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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선거 때 투표란 걸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고 물어도 한마디로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서 "글쎄, 어째서일까요" 하고 어물어물 넘기고 마는데, 좌우지간 투표는 안 한다. "그건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표는 안 한다.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투표는 안 한다." (p.93)
내 애기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얘기다. 나는 오히려 그와 반대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나는 '정치적 관심이나 의견은 없지만, 그래도 투표는 꼭 한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왜 그런지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건 적어도 박정희 독재정권을 경험했던 사람들만의 공통적인 성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괜한 자기 고집 때문에 권력의 눈밖에 나기라도 하면 자신에게 뭔가 불이익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심리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시대특산품이었다. 비록 나는 그 당시에 어린 나이여서 투표를 경험했던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의 불안 심리가 혈관을 타고 둥둥 떠다니다가 투표 때만 되면 콕콕 찌르듯이 뇌를 자극하는 것이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는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작품이다. 대중 앞에 나서는 걸 지극히 꺼려할 뿐만 아니라 사적인 얘기는 극도로 예민하게 구는 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하루키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비록 말은 어눌해도 글을 쓸 때는 수다스러워야 소설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문득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이 사람이 대중 앞에서는 항상 연극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오늘은 늦어질 모양이니까 먼저 밥을 먹어 버릴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뭐 모처럼인데 좀더 기다려 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지만 배가 고픈걸' 하는 식이다. 이런 저런 여러 생각들이 집약되어, "……." 이라는 침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 미안해요. 저녁 먹고 왔어요" 하는 소리를 들으면 역시 화가 난다." (p.107)
하루키가 결혼하고 2년째쯤 되었을 때 반년 정도 '주부(主夫)' 노릇을 했던 경험을 쓴 대목이다. 실감나지 않는가. 작가가 쓴 '여러 수필집에서 가장 흥미롭고 깊이 있는 글들을 뽑아서 수록했다'는 이 책은 하루키의 내면을 궁금해 하는 많은 독자들의 니드를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제2장 '나날의 여백 위에 쓴 단상', 제3장 '문학은 무거워도 사는 건 가볍게',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제5장 '신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여울',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의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의 사적인 고백과 더불어 작가의 세계관, 문학관, 문화관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문장이라는 것은 '자, 써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먼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걸맞는 내용과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천재가 아닌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기성 작품의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어와 적당히 넘기게 된다." (p.141)
하루키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다 알고 있겠지만 그는 마라톤 풀 코스를 여러 차례 완주했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나는 소설가니까 풀어지고 싶을 때 적당히 풀어지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을 때 적당히 어울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어찌 보면 꽤나 피곤한 일인 듯하다.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우회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억척스레 밀고 나가는 성격이라, 무엇인가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리고 실패도 수없이 한다. 그렇지만 한번 그것을 몸에 익히고 나면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이걸 딱히 자랑스레 떠드는 건 아니다. 이런 성격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이 그런 스타일을 고치려고 애써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p.47)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하루키 에세이의 장점은 '큭큭' 대며 읽을 수 있는 오락성에 있다고 하겠다. 팔랑거리며 가볍게 날아다닐 듯한 톡톡 튀는 문체와 '나는 비록 이렇게 생각하지만 독자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든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툭툭 내던질 뿐 강요하지 않는 그의 서술 방식은 우리가 지는 일상의 무게를 500그램쯤 덜어낼 것만 같다. 일상의 무게로 인해 평소보다 어깨가 대략 2cm쯤 가라앉은 사람을 볼라치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게 된다, 무작정 또는 막무가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