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의 나르시시스트 - 집, 사무실, 침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괴물 이해하기
제프리 클루거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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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정말이지 나는 무척이나 겁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발표에 늘 노심초사 하였고, 다른 과목에 비해 발표의 기회나 가능성이 높은 음악이나 체육 시간을 지독히도 싫어했었다. 1학년 때 큰 병을 앓았던 탓에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도 왜소했고, 체력도 그들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운동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하는 요즘의 체육시간과는 달리 그 당시의 체육시간은 뜀틀이나 철봉 등을 선생님의 지시하에 한 명 한 명씩 열을 맞춰 이루어졌으므로 내 순서가 다가오면 나는 그야말로 공포에 질리곤 했다. 못한다고 누가 놀리는 것도 아닌데 가슴은 미리부터 두망망이질을 쳤고 얼굴은 빨갛다 못해 목덜미까지 물들곤 했다. 음악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혹시 나를 지목하여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키지나 않으실까, 한 시간 내내 가슴을 졸였었다. 다른 시간도 정도만 조금 약했을 뿐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용의검사는 어찌나 자주 하던지, 학교 가는 일이 내게는 공포의 연속이었다.

 

좋은 일로든 나쁜 일로든 교단에 불려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 심한 공포감을 갖고 있던 나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 그런 공포로부터 조금쯤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 반편성 고사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입학식장에서 나는 신입생 대표 자격으로 앞에 나가 선서를 낭독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갑작스러운 변화를 나는 어지간히 즐겼던 것 같다. 내게 쏟아지는 선생님들의 관심도,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친구들의 시선도 딱히 싫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우쭐한 기분에 취하여 학교생활을 조금쯤 즐기게도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건 하나의 특권을 손에 쥐는 것과 같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어린 나이에 맛보았던 우쭐한 기분이 그 계기가 되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이가 한참이나 든 뒤에야 알게 되었다. 예컨대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고 내 인생에 있어 실패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누가 봐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자존심 때문에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곧 많은 비용과 시간의 낭비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나는 나르시시스트를 벗어나기 위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제프리 클루거가 쓴 <옆집의 나르시시스트>를 읽는 내내 나의 지난 삶을 생각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놀이 문화가 사라진 것은 현대에 나르시시스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나머지 이유 한 가지는 자부심 고양 운동이다. 이 움직임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져버린 일의 좋은 사례다." (p.90)

 

'타임'지의 수석편집자이자 작가인 제프리 클루거는 이 책에서 나르시시스트가 만연하는 현대의 세계를 진단하고 그에 걸맞는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 미국 공화당 경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에서부터 인기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와 레이디 가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자기애적 성향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거대한 질병'(자기애성 성격장애)으로 진단하고 나르시시스트를 '괴물'이라고 지칭했다.

 

SNS가 일상화된 현대인들에게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일반적인 증상이 아닐까 싶다. 페이스북에 올린 자신의 사진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러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게 되고, 자신이 참가한 모임에서 모든 참가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말에 열심히 귀 기울여 들어주고 다 듣고 난 후에는 존경과 감사를 담은 말 한마디를 건네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정과 관심, 보상에 대한 욕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연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연애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주로 매력적이고 외향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나르시시스트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마저 서로를 아껴주는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직장에서도 일은 하지 않으면서 성과만 가로채는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라고 하여 모두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요, 나르시시스트는 모두 사회에 부정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같은 독창적 나르시시스트, 모한다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영웅적 나르시시스트의 예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대부분 외로운 결말을 맞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 참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가 아직도 충분히 반짝이고, 시선을 끌어모으고, 어떤 집단에서든 가장 인기 있는 이성으로 대접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슬픈 결말의 씨앗은 그때부터 이미 뿌려져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자들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결국 그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정작 나르시시스트 본인들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187)

 

