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마음
이토 히로미 지음, 나지윤 옮김 / 책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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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방에서 개나 고양이가 함께 지내는 것이 요즘에는 그닥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놀랍고도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에서 누가 애완견을 안고 다니는 모습만 눈에 띄어도 노인들은 하나같이 '망칙스럽게 개새끼를 어찌...' 하면서 혀를 끌끌 차거나 내일 곧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낙담한 표정으로 '말세야. 말세'를 외치곤 했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랬던 게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데 요즘에는 애완견이니 반려견이니 하면서 제 자식 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어디 개뿐인가. 고양이며, 닭이며, 돼지까지도 애완동물로 받아들여지더니 요즘에는 뱀과 거미 등 예전에는 기겁을 하며 피하던 동물들까지 애완동물로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런 풍조가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예컨대 길거리에 버려진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들,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에 의한 동물학대 등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추세이니 말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길고양이를 돌보던 여인들이 한 아이가 던진 벽돌에 맞아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던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도, 그렇다고 적극적인 반대의 마음도 없는 나로서는 애완동물로 인하여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도 개를 키웠던 적이 두어 번 있었던 것 같다. 애완용으로 길렀던 것은 물론 아니고 키워서 팔면 약간의 돈을 손에 쥘 수 있겠다고 판단한 어머니의 결심이 크게 작용했었다. 장에서 사 온 잡종견은 마당 한귀퉁이에 매어진 채 우리가 주는 밥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거나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 짖거나 할 뿐 사람들과의 특별한 교감은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목줄이라도 풀어 놓은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우리 형제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기도 했고, 어두운 산길을 걸어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어머니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기도 했었다. 오랫동안 정이 들었던 개가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도는 이름도 모르는 개장수에게 팔려가고 나면 우리집은 한동안 적적함에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일본의 여성 문학가 이토 히로미가 쓴 <개의 마음>은 개를 키우지 않는 나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준 책이다. 작가가 일본을 떠나 타국 생활을 시작했던 초창기부터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가족과 동고동락했던 애완견 '다케'의 마지막 2년을 기록한 책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다케. 태어난 지 13년 된 저먼 셰퍼드. 인간의 나이로 56세. 개 수명으로 따지면 애저녁에 저세상으로 떠났을 나이. 내가 두 딸을 데리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다. 처음 미국에 첫발을 내딛고 1년 반 후에 다케를 만났으니, 이국 생활의 대부분을 다케와 동고동락한 셈이다." (p.12)

 

전남편과 이혼한 후 작가는 두 딸을 데리고 미국에 정착했다고 한다. 개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유대계 남자와 재혼을 하고 막내딸 도메가 태어나고 파피용 견종인 '니코'와 앵무새 '삐짱'이 한 가족으로 살게 된다. '다케'가 죽기 전, 일본 구마모토에서 홀로 사시던 그녀의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그녀는 미국과 일본을 수시로 오가야 했다. 당시 89세의 늙은 몸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애견 '루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루이'를 온전히 돌볼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허망하게 떠난 후 늙고 병든 '루이'는 그녀의 책임으로 남는다.

 

그녀가 집을 비웠던 많은 날들 중 '다케'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케'의 안락사를 권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힘들어 하는 '다케'를 이끌고 산책을 나가고, '다케'의 용변을 치우고,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다케'의 모습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 몇 년간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맛집 탐방 프로그램이나 음식 광고를 보면서 "저거 맛있겠다" 하고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걸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구마모토에 갈 때마다 아버지는 타코야키나 야키소바, 이것저것 싸구려 주전부리를 사오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앞으로 더 살고 싶다는 갈망을 보여주는 유일한 반증이었다. 매번 맛도 없는 건조음식에 통조림을 섞어주면서, 나는 부디 개에게는 그런 갈망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다케가 꽁치 머리나 쇠고기 뼈다귀, 접시에 묻은 케이크 재료를 제발 떠올리지 않기를." (p.193)

 

