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의 나르시시스트 - 집, 사무실, 침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괴물 이해하기
제프리 클루거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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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정말이지 나는 무척이나 겁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발표에 늘 노심초사 하였고, 다른 과목에 비해 발표의 기회나 가능성이 높은 음악이나 체육 시간을 지독히도 싫어했었다. 1학년 때 큰 병을 앓았던 탓에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도 왜소했고, 체력도 그들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운동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하는 요즘의 체육시간과는 달리 그 당시의 체육시간은 뜀틀이나 철봉 등을 선생님의 지시하에 한 명 한 명씩 열을 맞춰 이루어졌으므로 내 순서가 다가오면 나는 그야말로 공포에 질리곤 했다. 못한다고 누가 놀리는 것도 아닌데 가슴은 미리부터 두망망이질을 쳤고 얼굴은 빨갛다 못해 목덜미까지 물들곤 했다. 음악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혹시 나를 지목하여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키지나 않으실까, 한 시간 내내 가슴을 졸였었다. 다른 시간도 정도만 조금 약했을 뿐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용의검사는 어찌나 자주 하던지, 학교 가는 일이 내게는 공포의 연속이었다.

 

좋은 일로든 나쁜 일로든 교단에 불려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 심한 공포감을 갖고 있던 나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 그런 공포로부터 조금쯤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 반편성 고사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입학식장에서 나는 신입생 대표 자격으로 앞에 나가 선서를 낭독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갑작스러운 변화를 나는 어지간히 즐겼던 것 같다. 내게 쏟아지는 선생님들의 관심도,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친구들의 시선도 딱히 싫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우쭐한 기분에 취하여 학교생활을 조금쯤 즐기게도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건 하나의 특권을 손에 쥐는 것과 같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어린 나이에 맛보았던 우쭐한 기분이 그 계기가 되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이가 한참이나 든 뒤에야 알게 되었다. 예컨대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고 내 인생에 있어 실패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누가 봐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자존심 때문에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곧 많은 비용과 시간의 낭비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나는 나르시시스트를 벗어나기 위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제프리 클루거가 쓴 <옆집의 나르시시스트>를 읽는 내내 나의 지난 삶을 생각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놀이 문화가 사라진 것은 현대에 나르시시스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나머지 이유 한 가지는 자부심 고양 운동이다. 이 움직임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져버린 일의 좋은 사례다." (p.90)

 

'타임'지의 수석편집자이자 작가인 제프리 클루거는 이 책에서 나르시시스트가 만연하는 현대의 세계를 진단하고 그에 걸맞는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 미국 공화당 경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에서부터 인기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와 레이디 가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자기애적 성향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거대한 질병'(자기애성 성격장애)으로 진단하고 나르시시스트를 '괴물'이라고 지칭했다.

 

SNS가 일상화된 현대인들에게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일반적인 증상이 아닐까 싶다. 페이스북에 올린 자신의 사진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러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게 되고, 자신이 참가한 모임에서 모든 참가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말에 열심히 귀 기울여 들어주고 다 듣고 난 후에는 존경과 감사를 담은 말 한마디를 건네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정과 관심, 보상에 대한 욕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연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연애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주로 매력적이고 외향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나르시시스트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마저 서로를 아껴주는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직장에서도 일은 하지 않으면서 성과만 가로채는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라고 하여 모두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요, 나르시시스트는 모두 사회에 부정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같은 독창적 나르시시스트, 모한다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영웅적 나르시시스트의 예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대부분 외로운 결말을 맞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 참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가 아직도 충분히 반짝이고, 시선을 끌어모으고, 어떤 집단에서든 가장 인기 있는 이성으로 대접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슬픈 결말의 씨앗은 그때부터 이미 뿌려져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자들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결국 그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정작 나르시시스트 본인들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187)

 

저자는 이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나르시시즘을 '지나치게 탐닉하면 후회감이 밀려오고 몸이 쑤시는데다 '적당히 자제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또래집단의 놀이문화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음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관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수용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과감히 인정할 수 있게도 된다. 그러나 최근 놀이문화의 실종과 칭찬의 남발로 인하여 나르시시스트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지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자가 늘어나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증가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또 주기도 하는 게 당연한데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도움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자존심 때문이었든 아니든 처참한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말이다. 나 또한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칭찬은 늘 조심스럽기만 하다. 나르시시스즘에 빠져들기는 쉽지만 벗어나는 데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나르시시스트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은 어제나 예외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와 같은 선민의식으로 인하여 '인생의 대부분이 실패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 지난 후에 아무리 절절히 후회한다고 한들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놓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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