저자는 이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나르시시즘을 '지나치게 탐닉하면 후회감이 밀려오고 몸이 쑤시는데다 '적당히 자제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또래집단의 놀이문화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음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관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수용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과감히 인정할 수 있게도 된다. 그러나 최근 놀이문화의 실종과 칭찬의 남발로 인하여 나르시시스트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지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자가 늘어나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증가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또 주기도 하는 게 당연한데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도움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자존심 때문이었든 아니든 처참한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말이다. 나 또한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칭찬은 늘 조심스럽기만 하다. 나르시시스즘에 빠져들기는 쉽지만 벗어나는 데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나르시시스트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은 어제나 예외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와 같은 선민의식으로 인하여 '인생의 대부분이 실패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 지난 후에 아무리 절절히 후회한다고 한들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놓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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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불던 비바람 때문인지 오늘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았다. 여느 날처럼 산을 오르는데 등산로에 흩어진 잔가지와 나뭇잎들이 마치 태풍이 지나간 흔적처럼 어지러웠다. 간혹 아까시 나무의 채 벙글지도 않은 하얀 꽃망울이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린 채 떨어져 있었다. 개화가 멀지 않았는지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꽃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떡갈나무 넓은 잎사귀에 잎맥을 따라 손금처럼 퍼져 있던 송화가루 노란 무늬도 어제의 비에 씻겨 말끔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설령 이런저런 고민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싶은 게 옮기는 걸음마다 괜한 자신감만 는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등산로 입구의 계단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일흔 살 안팎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자전거 짐받이에 소소한 농기구를 묶어 싣고는 계단 끝머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등산로 초입의 산자락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분인 듯했다. 넓은 챙이 둥그렇게 달린 모자 아래로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처럼 깊은 주름이 져 있었고, 담배 연기를 한모금 들여 마실 때마다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동이 트기 전의 선선한 아침에 농사일을 끝내기 위해 할머니는 새벽부터 서둘렀을 것이다.

 

기온은 빠르게 오르는데 낮에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부는 바람이 싫지 않았다. 바람이 한 차례 몰려올 때마다 답답했던 마음이 훌훌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4일간의 제법 긴 연휴가 생겼다. 아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낀 이번 연휴는 어른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롯이 쉰다는 야무진 꿈은 애초에 버려야 할 듯하다.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다 보면 연휴가 끝난 후에는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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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너머 편 (반양장) -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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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는 책이 있기에 나도 대화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슬쩍 한 번 읽어 보았다. 저자가 '채사장'이란다. 이름에서부터 사기꾼(?) 냄새가 폴폴 나는 게 영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는 데에는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싶어 꾹 참고 읽어보기로 했다. 책의 제목은《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다.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사기꾼 냄새 폴폴 나는 저자의 이름과는 달리 책의 제목은 제법 진실된 느낌을 주니 말이다. '넓고 깊은 지식'이나 '좁고 깊은 지식'도 아닌 '넓고 얕은 지식'이란다. 모름지기 지식이란 깊이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 책의 전편, 그러니까 1권에 해당하는 현실 세계 편(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은 내용이 어땠는지 모르지만(난 엉뚱하게도 2권부터 읽었다) 이 책, 2권에 해당하는 현실 너머 편(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은 뭐랄까, 요점 정리가 잘 된 국민 윤리 과목의 족보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족보가 뭐냐고? 흠, 세대 차이가 나는군. '족보'란 말이지, 과거서부터 쭈욱 전해 내려오던 주요 기출문제나 시험에 나올 법한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정리하여 놓은 것으로서 수험생들이 공유하는 요약본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거란다.

 

지금껏 세상의 모든 시험이란 시험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설마 있을까마는 친구들과 시험공부를 같이 해보면 그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친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교과서 내용을 전혀 외우지도 않은 채 문제부터 푸는 학생, 문제부터 풀지는 않지만 문제지 앞면에 압축하여 요약된 교과 내용(대개는 한두 쪽 분량)만 외운 후 문제를 푸는 학생, 참고서나 교과서를 서너 번 읽고 문제를 푸는 학생, 문제는 풀지 않더라도 교과 내용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달달 외우는 학생, 달달 외우는 걸로도 부족해 문제란 문제는 모두 풀어보는 학생 등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공부 방법도 제각각인 것이다.