개와 함께 같은 방에서 뒹굴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솔직히 작가의 심정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군말 없이 개의 수발을 들 자신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오롯이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면서 울고 웃었던 2년여의 기록이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새삼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졌던 이유는 명확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개나 사람에게 다를 게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내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다케와 함께한 마지막 2년 동안, 나는 삶과 죽음의 민낯과 마주했다. 다케를 보내고 내 삶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상념도 아스라이 사라지고 늘 그렇듯 밥과 산책으로 이루어진 일상이 반복된다. 촉촉한 혀와 살랑거리는 꼬리,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선량한 눈망울이 내 곁에 있다. 니코와 루이가 몸을 기대온다. 무겁고 귀찮다는 생각도 잠시,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에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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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보도에는 새로 생긴 물웅덩이와 그 위를 덮은 낙엽들이 이 즈음의 중첩된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컨대 스산한 바람이 부는 오늘과 흐린 가을 하늘에 그려지는 옛추억의 풍경이 번갈아가며 펼쳐지는 것입니다. 비에 젖은 비둘기떼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갑니다. 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오후에는 비도 그치고 색이 바랜 희미한 해가 무표정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힘없이 주물렀습니다. 의무를 다하려는 듯 말이지요. 어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안톤 루빈슈타인의 '멜로디 F장조'를 들었습니다. 성글게 짜여진 하루의 시간들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가볍게 흔들립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긴 그리움처럼 가없는 세상으로 나를 데려갈 듯했습니다.

 

계절은 오늘을 축으로 빙글 돌아 겨울 쪽으로 향하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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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비가 조금 내렸다. 색이 변한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지고 보도에는 이내 가벼운 우울이 서너 겹 깔렸다. 우산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보도 위의 싱거운 우울을 밟고 지나쳐간다. 휴일이 주는 둔탁한 질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낮고 어둡고 농도가 짙은 우울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허무맹랑하지만 겉보기에 화사한, 그늘이 없는 기대는 휴일 오전에 그들이 갖는 보편적인 느낌이리라.

 

텔레비전을 틀자 '역사 교과서', 국정화' '좌편향', '올바른' 등 뉴스에는 그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이 의미도 없이 흩어졌다. 교과서의 소비 주체인 학생들의 의견은 도외시 한 채 자기네들 멋대로 결정하고, 멋대로 뜯어고치면서 그것이 옳다고 믿는 돌대가리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이 돋는다. 그들도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이 다할 테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그 시간의 어둠과 우울은 가을 휴일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꺼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오늘자 조간신문을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혹은 텔레비전 아침 뉴스를 잘 이해하거나. 그러나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따로 있는 듯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대한민국의 과거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보다 화려했으니 현재에 대한 불만이 더러 있더라도 참고 견디었으면 좋겠다는 뜻일 게다. 즉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다. 어디서 많이 듣던 문장이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장도 아마 그것일 게다.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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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m art 일센티 아트 - 1cm 더 크리에이티브한 시선으로 일상을 예술처럼 1cm 시리즈
김은주 글, 양현정 그림 / 허밍버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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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마도 "좋을 때다."가 아닐까 싶다. 심지어 아직은 어린 티가 줄줄 흐르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만난 초등학생들을 향해 "좋을 때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걸 볼라치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놈이나 그 놈이나 비슷한 또래로만 보이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인생에 있어서 안 좋은 때란 과연 없는 것일까? 얼핏 생각하면 "그 걸 말이라고 해?" 따질 만도 하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 제 손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다 보면 행복한 날보다 불행한 날들이 훨씬 많은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보면 '그 때가 좋았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듯싶기 때문이다. 나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덕담 삼아 이런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어떤 일의 결과가 아쉽고 후회된다면 그건 시간에 맡기면 돼. 장담하건대 미래의 언젠가는 '그래도 그 때가 좋았지' 생각할 날이 반드시 올 거야."라고 말이다. 가까운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과거는 언제나 좋은 날들로 변해갈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보면 누구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신의 삶은 오롯이 과거만 남게 되고, 그 모든 과거는 '그 때가 좋았지' 로 명명된 충만한 날들로 변해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삶의 개수보다 다양한 날들이 존재한다./그러니 별일 없는 조용한 날들에게도 다정한 인사를 건네자.//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아닌/내 목소리를 듣는 차분한 금요일,/소수의 소중한 사람만이 모인 생일,/따뜻한 찌개와 가족이 있는 크리스마스,/원 없이 뒹굴거린 주말-/두근거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별일 없는 조용한 날들로부터//또한 온전히 살아 있음을/느낄 수 있다." (p.300~p.301)

 

김은주 작가의 《1cm art》를 읽었다.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않는다. 통일성이 없고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여, 《1cm 첫 번째 이야기》나 《1cm+》가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 때에도 대형서점의 한쪽 귀퉁이에 서서 대충 훑어보았을 뿐 이 책을 사서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다. 오히려 《1cm》시리즈에 열광하는 젊은 사람들이 이상하게만 보였었다. 생각해보면 SNS의 짧은 문장에 익숙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데 아날로그에 익숙한 나의 관점에서 괜히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은 아닌가 슬쩍 미안해진다.

