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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이야기
신경숙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냉냉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휴일 아침, 앞동의 어느 집이 이사를 한다. 주차장 한켠에는 이삿짐 센타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화물차 한 대가 서 있고 사다리차에 실려 내려오는 이삿짐을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젊은이들 서넛이 분주하게 싣고 있다. 익숙함과의 결별은 언제나 나른한 피곤을 몰고온다. 지금 과거의 익숙함으로부터 탈출하는 저 집의 사람들은 미래의 어느 순간을 찾아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아마도 한동안 흔들릴 것이다. 산다는 건 흔들리는 순간순간을 오롯이 견디는 일일 것이다.
나는 베란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휴일 오전의 익숙하지 않은 풍경으로 인해 한동안 상념에 빠져들었다. 소란스럽던 이삿짐차가 사라지고 아파트에는 다시 겨울 한낮의 고요가 찾아들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신경숙의 소설 <J 이야기>로 시선을 돌렸다. 표절 의혹이 불거졌던 몇 달 전,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않은 채 자숙을 다짐했던 작가의 근황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때는 한국 문학을 대표하던 작가의 대응치고는 옹색하기 그지없는 결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어젯밤 도서관에 들렀을 때, 표지가 다 닳아 나달거리는 그녀의 소설 <J 이야기>를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J 이야기>는 양귀자의 인물소설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작가가 이제 막 등단했던 초기부터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하기 전까지 신문, 잡지, 사보 등에 썼던 글들을 J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전면수정하여 새롭게 재구성한 이 책에는 44편의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다. 책장을 누르면 울컥울컥 슬픔이 배어날 것만 같은 작가 특유의 문체는 이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한 수식어가 없는 가볍고 단아한 문체는 아마추어가 쓴 습작노트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녀를 J라 지칭해놓고 재구성해보는 동안 저도 모르게 여러 번 웃었어요. 이삿짐을 싸다가 사진첩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진짜 사진첩을 뒤적여보기도 했습니다. 영양결핍에 걸린 사람처럼 글쓰기나 인간관계에 허기가 졌던 청춘 시절을 이렇게나마 건너올 수 잇었던 것은 방금 헤어지고 귀가해 날이 밝도록 전화질을 하며 마음을 소통시킬 수 잇었던 친구들이 있어서였을 겁니다." (p.270)
'J는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할 거'라고 작가는 책머리에 썼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어도 늘 사람이 그리웠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의 그늘에서 한 발 물러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절의 작가는 퍽이나 푸르렀을 것이다. 세월에 흔들리며 멀미를 할 때마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편하지 않은 느낌을, 백태가 낀 듯 선명하지 않은 관계를 웩웩 토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제 사람이 있는 그 자리의 풍경을 겉에서 그리지 않는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전화통만 바라보고 있던 J는, 저만큼서 자기를 부르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는 딸아이는 탁자 위의 화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 화병에 꽂힌 꽃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깟 꽃이름은 알아서 뭐 할 거니? 그 말이 새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J는 겨우 참았다." (p.229)
한낮이 되어도 추위는 풀리지 않았다. 겨울 추위가 코끝에 걸려 대롱거리는 동안 나는 잠깐 동안 까무룩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삿짐 사다리차의 요란한 기계음이 윙윙 떠도는 듯하다. 서둘러 떠나던 이삿짐차와 그 뒤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딸의 팔을 잡아 끌 듯 낚아채어 승용차에 태우고는 부릉 떠나버린 이름도 모르는 여인. 그 자리에는 이제 아련한 잔상만 남아 나뭇잎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더이상 사람 풍경을 그리지 않는 작가와 까무룩 잠이 들었던 나와 과거로부터 또는 익숙함으로부터 탈출을 서두르던 어느 여인. 우수가 지났는데도 사람 풍경은 여전히 차갑고 쓸쓸하다.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