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 엄마와 보내는 마지막 시간
리사 고이치 지음, 김미란 옮김 / 가나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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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족 구성원 중 어느 한 사람과 영원히 이별한다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가슴 한편에 허공을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대체불가의 빈 공간, 그 허공으로 인해 가슴에는 이따금 스산한 바람이 불고 따뜻한 봄날이나 한여름 무더위에도 오소소 한기를 느끼게도 됩니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세월보다 더 질긴 게 사랑이고 그리움인 듯합니다.

 

미국의 전직 코미디언이자 방송인이었던 리사 고이치의<엄마와 보내는 마지막 시간 14일>을 읽는 내내 재작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특별히 정이 깊었다거나 각별했던 부자지간도 아니었건만 가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문득문득 당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더구나 온 가족이 모이는 설과 같은 명절에는 그 감정이 격해지게 마련이지요. 아직도 저는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8월의 어느 날, 당신은 구급차에 실려 보라매 병원 응급실로 향했었지요. 에어콘 바람이 얼마나 차던지 얇은 병원 이불 한 장만 겨우 덮은 채 병상에 누운 당신은 밤새 떨었습니다. 보다 못한 누나가 두툼한 이불 한 채를 집에서 가져오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 주치의 면담 시간이 어찌나 길고 막막하던지요. 가망이 없다는 말보다 더 가혹한 것은 퇴원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가족 누구도 원치 않았던 노인 요양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임을 당신도 직감했겠지요. 이번 설에도 가족들은 고해성사를 하듯 그때의 일을 되짚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말이지요.

 

"나는 잠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상황을 파악하며 장례식장 직원들이 와서 엄마를 데려가 우리도 못 알아보게 만들어놓기 전에 엄마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앤지와 함께 방으로 돌아와 나지막이 흐느끼다 잠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거리로 뛰쳐나가 대성통곡하며 달리지 않았다. 엄마 몸 위로 쓰러져 억지로 떼어낼 때까지 달라붙어 있지도 않았다. 엄마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떼를 쓰거나 엄마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앗다. 전혀." (p.262)

 

2011년 12월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긴 주말을 보내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엄마가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신장투석을 받지 않고 엄마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4일.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셈입니다. 14살 위의 오빠는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작가는 엄마의 뜻을 존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집에서 엄마를 돌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10살 위의 언니가 합류하여 작가와 교대로 엄마를 간호하게 됩니다. 가족들은 엄마의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서류정리며 유품정리를 대행하고, 지인들과의 마지막 인사, 장례식 준비 등 이 세상과 결별하기 위한 모든 절차를 밟아나갑니다.

 

"나는 엄마의 결심을 백 번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심을 실토했을 때 엄마에게 평온함이 엿보였다.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엄마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자주 빛의 기운. 치유의 빛. 실로 오랜만에 엄마가 진정으로 행복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서 뭔가를 놓았을 때 비로소 평화를 찾는 법이다. 그렇게 밀리 고이치 여사도 드디어 평화를 찾았다." (p.36)

 

퇴원할 당시 작가의 엄마는 몸무게 30Kg에 백내장과 심한 척추측만증, 신장 기능 이상으로 제대로 볼 수도, 걸을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거실에서 딸들에게 자신의 용변마저 처리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참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와 그의 가족들은 차분하게 대응한 듯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보내준 사랑과 지속적인 격려, 무한한 신뢰가 없엇다면 전 아마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위"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 이 종이 위에 적힌 모든 단어를 안내해주고, 또 평생동안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천국 소풍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요." (p.275 '감사의 글'중에서)

 

저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요.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요. 산 자에게는 죽음보다도 겨우살이가 또는 하루의 먹거리가 더 다급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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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박물관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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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어쩜 이렇게나 다른지. 어제 꺼내 입은 봄옷이 무색해지는 하루였다. 온종일 나는 맹맹한 느낌의 코를 시원하게 뚫어야 하는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듯 일정한 간격으로 킁킁대거나 집의 거실 옷걸이에 무심히 걸려 있을 패딩점퍼를 생각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프로 9단의 이세돌을 이겼다는 소식과 여당의 어느 의원이 같은 당의 대표를 무참히 깠다는 소식이 막힌 코를 더 맹맹해게 하면서 맹맹한 하루는 부분일식처럼 저물고 있었다. 내 몸이 어제의 온기를 기억하는 까닭에 오늘의 날씨가 더 춥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는 언제나 직선적이다.

