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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그게 정확히 언제쯤의 일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과거의 어떤 기억과도
연결되지 않는, 그것은 마치 내 기억의 지도 위에 펼쳐진 작은 섬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기억이 기척도 없이 문득 떠오를 때면 그게 혹시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나의 추억인 양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꿨거나. 아직 나는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아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도 아닌데 그런 기억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나는
몹시도 당혹스러워지는 것이다.
김애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도 그런 기억 중 하나였다. 이 책을 내가 정말 읽었던 것인지, 그렇다면 언제 읽었던 책인지 내 기억에는
없었다. 책의 내용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기억도 없는지라 나는 마치 아련한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어느 책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표지와 제목,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슬픈 이야기를 작가는 끝까지 간결하고 밝은 문체를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기억의
뒤편에서 배경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스스로 책을 펼쳐 나는 적어도 한번쯤은 내 눈으로 책의 내용을 더듬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 어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의 흐린 내 기억에 시간만 다른 동일한 기억을 '덮어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람은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그것을 덮어쓰기 한들 과거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지 못했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다시 읽으면서 닳아
흐릿해진 기억과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들을 마치 밀린 빨래를 돌리기 위해 색깔별로 세탁물을 분류하듯 하나하나 확인해야만
했다.
소설은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한대수와 동갑내기 최미라의 삶을 아들 한아름의 손에 의해 재구성하는 걸로 시작된다. 아름이는 조로증을 앓는 희귀병
환자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낳았던 때의 나이가 되었지만 신체 나이는 여든 살의 노인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재미있는 자식이 되는 게 꿈이라는 아름이는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삶을 아직 오지 않은 열여덟 살 생일에 부모님께 선물로
드릴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어.'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p.79)
아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고 하여 새롭게 알게 된 것들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하여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다. 아름이의 눈에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젊은 부모가, 그 시절에 겪을
수 있는 젊음이 무척이나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고민하다 '그런 걸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부모의 얼굴이라 부른다'라는 문장을
이어붙였다. 부모는 부모라서 어른이지, 어른이라 부모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그러고는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도
어리고, 목도 어리고, 머리카락도 어린 내 부모. 그들은 어딘가 불량해 보이고 가슴이 시리도록 젊었다. 나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향해 손을
뻗듯 손가락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p.78)
외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스포츠용품점을 하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고 부천으로 이사한다. 자신의 병원비로 늘 돈에 쪼들리던 부모님은 아들의 병이 심각한
수준에 다다른 것을 알면서도 돈 때문에 입원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아빠의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아름이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노라고 부모님을 설득한다. 엄마의 어릴 적 친구였던 피디 아저씨는 "이웃에게 희망을!"이라는 자신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아름이네 집 형편을 알리고 시청자의 온정을 기대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TV에
출연한 후 아름이는 다시 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되었고 친구처럼 지내던 이웃집 장씨 할아버지와도 작별한다. 병원에서 자신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이 보낸 시청 소감을 읽으며 지내던 어느 날 같은 나이의 '이서하'라는 여자 아이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서하에게
아름이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고 스스럼없이 대하게 된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메일이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서하를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자신의 삶을 소설처럼 쓰고 있다는 아름이의 메일을 보고 서하는 자신에게도 보여달라고 한다. 부모님이 돈
때문에 다투던 날 자신이 쓴 글을 모두 지워버렸던 아름이는 서하 때문에 자신의 삶을 다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하는 같은 나이의 여자
아이가 아닌 가공의 인물임을 우연히 알게 되는데...
"가져본 걸 그리워하는 사람과 갖지 못한 걸 상상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
모르겠어.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전자일 거라고 생각해." (p.269)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기억할 새도 없이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버린 까닭에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복기하듯 천천히 떠올리지 않으면 그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인생도 있다는 걸 나는 아름이의 삶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름이는 같은 나이에 부모가 되었던 엄마, 아빠의 푸르렀던
젊음과 화해한다. 미래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그들의 젊음을,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 든 새생명을 향해 아름이는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