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하고 싶은 말
김수민 지음, 정마린 그림 / 쌤앤파커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아, 여기가 분기점이로구나'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요즘 나오는 신간 도서를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가기'보다는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한 까닭에 시대의 흐름을 읽기는커녕 걸려 오는 카톡 문자도 미처 다 읽지 못하는 처지이고 보니 시대의 흐름을 읽는다는 건 여유있는 사람의 사치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게 된 데에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한 것보다 심리적 여유가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일 터, 올 한 해는 뭔가 다른 방식의 삶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신간 도서와 시대의 흐름,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의 상관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책도 일종의 상품이고 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시점의 신간도서나 베스트 셀러를 살펴 보면 그 시절의 경제 상황과 유행을 책만큼 잘 드러내는 것도 드물겠다 싶을 정도로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한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수치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고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꽤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아마 그럴 것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다.

 

2015년에는 유독 다양한 분야의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던 해인 듯하다. 자비를 들여 책을 내는 사람도 많았고, 그동안 SNS에서 유명세를 타던 많은 사람들이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책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종류의 책을 그닥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도 어쩌다 보니 줄잡아 대여섯 권은 읽었지 싶다. 출판계의 불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몇몇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니면 몇 권 팔아보지도 못한 채 창고행을 각오해야 하는 게 작금의 현실인지라 정규 코스를 밟아 등단한 신인 작가의 작품을 출판하느니 차라리 SNS의 유명인이 쓴 작품을 출판하는 게 오히려 광고비도 적게 들고 위험성도 적을지 모른다.

 

김수민의 <너에게 하고 싶은 말>도 그런 책이다. 저자는 '피아노 전공을 목표로 음대 진학을 꿈꿨지만 실패한 후', 지금은 페이스북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운영하며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사랑, 이별, 우정, 학업, 진로 등과 관련한 상담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SNS를 통해서 수천 명의 연애 상담을 했어요. 연애를 하면서 배웠던 것, 나는 이러지 못했지만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것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애 상담을 꺼리기 시작했습니다. 연애에 대한 조언은 무의미하거든요. 나도 그랬고, 상대도 그랬듯이, 결국 옆에서 백날 좋은 말 해줘도, 결국엔 우리 마음대로 행동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니까요.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후회되는 인생은 없답니다." (p.44)

 

대체로 이런 식이다. 저자의 글과 정마린의 삽화가 책 전체를 채우고 있다. SNS의 특성상 정곡을 찌르는 짧고 간결한 말이 주가 되겠지만 때로는 연인들에게나 어울릴 만한 달달한 말은 왠지 모르게 닭살이 돋고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는다. 내가 구식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사랑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겠지만 나처럼 구식의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에게 사랑은 표현조차 아까워 꽁꽁 숨겨두어야 하는 어떤 것일 때가 많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이 넘쳐나는 요즘 세태를 보면 나는 문득 '사랑 모르고 오용 말고, 사랑 좋다고 남용 말자.'라는 말을 불쑥 내뱉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랑을 하든 거리보다는 사랑에 대한 믿음과 한결같은 마음과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p.52)

 

책에는 사랑 말고도 다양한 주제의 경구나 잠언과 같은 글들이 실려 있다. 우정이나 이별, 돈과 명예, 인생과 성공 등 흔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 알듯 말듯 모호하여 미처 정리되지 않았던 것들이 저자의 명쾌한 말 한 마디에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 든다. 하루 5만여 건의 '좋아요'를 기록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방법만 찾지 말고 과거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세요. 오늘을 어제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p.197)

 