 

부분일식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날씨 때문이었는지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오늘 같이 으스스 추워진 날, 윤대녕의 소설집<대설주의보>를 읽으면 금방이라도 봄에서 다시 겨울로 회귀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윤대녕' 하면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가 쓴 다른 책들도 많건만 도통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윤대녕이 떠오른 차에 근처의 도서관에 들러 그의 소설집<도자기 박물관>을 빌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과거의 시간에 저당잡힌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단편소설로 쓰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과거 일정 시점의 기억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제하는 족쇄처럼 작용한다. 돌부리에 채이듯 인생 구비구비마다 만나는 풍파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운명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적극적인 긍정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이 떠안게 되는 순응의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그만 까마득한 심정이 되어 나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p.220)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순순히 따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르자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반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세월의 조탁과정일 수도 있겠다. <도자기 박물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스러진 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편지글 형식의 단편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의 주인공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던 선배에게 20여년 만에 편지를 보낸다. 그것은 단순히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집착이나 갈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의 불꽃을 되살리겠다는 욕망보다는 그 시간에 대한 확인 정도로 그친다.

 

"어쩐지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네, 나는 지금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화염 같은 속내를 고작 말로써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27)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과거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일견 답답하고 어리석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반달'의 주인공은 입대하기 직전 한동안 반목하며 지내던 어머니와 우연한 이별여행을 하게 된다. 제대를 하고 다시 혼자가 된 주인공은 섬이 고향이었던 같은 과 동기를 찾아나선다. 동기는 휴학을 하고 새우잡이 어선을 타고 있었다. 그를 따라 새우잡이 어선을 타게 된 주인공은 선상에서 동성 간의 사랑을 나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그 후 주인공도, 동기도, 어머니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삶의 길을 잃고 헤매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덧없는 꿈이니 고독한 환상이니 화염 같은 고통이니 하는 말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길을 잃었었기 때문에 어쩌면 사랑이 가능했고 가까스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알던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말이다." (p.78)

 

반면 표제작인 '도자기 박물관'은 어려운 환경에서 만나 결혼을 한 두 남녀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아내와는 달리 도자기에 미친 사내는 아내를 돌보지 않고 도자기만 찾아 헤맨다. 결국 아내는 죽고 혼자 남은 사내는 지난 시절을 후회한다. 그리고 병중에 있는 아버지의 묫자리를 둘러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두 형제의 대화로 구성된 '구제역들'의 주인공은 10년 전 헤어진 여성과의 추억을 불러내어 형제간의 반목을 이어나간다. 형이 사랑했던 여인을 동생이 사랑하게 됨으로써 끝내 두 사람과 이별하게 된 여인은 사랑으로 인해 형제의 관계마저 소원하게 만드는 촉매로 작용한다.

 

건강검진을 받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를 쓴 '검역'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지쳐버린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집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어와 만날 때까지'는 아내의 계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아내로 인해 부부관계마저 소원해졌던 주인공 '나'가 삼척 바닷가에 사는 대학 동창의 전화를 받고 동해로 달려가는 이야기이다. 삶은 문어를 안주로 동창과 긴 술자리를 이어가면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문자 메시지를 생각하고 결국 '육 년 전 약속'의 정체와 상대를 기억해낸다.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질병을 핑계로 사랑하는 여인 '숙'으로부터 도망쳤던 '통영-홍콩 간'의 주인공 '백'은 그녀와 함께 했던 통영과 홍콩을 마치 순례를 하듯 더듬으며 지난 과거와의 화해를 도모한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숙은 결국 여정의 끝자락에 이르러 백을 용서한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세월에 순화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결국 소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도. '우리의 삶이 행복하려면 고통의 순간들도 세월 속에 잘 소화시켜야 하는구나' 하는 것도. 세월에 소화되지 않은 가슴 속 응어리들이 결국 소설이 되고 너와 나의 전설이 되는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걸 윤대녕의 소설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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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허리 인대를 다쳐 한동안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다 나은 것 같지만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여지없이 재발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때로는 아주 심하게 아플 때도 있고, 조금 뻐근하다가 이내 좋아질 때도 있다.

 

어제는 좀 과하게 피곤했었던지 오늘 아침부터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설라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와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엉거주춤 걷는 폼이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의원을 찾았다. 찜질에 전기치료에 부황에 침까지 맞고서야 치료가 끝났다. 내일 또 오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에서 소를 잃고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내가 소를 잃었구나. 다시는 소를 잃지 않도록 단속을 보다 철저히 해야겠는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비록 소를 잃었다고 할지라도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현 정부와 지난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오히려 감사할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예컨대 지난 정부의 사대강 공사로 인해 해마다 구경하는 녹차라떼나, 큰빗이끼벌레의 창궐을 보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나 현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으로 인해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 북한과의 강대강 대결로 인해 깨닫게 되는 평화의 소중함 등은 비록 소 잃고 외양간은 고치지 못했지만 소를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국민들이 똑똑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기레기 언론으로 인해 우리가 소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정부의 실정이 잦아지면서 소를 잃었구나, 국민들이 확실히 깨닫는 건 좋은데 이렇게 계속 소만 잃으면 소는 누가 키울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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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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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사소한 일상을 다룬 작품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한동안 선이 굵은 작품에 빠져 있었거나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를테면 심리학이나 철학 등 소위 '형이상학적'이라고 불리우는 작품을 읽은 뒤끝이면 찾아오는 현상이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렇게 몇 번 손바뀜을 거치고 나면 훌쩍 일 년이 가곤 한다. 세월은 참으로 무자비한 구석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는 세월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거나.

