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마음 - 정말지 수녀의
정말지 글.그림 / 쌤앤파커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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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 는 것이다. 내 생각이 궁금해서 묻는 질문일 수도 있고 대답이 필요 없는 그들 나름의 단순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암튼 나는 좋든 싫든 그런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대방을 그저 멀뚱히 쳐다보게 된다. 나의 이런 행동은 더 이상 그런 질문은 받고 싶지 않다는 시위일 수도 있고, 마땅한 대답을 생각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묻는 사람들은 내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 출신이라도 되는 양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계는 로고스와 질료로 되어 있다'고 외쳐야 하는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당장 파토스(pathos)를 멈추라'고 그륻을 설득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 입 다물라!'가 되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묻는 이유는 명확했다(내 생각에는 단순한 것이지만). 술은 체질적으로 먹지 못하고, 올해 초부터 담배도 끊었고, 그렇다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맨송맨송한 정신으로 노래방을 찾을 리도 만무하고, 주말부부로 살면서 모르는 여인과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니 그들 눈에는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비칠 밖에.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 역시 그들처럼 말했지 싶기도 하고 심하게는 '재수없는 놈'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틈만 나면 책이나 읽어대니 더더욱...

 

<바보 마음>을 쓴 정말지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영혼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함몰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오롯이 '지금 여기'에 정착할 수 있도록,

남의 시선이나 외부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보다

자기 마음의 소리에 더 집중해야 할 일입니다." (p.53)

 

마음이 온통 어지러운 날에는 회초리 삼아 이런 종류의 책을 즐겨 읽는다. 도시에 묶여 살면서 야마오 산세이처럼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논할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를 주장할 것도 아니기에 어찌 됐든 마음을 다스리고 가라앉혀서 나름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수녀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용서하고 쉽게 잊어주는 '바보 마음''이라고 하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자꾸 옆길로 새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사는 재미라... 사는 재미가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언뜻언뜻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넘어집니다.

이 넘어짐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어서는 것이지

넘어지는 횟수에 있지 않습니다." (p.229)

 

내가 생각해도 나란 인간, 정말 재미없게 산다. 새벽부터 일어나 운동하고, 꼬박꼬박 밥 챙겨 먹고, 술도, 담배도, 도박도, 연애도, 게임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바른생활 사나이'가 따로 없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라고 내게 묻는다면 조리있게 대답할 자신은 없다. 어떤 목적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옥죄고 절제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게 편할 뿐이다.

 

"촛불의 역할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지요.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면 누군가는 길을 찾고,

누군가는 글을 읽고,

누군가는 일상의 일을 하겠지요.

그렇게 내가 쓰이고 닳아 없어짐으로써

누군가의 삶에 빛을 던져주는 일.

그 일을 하고 싶고

그 소명으로, 그 '죽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까지." (p.263)

 

내일이면 벌써 금요일, 일주일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낮에 또 누군가가 '주말에 뭐하세요?' 내게 물었었다. 나는 그때 우물우물 자신없는 목소리로 '글쎄, 책이나 한 권 읽을지...' 했었다. 내 기준은 그들의 잣대에서 번번이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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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 - 하루가 더 행복해지는 30초 습관
플랜투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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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까지 어둠은 좀체 벗겨지지 않았다. 언제였던가. 오늘처럼 운동을 하고 내려오는데 아파트 단지의 곧게 뻗은 스카이라인 위로 덩그러니 떠 있는 보름달을 보았었다. 아침이 훤히 밝아오는 그 시각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달이 그려내는 둥근 원은 약간 으스스하고 괴기스러운 광경이었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가 생각났었고 그래서 더 으스스한 기분에 빠져 들었었다. 바보 같은 짓이지만 혹시 몰라서 다른 하나의 달이 더 뜨지는 않았는지 한참을 찾아보기도 하고 말이다. 오늘 아침에는 그런 달은 보지 못했지만 비에 젖은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나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랐는지 고양이는 숲으로 곧장 달아났지만.