2016년도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는 현재,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어나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침을 먹고, 몇 년 전이나 어제처럼 책을 읽었다. 행복이란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꿈이 마냥 크기만 했던 청소년기나 사회 초년생이었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와 같은 말이 내 인생 최대의 금언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꾸준히 책을 읽고, 꾸준히 간절함을 키워라' 당부하고 싶다. 간절함은 독서와 사색을 자양분으로 한다. 그리고 꿈은 간절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따금 국회의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랭크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하루 종일 붙박이로 랭크되는 건 처음 보는 듯하다. 그것도 '필리버스터(Filibuster)'라는 낯선 용어와 함께. 게다가 '테러방지법'과 '국회방송' 등 평상시라면 실시간 검색어 상위는 고사하고 국민들의 관심권에서 한참이나 멀었을 듯한 단어들이 상위를 차지했다. 물론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을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이고 보니 다 같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정말 모처럼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은 좋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은수미 국회의원은 여자의 몸으로 장장 10시간 18분 동안 단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이것은 1969년 6선의 고 박한상 의원이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했던 10시간 15분 기록을 깬 것으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이라고 했다. SNS에는 은수미 의원을 격려하는 글이 쇄도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의 모습을 보았던 게 언제 적인지... 물론 은수미 의원에게 삿대질을 하고 막말을 하는 등 그동안 보여왔던 저질 국회의원의 모습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어디나 그런 미친 X은 항상 있게 마련이니까. 수억 명의 데이터 안전과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FBI의 요구를 과감히 거절한 애플의 최고 경영자 팀 쿡의 용기에서 보듯 국가의 안보를 빌미로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하나 둘 양보하다 보면 결국 국가는 '빅 브라더'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는 걸 팀 쿡은 잘 알고 잇었던 것이다. '테러방지법'도 그런 것이다.

 

어쩌면 필리버스터에 참여했던 모든 의원들의 헌신이 정부와 여당에 의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국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열정은 국민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게 정확히 언제쯤의 일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과거의 어떤 기억과도 연결되지 않는, 그것은 마치 내 기억의 지도 위에 펼쳐진 작은 섬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기억이 기척도 없이 문득 떠오를 때면 그게 혹시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나의 추억인 양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꿨거나. 아직 나는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아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도 아닌데 그런 기억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나는 몹시도 당혹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애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도 그런 기억 중 하나였다. 이 책을 내가 정말 읽었던 것인지, 그렇다면 언제 읽었던 책인지 내 기억에는 없었다. 책의 내용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기억도 없는지라 나는 마치 아련한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어느 책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표지와 제목,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슬픈 이야기를 작가는 끝까지 간결하고 밝은 문체를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기억의 뒤편에서 배경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스스로 책을 펼쳐 나는 적어도 한번쯤은 내 눈으로 책의 내용을 더듬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 어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의 흐린 내 기억에 시간만 다른 동일한 기억을 '덮어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람은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그것을 덮어쓰기 한들 과거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지 못했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다시 읽으면서 닳아 흐릿해진 기억과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들을 마치 밀린 빨래를 돌리기 위해 색깔별로 세탁물을 분류하듯 하나하나 확인해야만 했다.

 

소설은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한대수와 동갑내기 최미라의 삶을 아들 한아름의 손에 의해 재구성하는 걸로 시작된다. 아름이는 조로증을 앓는 희귀병 환자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낳았던 때의 나이가 되었지만 신체 나이는 여든 살의 노인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재미있는 자식이 되는 게 꿈이라는 아름이는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삶을 아직 오지 않은 열여덟 살 생일에 부모님께 선물로 드릴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어.'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p.79)

 

아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고 하여 새롭게 알게 된 것들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하여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다. 아름이의 눈에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젊은 부모가, 그 시절에 겪을 수 있는 젊음이 무척이나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고민하다 '그런 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부모의 얼굴이라 부른다'라는 문장을 이어붙였다.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지,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그러고는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도 어리고, 목도 어리고, 머리카락도 어린 내 부모. 그들은 어딘가 불량해 보이고 가슴이 시리도록 젊었다. 나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향해 손을 뻗듯 손가락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p.78)

 