 

황석영의 소설 <해질 무렵>을 읽었다. 황석영의 작품은 하도 오랜만이라 일견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장길산>을 제외하면 그의 소설 대부분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한동안 그의 소설을 일부러 피해왔었다. 소설의 소재가 비슷했다는 게 아니라 소설의 문체나 분위기가 어찌나 비슷하던지 이게 이것 같고 저게 저것 같아서 도통 분간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저 소설의 제목만 간신히 기억하여 읽었다 안 읽었다를 가름할 뿐이었으니 그게 어디 제대로 된 독서라고 할 수 있을까. 더이상 괜한 시간낭비는 하지 말자는 게 황석영의 작품을 피해왔던 나의 이유였다.

 

소설은 등장하는 두 인물(박민우와 정우희)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처음에는 그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으니 약간의 답답함이 있더라도 감수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60대의 성공한 건축가 박민우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겨우겨우 연명하는 29살의 연극연출가 정우희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인연의 끈도 없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좀체 좁히지 못한다.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p.198 '작가의 말' 중에서)

 

경남 영산 출신의 박민우는 맨주먹으로 상경한 그의 부모와 함께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 너 나 할 것 없이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했던 칠십년대였다. 삶의 각축전일 수밖에 없었던 달동네에서 박민우는 어떻게든 그 동네를 벗어나겠다 결심하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 동네에서 학생이 있는 집은 어묵튀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그의 집과 국숫집, 단 두 집뿐이었다. 공동수돗가 근처의 국숫집에는 그보다 한 살 아래의 차순아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는 꼬마들을 데리고 구두닦이를 하는 재명이와 그의 가족이 살았다.

 

"나는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상살이의 치열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은 지옥이 저 바깥세상의 축소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었고 어디론가 진로를 정하고 열심히 헤쳐나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혔다. 이 무렵 나는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나 이 동네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는 굳은 결심을 세우고 대학 입시 공부에 매진했다." (p.75)

 

얼굴이 예뻤던 차순아는 동네 남자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박민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민우가 유명 대학에 입학하여 마을을 떠난 후 차순아는 마을에서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대학 입학에도 실패하고 그녀의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모녀만 남은 국숫집은 급격히 쇠락한다. 그들 모녀를 거두어 준 사람은 재명이였다. 그들 사이에 딸이 한 명 있었지만 홍역으로 잃고 재명이마저 불법도박 혐으로 수감된다. 차순아는 책 외판원을 하던 사람과 결혼을 하여 아들 한 명을 낳게 된다.

 

반면 박민우는 대학생이 된 후 독립하여 자취를 하게 되면서부터 그가 자란 달동네와 거리를 두고 지낸다. 게다가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입주과외를 시작하면서 상류층 사람들과 연을 맺게 되고 졸업 후 유학과 함께 결혼도 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건축붐이 일었던 팔,구십년대에 그는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지만 아내가 미국에 있는 딸의 곁으로 떠난 후 그는 혼자가 된다.

 

"이튿날 두통과 갈증으로 잠에서 깨어나자 머릿속이 텅 빈 백지처럼 느껴졌다. 그러더니 점차 바닷가, 언덕 위에서 본 노을, 말기 암 환자의 낙천적인 웃음소리, 그리고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여자의 목소리 등등이 얼룩처럼 그 백지 위에 번져간다. 뒤죽박죽 이어진 꿈의 연장인 것만 같아서, 어서 돌아와야지, 머리를 몇 번 거세게 흔들었다."    (p.31)

 

피자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우희와 김민우는 가까워진다. 전문대를 졸업한 후 줄곧 출구도 없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가는 김민우는 차순아의 아들이다. 차순아의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빚만 남기고 죽었다. 그 뒤로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정우희가 세들어 살던 반지하의 셋방이 물에 잠겼을 때 김민우는 그녀로 하여금 그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며칠 동안 신세를 지도록 한다. 그때 정우희는 차순아와 모녀처럼 가까워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가쁜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때인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여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계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약간의 이질감이 양말 속에서 간신히 자각될 뿐."    (p.112)

