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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essay
강원구 지음 / 별글 / 2015년 7월
평점 :
때묻은 노트에서 저의 지난 과거를 띄엄띄엄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이가 빈 징검다리처럼 시간의 단절을 문득문득 깨닫게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영영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저으기 안심하는 까닭에 남의 일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과거의 기억에 꼭뒤를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애초부터 사라지게 됩니다.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이죠,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 적어 놓은 해묵은 기록을 타인의 삶인 양 읽을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입니다.
오래된 노트에서 오늘 제가 발견한 글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기억하는 한
당신은 내내 부끄러울 것입니다."
따로 부연된 설명은 없었습니다. 기분 좋은 사유란 그런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쓴 글을 뚱딴지 같은 소리라고
비하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이런 글을 왜 썼을까?' 오래도록 생각한다고 해서 아주 짧은 순간에 저간의 흐름을 떠올리고 그때의 정황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느니 오히려 그 문장이 갖는 의미 너머의 다른 어떤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그런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제 오래된 친구에게 위의 인용구를 읽어주고 어떤 의미일 것 같느냐,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여자에 대한 저주의 말이
아닐까, 하는 대답이 날아왔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엄연히 생각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니까요. 저는 그 친구의 생각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평가는 미숙하고
철없다 여기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는 내내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 비하면 언제나 어린 사람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보다 아주 많이, 혹은 단 하루, 단 한 시간 전의 나라고 할지라도 지금의 나에 비하면 젊고, 어리숙하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강원구의 에세이집 《S》를 읽었던 오늘 아침에 제 노트의 글귀 하나를 들고 생각에 잠겼던 것도 다 이런 인연이지 싶습니다 . 저는 사실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서울의 조용한 골목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사는 파워 블로거이자 작가라고 소개되었기에 '그렇구나' 생각할
뿐입니다. 5년 만에 두번째 책을 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사람, 사랑, 삶, 식구, 시간에 대해 그때그때 적어 두었던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엮어낸 듯합니다. 그것은 마치 제 노트에 적어 두었던 생경한 문장처럼 많은 생각을 불러오게 합니다.
"한편 인생을 무책임하게 사는 것 같지만 뒤집어보면 인생은 책임지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나에게
'어차피'는 '기왕에 결정했다면'의 의미가 강하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뒤로 돌아가기보단 일단은 직진이다. 이젠 직진을 보완할 다른 것을 찾으면
그뿐이다. 어차피,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니던가." (p.213)
작가도 지금쯤 사람들 시선이 없는 어느 방에 홀로 앉아 책으로 나온 자신의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읽는 내내 부끄러워 하면서
말이지요. 작가에게 이 글은 5년 전, 혹은 1년 전 어느 날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적어 두었던,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작가에게서 나온 글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지금의 내가 늙어가는 것에 비례하여 자신의 과거를 한없이 젊어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삶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이 봄날의 새싹처럼 올망졸망 돋아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늦은 시작이 있을 뿐, 그 자체로 늦은 경우는 없다. 혹시 나잇값이란 핑계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건 아닌지. 서른이 넘으면서 청춘이 끝났다는 생각에 슬퍼하기도 했고 마흔이 넘으면서 왠지 모를 두려움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난 지금의 내가 참
좋다." (p.251)
작가도 어쩌면 과거에 썼던 자신의 글귀에 한 줄 설명도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에 답답해하거나 그 글을 썼을 때의 상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못내 아쉬워 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의 작가와 지금의 작가는 누가 뭐래도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몸도, 생각도, 소유한 경험도 모두 다른 새 사람이지요.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겠지요. 이 글을 썼던 과거의 작가는 되려 지금의 작가에게 묻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라도 더 산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