외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스포츠용품점을 하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고 부천으로 이사한다. 자신의 병원비로 늘 돈에 쪼들리던 부모님은 아들의 병이 심각한 수준에 다다른 것을 알면서도 돈 때문에 입원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아빠의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아름이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노라고 부모님을 설득한다. 엄마의 어릴 적 친구였던 피디 아저씨는 "이웃에게 희망을!"이라는 자신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아름이네 집 형편을 알리고 시청자의 온정을 기대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TV에 출연한 후 아름이는 다시 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되었고 친구처럼 지내던 이웃집 장씨 할아버지와도 작별한다. 병원에서 자신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이 보낸 시청 소감을 읽으며 지내던 어느 날 같은 나이의 '이서하'라는 여자 아이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서하에게 아름이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스스럼없이 대하게 된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메일이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서하를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자신의 삶을 소설처럼 쓰고 있다는 아름이의 메일을 보고 서하는 자신에게도 보여달라고 한다. 부모님이 돈 때문에 다투던 날 자신이 쓴 글을 모두 지워버렸던 아름이는 서하 때문에 자신의 삶을 다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하는 같은 나이의 여자 아이가 아닌 가공의 인물임을 우연히 알게 되는데...

 

"가져본 걸 그리워하는 사람과 갖지 못한 걸 상상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 모르겠어.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전자일 거라고 생각해." (p.269)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기억할 새도 없이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버린 까닭에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복기하듯 천천히 떠올리지 않으면 그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인생도 있다는 걸 나는 아름이의 삶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름이는 같은 나이에 부모가 되었던 엄마, 아빠의 푸르렀던 젊음과 화해한다. 미래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그들의 젊음을,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 든 새생명을 향해 아름이는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인형 - 황경신의 사랑동화
황경신 지음 / 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녀간의 사랑이란 건 어차피 동화이거나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랑에 빠진 남녀의 행동거지를 한나절 지켜본 사람이라면, 아니 한나절까지 갈 것도 없이 두어 시간, 혹은 몇 십 분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말과 행동이 성인의 그것에서 한참이나 멀어져 있다는 걸 째빨리 눈치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세살배기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말이지요. 한없이 유치해지지 않으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처럼 철딱서니 없는 행동과 오글거리는 말이 지켜보는 이들의 눈과 귀를 수시로 괴롭힙니다. 그럴 수밖에요.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 밖의 세상, 중력이 사라진 지면 위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랑의 외계인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가슴속에도 그가 남겨놓은 슬픔의 씨앗 하나가 문득 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을 살아 있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들었던 빛나는 한순간이 그 씨앗의 싹을 틔워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그날,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서성이며 시간의 무게를 가늠해보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p.103)

 

황경신의 <종이인형>에는 열다섯 편의 '사랑 동화'가 실려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시크한 문체가 인상적입니다. 작가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쉼표가 도드라진 가벼운 문장이 사랑의 느낌을 팔랑거리게 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이야기의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작가로부터 구연동화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금방이라도 쌔근쌔근 잠이 들어 꿈결에서 작가의 동화 속 주인공을 만날 것처럼 말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고, 시간이 농축되어 있지 않은 열매에서는 어떤 맛도 향도 나지 않는다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잖아. 그건 당신이 늘 한 이야기야. 당신을 만나러 올 때도, 걸어오라고 했잖아.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자마자 만나러 오는 건 싫다고. 오늘 보고 싶으면 내일 오라고 했잖아. 그동안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싶다고. 그 시간 동안 익어야 하는 감정이 반드시 필요한 거라고." (p.82~p.83)

 

작가가 들려주는 사랑 동화는 마냥 달콤하다거나 차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쓸쓸하고도 애틋합니다. 사랑의 질료는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어느 날 허공으로부터 쿵 하고 떨어져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음'을 아프게 깨닫도록 하기도 하고, 사랑이 끝났다고 체념하려는 순간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건 당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슬픈 이야기는 아닐 거야. 그래도 슬픈 비밀을 털어놓자면,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랑이란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사랑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얼마만 한 크기의 절망으로 남게 되는지, 그 절망이 얼마나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지 잘 알거든. 그러니 당신, 내가 혹시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나를 믿지 마. 나는 픽션의 세계만을 신뢰하는 스토리텔러니까." (p.225)

 