 

정우희는 차순아의 일기 비슷한 수기를 읽은 후 박민우와의 만남을 주선하려 애쓰지만 아들이 자살한 후 차순아는 결국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억압과 폭력으로 유지된 군사독재의 시기에 우리는 저 교회들에서, 혹은 백화점의 사치품을 소유하게 되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온갖 미디어가 끊임없이 쏟아낸 '힘에 의한 정의'에 기대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너의 선택이 옳았다고 끊임없이 위무해주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여러 장치와 인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들 속에서 가까스로 안도하고 있던 하나의 작은 부속품이었다."    (p.144)

 

황석영의 소설은 대개 현실과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집요하리만치 파고든다. <해질 무렵>도 다르지 않았다. 산업화 초기의 혼란을 틈타, 제어장치도 없이 욕심을 채워갔던 기성세대의 탐욕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업보로 작용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들추어낸다. 그러나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탐욕의 속도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 줄 모른다. 황석영의 소설을 읽으면 가슴속 응어리가 더 크고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만 같다. 그의 소설은 독자를 위로하는 법이 없다. 돌덩이를 삼킨 듯 답답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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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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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선거 때 투표란 걸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고 물어도 한마디로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서 "글쎄, 어째서일까요" 하고 어물어물 넘기고 마는데, 좌우지간 투표는 안 한다. "그건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표는 안 한다.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투표는 안 한다."    (p.93)

 

내 애기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얘기다. 나는 오히려 그와 반대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나는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은 없지만, 그래도 투표는 꼭 한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왜 그런지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건 적어도 박정희 독재정권을 경험했던 사람들만의 공통적인 성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괜한 자기 고집 때문에 권력의 눈밖에 나기라도 하면 자신에게 뭔가 불이익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시대특산품이었다. 비록 나는 그 당시에 어린 나이여서 투표를 경험했던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의 불안 심리가 혈관을 타고 둥둥 떠다니다가 투표 때만 되면 콕콕 찌르듯이 뇌를 자극하는 것이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는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작품이다. 대중 앞에 나서는 걸 지극히 꺼려할 뿐만 아니라 사적인 얘기는 극도로 예민하게 구는 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하루키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비록 말은 어눌해도 글을 쓸 때는 수다스러워야 소설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문득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이 사람이 대중 앞에서는 항상 연극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오늘은 늦어질 모양이니까 먼저 밥을 먹어 버릴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뭐 모처럼인데 좀더 기다려 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지만 배가 고픈걸' 하는 식이다. 이런 저런 여러 생각들이 집약되어, "……." 이라는 침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 미안해요. 저녁 먹고 왔어요" 하는 소리를 들으면 역시 화가 난다."    (p.107)

 

하루키가 결혼하고 2년째쯤 되었을 때 반년 정도 '주부(主夫)' 노릇을 했던 경험을 쓴 대목이다. 실감나지 않는가. 작가가 쓴 '여러 수필집에서 가장 흥미롭고 깊이 있는 글들을 뽑아서 수록했다'는 이 책은 하루키의 내면을 궁금해 하는 많은 독자들의 니드를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제2장 '나날의 여백 위에 쓴 단상', 제3장 '문학은 무거워도 사는 건 가볍게',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제5장 '신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여울',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의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의 사적인 고백과 더불어 작가의 세계관, 문학관, 문화관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문장이라는 것은 '자, 써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먼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걸맞는 내용과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천재가 아닌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기성 작품의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어와 적당히 넘기게 된다."    (p.141)

 

하루키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다 알고 있겠지만 그는 마라톤 풀 코스를 여러 차례 완주했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나는 소설가니까 풀어지고 싶을 때 적당히 풀어지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을 때 적당히 어울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어찌 보면 꽤나 피곤한 일인 듯하다.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우회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억척스레 밀고 나가는 성격이라, 무엇인가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고 실패도 수없이 한다. 그렇지만 한번 그것을 몸에 익히고 나면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이걸 딱히 자랑스레 떠드는 건 아니다. 이런 성격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이 그런 스타일을 고치려고 애써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p.47)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하루키 에세이의 장점은 '큭큭' 대며 읽을 수 있는 오락성에 있다고 하겠다. 팔랑거리며 가볍게 날아다닐 듯한 톡톡 튀는 문체와 '나는 비록 이렇게 생각하지만 독자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든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툭툭 내던질 뿐 강요하지 않는 그의 서술 방식은 우리가 지는 일상의 무게를 500그램쯤 덜어낼 것만 같다. 일상의 무게로 인해 평소보다 어깨가 대략 2cm쯤 가라앉은 사람을 볼라치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게 된다, 무작정 또는 막무가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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