사진은 오히려 섬뜩한 기분마저 들곤 한다. 아무런 상상을 할 수 없는, 이 세상의 풍경에서 한쪽 귀퉁이를 도려낸 듯한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의 사진은 오랫동안 보고싶은 기분이 영 들지 않는 것이다.

 

사진가 정현진의 사진집 <아타락시아>를 나는 정말 공을 들여 보았다. 아니, 읽었다.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피사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피사체를 둘러싼 배경 스토리, 한 컷의 사진에 담기지 않은 그 순간의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소소한 것들, 영속하는 시간의 경과에서 무한히 정들었던 대상 속에 작가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으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중에는 '후지와라 신야'가 있다. 여행작가이기도 한 그의 사진에는 '상상 금지'의 팻말이 붙은 여느 여행작가의 사진처럼 선명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진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고,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이, 아련한 향수가, 그리고 시간의 경과와 삶의 무상함이 담겨 있다. 내게 무슨 심미안이 있어서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니다. 예술적인 방면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다만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내가 정현진의 사진집 <아타락시아>를 보고 리뷰를 남기게 된 계기는 그의 사진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상', '사유', '동심', '사랑', '행로', '장면' 등으로 소제목을 달아 분류된 그의 사진집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는 평면의 일상에서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한계 저편의 세계로 공간이동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게 된다.

모래 위에 남겨진 피서객들의 발자국에서, 도로의 갈라진 틈새에서, 겨울을 견디는 나목에서, 사선으로 흩날리는 빗줄기에서,어느 음식점의 물컵에서, 때로는 나뭇잎 위의 이슬에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상상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 사진마다 촬영 동기가 몇 줄의 짧은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어떤 철학적 사유나 현학적 글귀를 써 넣음으로써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저 단순하고 깔끔하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작은 것에 대한 관심과 무한한 상상력, 지워지지 않은 동심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좋은 사진은 적어도 수십 명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정현진의 사진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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