황경신 작가는 사랑에 최적화 된 언어를 갖고 있구나,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가볍지만 깊은 우울이, 감각적이지만 영원의 느낌을 담은, 멈춤과 진행의 리듬이 지루하지 않은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따금 '이런 재능은 선천적인 거야. 갈고 닦아서 만들어진 게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약간의 부러움을 섞어서 말입니다. 봄이 오려는지 추위가 몸을 뒤치는 요즘, 달콤 쌉싸름한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 한켠으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올 것만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 이야기
신경숙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냉냉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휴일 아침, 앞동의 어느 집이 이사를 한다. 주차장 한켠에는 이삿짐 센타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화물차 한 대가 서 있고 사다리차에 실려 내려오는 이삿짐을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젊은이들 서넛이 분주하게 싣고 있다. 익숙함과의 결별은 언제나 나른한 피곤을 몰고온다. 지금 과거의 익숙함으로부터 탈출하는 저 집의 사람들은 미래의 어느 순간을 찾아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아마도 한동안 흔들릴 것이다. 산다는 건 흔들리는 순간순간을 오롯이 견디는 일일 것이다.

 

나는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휴일 오전의 익숙하지 않은 풍경으로 인해 한동안 상념에 빠져들었다. 소란스럽던 이삿짐차가 사라지고 아파트에는 다시 겨울 한낮의 고요가 찾아들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신경숙의 소설 <J 이야기>로 시선을 돌렸다. 표절 의혹이 불거졌던 몇 달 전,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않은 채 자숙을 다짐했던 작가의 근황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때는 한국 문학을 대표하던 작가의 대응치고는 옹색하기 그지없는 결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어젯밤 도서관에 들렀을 때, 표지가 다 닳아 나달거리는 그녀의 소설 <J 이야기>를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J 이야기>는 양귀자의 인물소설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작가가 이제 막 등단했던 초기부터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하기 전까지 신문, 잡지, 사보 등에 썼던 글들을 J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전면수정하여 새롭게 재구성한 이 책에는 44편의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다. 책장을 누르면 울컥울컥 슬픔이 배어날 것만 같은 작가 특유의 문체는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한 수식어가 없는 가볍고 단아한 문체는 아마추어가 쓴 습작노트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녀를 J라 지칭해놓고 재구성해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여러 번 웃었어요. 이삿짐을 싸다가 사진첩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진짜 사진첩을 뒤적여보기도 했습니다. 영양결핍에 걸린 사람처럼 글쓰기나 인간관계에 허기가 졌던 청춘 시절을 이렇게나마 건너올 수 잇었던 것은 방금 헤어지고 귀가해 날이 밝도록 전화질을 하며 마음을 소통시킬 수 잇었던 친구들이 있어서였을 겁니다." (p.270)

 

'J는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할 거'라고 작가는 책머리에 썼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어도 늘 사람이 그리웠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의 그늘에서 한 발 물러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절의 작가는 퍽이나 푸르렀을 것이다. 세월에 흔들리며 멀미를 할 때마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편하지 않은 느낌을, 백태가 낀 듯 선명하지 않은 관계를 웩웩 토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제 사람이 있는 그 자리의 풍경을 겉에서 그리지 않는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전화통만 바라보고 있던 J는, 저만큼서 자기를 부르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는 딸아이는 탁자 위의 화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 화병에 꽂힌 꽃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깟 꽃이름은 알아서 뭐 할 거니? 그 말이 새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J는 겨우 참았다." (p.229)

 

한낮이 되어도 추위는 풀리지 않았다. 겨울 추위가 코끝에 걸려 대롱거리는 동안 나는 잠깐 동안 까무룩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삿짐 사다리차의 요란한 기계음이 윙윙 떠도는 듯하다. 서둘러 떠나던 이삿짐차와 그 뒤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딸의 팔을 잡아 끌 듯 낚아채어 승용차에 태우고는 부릉 떠나버린 이름도 모르는 여인. 그 자리에는 이제 아련한 잔상만 남아 나뭇잎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더이상 사람 풍경을 그리지 않는 작가와 까무룩 잠이 들었던 나와 과거로부터 또는 익숙함으로부터 탈출을 서두르던 어느 여인. 우수가 지났는데도  사람 풍경은 여전히 차갑고 쓸쓸하다.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