 

나는 암기과목의 시험공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달달 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국정 역사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운 후 학력고사를 보러 갔을까. 그런 성격 탓인지 남들이 판단할 때는 시험에 절대 나오지 않을 듯한 내용도 기를 쓰고 외워야만 안심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남들이 잘 때 자지 않고 시험공부에 매달렸을까? 그렇지 않다. 내 주관은 명확했다. 학교 공부는 학교에서 끝내고 온다, 는 것이었다. 요는 수업시간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노트 필기를 끝내고 선생님이 필기 내용을 설명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거나, 장난치거나, 멍 때리지만 나는 선생님의 말을 토씨까지 다 연습장에 받아 적었다. 나중에 읽어보려고 한 게 아니라 집중력을 떨어트리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중요한 것만 요약하기는 쉽지만 말 자체를 모두 받아 적는 건 속기사가 아닌 한 쉽지 않은 법이다.

 

시험 공부를 늘 이런 식으로 했으니 책인들 건성건성 읽힐 리 만무하다. 아무리 재미없는 책일지라도 일단 손에 잡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성격 참 더럽다. 만일 내가 아니라 옆의 친구가 그랬더라면 "재수없다."고 한마디 했을 성 싶다. 학창시절부터 굳어진 독서 습관이나 공부 습관 탓인지 나는 이 책의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치 윤리 문제집의 단원별 요약본을 읽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신비에 대해 다뤘다. 신비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 간에 공통된 체험이 불가능한 까닭에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공통된 체험이 불가능하지만 너무나 명확하고 나에게는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 그것이 신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죽음과 삶이 풀리지 않는 심오함의 중심이 된다." (p.367)

 

일부분일지라도 이 책의 내용을 일언반구도 없이 책의 내용과는 하등 연관도 없는 듯한 나 자신의 경험만 줄줄이 써내려간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요점정리 한 것을 다시 요점정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양철학에 몰두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영 탐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인 내용일수록 앞뒤 맥락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 탓인지 일주일이 무척이나 짧아진 듯하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삶과 죽음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주제의 대화는 일상적인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대화가 지적 대화에 속하나 보다. 격세지감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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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날씨는 벌써 초여름처럼 더위를 느끼게 한다.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봄비도 자주 내렸고, 기온도 높은 탓인지 식물의 생장 속도가 유난히 빠른 듯하다. 매일 아침 산에 오르면서도 빠르게 변하는 숲의 모습에 하루하루가 그저 새롭기만 하다.

 

아내는 오늘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의 시험 감독을 다녀왔다고 한다. 지금은 한 학급의 학생수라야 서른 명 안팎이니 선생님 혼자서 시험감독을 못할 것도 없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내신성적의 비중이 높아진 탓인지 각급 학교에서는 부정행위 방지 및 공정성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한 학급의 학생수가 60명을 넘나들었으니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와 다름 없었다. 시험을 치를 때에도 다른 학년의 학생 절반이 옮겨와 분단별로 섞어 앉기는 했지만 틈새를 노린 컨닝은 여전히 성행했었고 말이다.

 

4월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바쁜 일이 몰려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몸도 마음도 분주하였고 쉬이 지치고 피곤했었다. 그런 상태로 월말을 맞다 보니 그동안 미뤘던 일을 처리하느라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다. 밀린 리뷰를 쓰는 것도 그중 하나였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또 미뤄진 상태다.