 

하루의 시작치고는 꽤나 재미있는 출발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든다는 건 일상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이미 '아는 것'의 범주에 무차별적으로 던져질 준비를 하게 되거나 이따금 새롭다 느껴지는 어떤 것들도 내 시선을 그저 잠깐 사로잡다가 이내 '아는 것'의 범주로 내던져진다. 하루는 무수히 많은 날들 중 하나일 뿐 다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사라진 지 오래가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야말로 개벽을 하듯 '죽음'의 추상성이 현실적인 무엇으로 구체화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토록 급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1℃ 인문학』을 통하여 네이버 블로그 'Better'를 알게 되었다.'1년 8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국내외를 넘나들며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공유해온, 꿈 많고 순수한 네 명의 청춘'(이승준, 한소라, 여상윤, 김현지)이 깊은 울림을 주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파함으로써 온라인과 SNS를 뜨겁게 달구었었나 보다. 그들 네 명의 젊은이들이 펴낸 이 책 『1℃ 인문학』은 1. 아이디어(IDEA), 2.사랑(LOVE), 3.용기(COURAGE), 4.사람(PEOPLE), 5.사회(SOCIETY)의 다섯 가지 주제를 나누고 각각의 주제에 대하여 10개의 에피소드와 인터뷰를 싣고 있다.

 

그렇게 모인 50개의 에피소드는 대개 몇 장의 사진과 짧은 글귀로 이루어져 있어 하나를 읽는 데 30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 책의 부제 "하루가 더 행복해지는 30초 습관"이 말해주는 것처럼 되내어 생각할수록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서울 맹학교'를 졸업하는 여덟 명의 졸업생이 받은 특별한 졸업 앨범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앨범이다. 3D 프린터를 이용해 학생들의 모습을 스캔하고, 그 이미지를 토대로 졸업앨범이 제작되었다.

 

"추억이란 지나간 시간의 기억으로, 항상 좇을 수밖에 없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억의 감각에 우연히 닿으면 언제 잊었냐는 듯 어느새 그 시간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추억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시간이 많이 흘러 서로 다른 이야기 속에서 살더라도 지금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감각'을 선물 받았기 때문 아닐까요?" (p.102)

 

소록도의 한센인을 위해 공연을 한 가왕 조용필의 이야기, 유기견들의 마지막 표정을 그림으로 남기는 마크 바론의 이야기, 두 눈을 잃고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며 살고 있는 고양이 허니비 이야기, 삶 자체가 혁명이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 이야기, 이웃을 위해 계산할 돈을 미리 내는 미리내가게 등 우리 이웃, 동시대의 사람들이 사는 지구촌 시민의 특별한 삶을 소개하고 있다.

 

"어쩌면 추위에 얼어붙은 우리의 몸을 녹이는 건 난로도 히터도 아닌 두 손을 맞잡은 순간의 따뜻함이 아닐까요?" (p.408~p409)

 

세월이 가면 갈수록 삭막하고 각박해지는 세상에 우리의 가슴마저 차갑게 식어버린다면 우리는 어쩌면 삶의 의지마저 꺾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너와 나의 체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99퍼센트의 부정에 맞서 싸우는 1퍼센트의 긍정은 감동이라는 매개체가 있기에 승산이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1퍼센트의 긍정은 다만 1퍼센트의 힘으로 사그라들 뿐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혹은 이 책을 쓴 네 명의 젊은이는 서로를 향해 이렇게 외칠지도 모르겠다. "감동하라! 그러면 살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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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동안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해!'라는 말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너무도 흔해빠져서 그 가치마저 사라진 듯한 그 말을 무에 생각할 게 있다고 그렇게 오래 생각했느냐 하겠지만 나는 그래서 더 오래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대충 생각한 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아주 열심히,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정말 열과 성을 다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나란 놈, 내가 생각해도 참 유별나고 별난 놈이다.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나 보다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걸 한사코 끄집어 내어 뒤집어도 보고, 나누어도 보고, 말하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여 정량화를 하고 싶으니 말이다. 시쳇말로 "노답!!"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것 하나를 알게 되었다. 진행형의 구분이 애매한 우리말에서 '사랑하다'는 진행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한 시점에 정지된 상태로 읽는다는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사랑은 연속적인 시계열의 진행이지 한 순간에 들었던 심리 상태만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말이다. 예컨대 나는 '지금' 널 무지무지 사랑하지만 조금 지난 '다음 순간'에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그 강도가 때에 따라 점층적이거나 점강적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의 그 순간의 마음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 또는 책의 주인공이 그 말을 하는 순간의 심리로만 읽는다는 것은 진행형으로 읽었을 때와 상당한 의미 차이가 난다. 지금껏 나만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동안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저 사람이 지금 나를 사랑하는구나'쯤으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감정은 결코 순간적으로 들었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사랑해'라는 말을 순간적인 심리 상태로 받아들였던 분이 있다면 의식적으로나마 진행형으로 생각할 것을 권한다. 그래야만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다. 삶을 사랑의 과정으로 볼 때 사랑이 순간적이라면 그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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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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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의 글에서는 언제나 마른 먼지내가 난다. 도무지 헐거운 부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정이 내 가슴께를 콕콕 찌른다. 나는 이따금 밭은 기침을 하며 책을 내려 놓는다. 내 게으른 호흡으로는 작가의 철두철미를 차마 감당하지 못하는 까닭이며, 그의 기름기 없는 문체에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권의 책을 편히 읽도록 하기보다는 한 권의 책을 가슴으로 다시 쓰라 명령하는 것만 같다.