 

책의 곳곳에는 다양하고 기발한 아트 미션(art mission)이 등장한다. 독자 자신이 스스로 쓰거나, 그리거나, 접거나, 사진 찍는 미션인데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누군가에게 선물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거나 고마움을 표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낭만적인 고백에는 영 젬병인 나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뿐더러 '귀차니즘'만 한 움큼 손에 쥐었다.

 

"이제 이 책의 도움 없이 일상에서 당신만의 ART를 만들어 가 보세요. 주어진 미션이 아닌 스스로, '특별하게'가 아닌 일상적으로, 매일의 즐거움, 찾고 싶었던 의미, 더 나은 삶을 만드는 작은 변화들을 만나 보세요. 그럼으로써 일상을 재발견해 보세요." (p.187)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그럴수록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들이 점차 따뜻함을 더해갈 것이다. 어쩌면 성긴 여름의 틈바구니를 조밀한 그리움으로 채우게 되는 계절이 가을인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아침 기온은 조금씩 내려가겠지만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가슴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따뜻해진 가슴으로 우리는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 틈에서 곁불을 쬐듯 이 책을 읽는 누군가의 가슴도 따뜻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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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essay
강원구 지음 / 별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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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묻은 노트에서 저의 지난 과거를 띄엄띄엄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이가 빈 징검다리처럼 시간의 단절을 문득문득 깨닫게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영영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저으기 안심하는 까닭에 남의 일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과거의 기억에 꼭뒤를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애초부터 사라지게 됩니다.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이죠,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 적어 놓은 해묵은 기록을 타인의 삶인 양 읽을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입니다.

 

오래된 노트에서 오늘 제가 발견한 글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내내 부끄러울 것입니다."

 

따로 부연된 설명은 없었습니다. 기분 좋은 사유란 그런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쓴 글을 뚱딴지 같은 소리라고 비하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이런 글을 왜 썼을까?' 오래도록 생각한다고 해서 아주 짧은 순간에 저간의 흐름을 떠올리고 그때의 정황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느니 오히려 그 문장이 갖는 의미 너머의 다른 어떤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그런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제 오래된 친구에게 위의 인용구를 읽어주고 어떤 의미일 것 같느냐,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여자에 대한 저주의 말이 아닐까, 하는 대답이 날아왔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엄연히 생각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니까요. 저는 그 친구의 생각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평가는 미숙하고 철없다 여기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는 내내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 비하면 언제나 어린 사람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보다 아주 많이, 혹은 단 하루, 단 한 시간 전의 나라고 할지라도 지금의 나에 비하면 젊고, 어리숙하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강원구의 에세이집 《S》를 읽었던 오늘 아침에 제 노트의 글귀 하나를 들고 생각에 잠겼던 것도 다 이런 인연이지 싶습니다 . 저는 사실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서울의 조용한 골목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사는 파워 블로거이자 작가라고 소개되었기에 '그렇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5년 만에 두번째 책을 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사람, 사랑, 삶, 식구, 시간에 대해 그때그때 적어 두었던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엮어낸 듯합니다. 그것은 마치 제 노트에 적어 두었던 생경한 문장처럼 많은 생각을 불러오게 합니다.

 

"한편 인생을 무책임하게 사는 것 같지만 뒤집어보면 인생은 책임지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나에게 '어차피'는 '기왕에 결정했다면'의 의미가 강하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뒤로 돌아가기보단 일단은 직진이다. 이젠 직진을 보완할 다른 것을 찾으면 그뿐이다. 어차피,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니던가." (p.213)

 

작가도 지금쯤 사람들 시선이 없는 어느 방에 홀로 앉아 책으로 나온 자신의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읽는 내내 부끄러워 하면서 말이지요. 작가에게 이 글은 5년 전, 혹은 1년 전 어느 날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적어 두었던,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작가에게서 나온 글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지금의 내가 늙어가는 것에 비례하여 자신의 과거를 한없이 젊어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삶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이 봄날의 새싹처럼 올망졸망 돋아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늦은 시작이 있을 뿐, 그 자체로 늦은 경우는 없다. 혹시 나잇값이란 핑계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건 아닌지. 서른이 넘으면서 청춘이 끝났다는 생각에 슬퍼하기도 했고 마흔이 넘으면서 왠지 모를 두려움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난 지금의 내가 참 좋다." (p.251)

 

작가도 어쩌면 과거에 썼던 자신의 글귀에 한 줄 설명도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거나 그 글을 썼을 때의 상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못내 아쉬워 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의 작가와 지금의 작가는 누가 뭐래도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몸도, 생각도, 소유한 경험도 모두 다른 새 사람이지요.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겠지요. 이 글을 썼던 과거의 작가는 되려 지금의 작가에게 묻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라도 더 산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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