 

머리도 식힐 겸 인터넷 포털의 뉴스를 보다 보니 아직 실행도 하기 전에 있는 '김영란법'의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는 여당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사를 읽어 보니 비단 여당만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야당도 적극적으로 주장만 안 하고 있을 뿐 내심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 부패척결을 완화해야 경제가 산다는 논리는 듣다 듣다 처음 들어본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명절이면 선물 보따리가 산을 이루는 지경인데 그걸 막는다면 아깝긴 할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 듯했다. 가뜩이나 여기 저기 뜯어 고쳐 누더기로 통과된 '김영란법'이 경제위축을 이유로 실행도 되기 전에 또 손을 볼 기세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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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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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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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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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 곧바로 앉아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음식도 글도, 심지어 쉬지 않고 늘 하는 말도 숙성의 기간이 필요한 셈이다. 한 뼘 더 성장한다는 건 모름지기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글을 쓰면서 배웠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 내내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짝사랑의 연인에게 기나긴 편지를 쓸 때 하고 싶은 말은 가슴에서 요동쳐 두서없고, 바람처럼 허황한 말만 편지지에 남았던 그 밤이 지나고 나면 밤새 내가 썼던 편지는 얼마나 유치했는지... 이제 막 연인으로 발전한 풋사랑의 상대와 첫 데이트 약속이 있던 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앞뒤 재지 않고 횡설수설 하는 바람에 데이트는 엉망이 되고 가득한 후회만 안고 버스를 탔던 기억은 우리를 얼마나 주눅들게 했던지...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욕심이 조금 과했구나, 싶은 책이 눈에 띌 때가 있다. 말하자면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갈무리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처럼 소양이 한참이나 부족한 독자가 그런 책을 읽을라치면 호흡은 가쁘고, 머릿속은 멍멍하고, 읽기 어려우면 당장이라도 손에서 책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악마의 유혹은 계속되고, 급기야 두 손 두 발 다 드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저자에 대한 원망만 한아름 쌓이곤 한다.

 

서정 작가가 쓴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도 내게는 그런 책이 아니었나, 싶었다. 작가의 기획 의도나 방향이 나빴다거나 글의 내용이나 문체가 좋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유럽의 문학이나 예술 또는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내가 나와는 지적 수준의 차이가 명백한 작가의 글을 읽으려니 내 딴에는 여간 힘에 겨웠던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종의 여행기인 이 책에서 작가는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와 샤갈, 니콜라이 박 등 화가와 쇼팽이나 괴테, 고흐와 토마스 만, 카잔차키스 등 유럽의 변경을 따라 산재한 지식인과 예술가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민스크 아테네를 두루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 쫓아다니기도 했고, 반복하여 만나게 됨으로써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인물도 있었다고 말한다. 러시아 문학가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푸시킨이나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와 관련된 내용이 너무 적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던 반면에 일리야 레핀 등 생소한 예술가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지루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샤갈에게는 비텝스크도 파리도, 생폴 드 방스도 고향이 되는 동시에 그 어느 곳도 고향이 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실감이란 잃어버린 대상 때문에 잃어버린 자에게 찾아오는 텅 빈 마음일 텐데 그에게는 잃어지지 않는 고향이 이미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듯하다. 또 그는 그 위로 다시 채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벨라루스와 프랑스에서 마음속에서 반짝거렸던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에 불을 밝히고 있다." (p.182)

 

어떤 책이든 일단 손에 쥐면 다 읽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의 고집은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발휘되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루하거나 따분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젊은 시절에 읽고 그 뒤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토마스 만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공간과 함께 낭만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로 인해 나는 토마스 만을 다루는 그 부분의 글을 토마스 만의 실제 작품보다도 더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읽는 것에만 급급했던 토마스 만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저자의 소개가 아니었더라면 내 기억에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로코 열풍이 부는 가운데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한 채로 "밭에서 갓 딴 신선한 딸기"를 아주 맛있게 먹던 아셴바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니 삶에 생기를 잃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 도시를 한 번쯤 탐할 만도 하다. 물론 주의를 요한다. 실제로 베네치아에서의 첫 식사는 상한 조개가 들어 있는 봉골레였으니까." (p.322)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국 그리스가 소개되고 있다. 우스꽝스럽게도 나는 그 부분을 읽는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우천염천'을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지역이나 공간을 소개하는 데에도 그곳과 궁합이 맞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처럼 불량한 독자는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온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번번이 다른 작가를 기웃대는 것이다.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집적대는 바람둥이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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