 

나는 작가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어렵게 쓴 시는 독자도 그만큼 어렵게 읽어야 한다.'고 햇던 대학 친구의 말을 나는 몇 번이나 곱씹고 되내었다. 지난한 독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이 힘겨움이 막 입대한 훈련병의 모습으로 화하여 쉬고 읽기를 반복하게 한다. 훈련병 시절에는 어머니의 시큼한 땀냄새가 그렇게 그리웠었지. 그러나 김훈의 글에선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려야만 했다.

 

"지금은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다들 늙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4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p.33~p.34)

 

나의 할머니는 6.25 동란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었다. 그 기구한 운명에 지지 않으려는 듯 할머니는 언제나 꼿꼿하셨다. 이따금 할머니 방에서 잠을 잔 날이면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 흐트러짐 없이 앉아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먼저 보곤 하였다. 할머니는 종지에 떠온 찬물을 머리에 찍어 바르시며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팽팽히 당겨 말아쥐고는 언제나 그렇듯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그것은 어린 손자에게조차 당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당신의 운명에 대한 분노이자 성스러운 기도였다.

 

나는 위의 인용문을 이 책 <라면을 끓이며>에서 처음 보았던 게 아니고 28인의 소설가가 쓴 <내 영혼이 한뼘 더 자라던 날>에서 먼저 읽었었다. 나는 그때 작가가 말하는 '풍화의 슬픔'을 내 가슴께에 한 자 한 자 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살을 도려내는 고통인 양 깊은 울음을 울음 울게 했다. 이 책은 실상 바쁜 식사를 마치고 하루의 밥벌이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지만 나는 예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받았던 오래된 슬픔과 이 책에서 처음 읽는 새로운 슬픔이 마구 뒤섞이는 바람에 하루의 정해진 끼니를 이따금 건너 뛰어야만 했다.

 

"주어와 술어를 가지런히 조립하는 논리적 정합성만으로는 세월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진상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이 사태를 개관화해서 3인칭 타자의 자리로 몰아가는 방식으로는 이 비극을 우리들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나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모든 죽음에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p.175~p.176)

 

현재는 언제나 간절함이 배어 있다. 그러므로 간절함이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월에 밀려 과거로 변한 지금은 그 간절함 밖의 간절함이었던 듯 덧없고 쓸쓸하기만 하다. 머리가 희끗해진 작가의 글을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읽게 될지 알지 못한다.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지금 읽는 이것과 서먹해진 과거의 저것만 있을 뿐이다. 아직도 나는 작가가 말한 '풍화의 슬픔'이 오래도록 아프다.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쓸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 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p.410)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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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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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잡아 2,3일이면 대충 다 읽지 않을까, 했던 것이 일주일을 넘기고 나서야 겨우 다 읽었다. 딱히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닌데 유난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이 종종 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읽다 보면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고 말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알타이 여행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얄팍한 책의 두께와 여행기라는 말에 '저것쯤이야.' 생각했었다. 넉넉잡아 이삼 일, 맘만 단단히 먹으면 하룻밤에라도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웬걸,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진도는 좀체 나아가지 않았고 하릴없이 날짜만 축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진이나 그림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다른 여행기와는 달리 이 책은 여느 소설책보다 더 빾빽한 글씨와 알타이 체류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공간적 이동이 적었고, 우리에게는 한없이 낯선 알타이의 묘사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나는 '궁금하면 500원'이 아니라 천 원을 받는다 해도 알타이에 대해 딱히 궁금한 게 없었다. 책이 지루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에 맞춰 내가 바빠진 탓도 있었고, 기대했던 여행기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변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 여행자들은 말을 잊은 채 지상의 풍경에 고정했다. 이곳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그 세계, 그 공간에 속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탄 비행기는 1만 년 전의 오늘을 향해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울란바토르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이곳은 알타이다, 나는 알타이에 있다는 감정이 비로소 가슴에서 피어올라 향나무의 흰 연기처럼 나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p.62)

 

작가의 특이한 이력처럼 여행지 선정도 색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이화여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한동안 공무원(병무청)으로 일하다가 무작정 쓴 소설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 이 1993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실림으로써 등단했다고 한다. 그 후 독일에서 1년간 체류하던 그녀는 2002년 다니던 직장에 사직원을 제출하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2009년 여름 그녀가 알타이 고원의 추위에 떨면서 유르테에 불을 피울 야크똥을 모으는 고생을 자초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여행기가 아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것은 여행기라고 불리기에는 어떤 요소가 너무 부족하거나 혹은 너무 넘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결코 여행과 함께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나로부터의 도피였으며, 특별히 흥미진진하거나 남다른 사건이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p.11)

 

독일어로 소설을 쓰는 몽골 샤먼이자 투바 부족의 추장인 갈잔 치낙에게 이끌려 이름도 낯선 알타이-투바를 그녀는 2009년부터 세 번이나 다녀왔다고 한다. 대부분이 유럽인인 여행객 중에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작가는 끝도 알 수 없는 스텝 초원을 말을 타고 달려보기도 하고, 요리에 재주가 없다는 그녀가 20명 이상의 식사를 자원해서 준비했다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기도 하고, 여행의 마지막 무렵에는 병명도 알지 못하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인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문명으로부터 잊혀진 몇 안 되는 지역 알타이-투바를 그녀는 그렇게 겪어냈다.

 

"우리들 머리 위의 하늘은 투명한 푸른빛의 폭포이다. 깨끗하고 맑은 대기는 우리의 영혼을 스치며 너울거린다. 찌르는 듯한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스텝 초원에 앉아 빵에 부드러운 야크 버터와 달콤한 딸기잼을 발라 밀크티와 함께 먹는다. 밀크티는 항상 한 번에 기본으로 두세 잔을 마셨다." (p.154)

 

작가의 여행기라기보다는 알타이-투바 유목민 체험기에 가까운 이 책에서도 첼로를 전공한 오스트리아 여인 마리아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녀는 5개 언어를 할 줄 알고, 유목민과 결혼하여 알타이에 살고 싶다는 염원으로 나이 어린 알타이 유목민 총각과 소개팅을 하고 몽골어와 투바어까지도 배운다. 그러나 문명에 길들여진, 오페라에 열광하는 마리아는 열병과도 같았던 알타이앓이에서 금세 벗어난다.

 

"나는 누구였던가. 나는 이곳에서 그것을 완전히 잊고 지냈는데, 눈앞으로 닥친 귀향을 생각하니 갑자기 그런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 나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나 자신이 되기를 그토록 강요하는 불안과 혼돈이 없으며, 그래서 늙은 뿔처럼 단단히 뭉쳐 있던 나의 자아는 무엇인가의 영향 아래 서서히 부드러워졌고, 점점 밀도가 희박해지고 가벼워져서 검은 호수 아래로, 향나무의 연기를 따라, 밤 늑대의 울음 속으로, 달의 둥근 얼굴 속으로 휘발되어버렸고, 그럼으로써 도리어 나는 검은 호수와 향나무의 연기, 늑대의 울음, 달의 얼굴로 동시에 모두 존재할 수 잇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p.224)

 

여행이 이따금 돌이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나를 이끌 때가 있다. 이곳에 왜 왔는지, 나는 이곳에서 과연 무엇인지, 문명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는지,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작가의 의식 저편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쩌면 작가는 지금 그녀의 가슴 한켠에 알타이의 햇살 한 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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