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읽다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쓰는 일과 읽는 일을 한 줄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읽는 것에 비해 무엇인가를 쓴다는 행위는 쓰는 이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품이 여간 많이 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시로 책을 읽는 이는 많아도 책을 쓰겠노라 감히 엄두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책 읽기는 독자들의 관심사가 되곤 한다. 그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방식으로, 심지어 어느 시간대에 등 모든 게 궁금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한다 뿐이지 일반인의 책 읽기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데 말이다.

 

고종석의 <쓰고 읽다> 역시 독자들의 궁금증을 충족하기 위한 책이 아닐까 싶다. 시사주간지 '시사IN'에 2015년 10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연재한 [독서한담]과 2015년 8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고정석의 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이 책은 작가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을 구어체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자로 단련되었던 그가 익숙지도 않은 구어체 문장으로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았을 터, 작가도 그런 사실이 몹시 신경 쓰였던지 [독서한담]의 끝머리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제 작별의 시간이 됐네. 이 난에서 나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구어체의 글쓰기를 시도해봤어. 내 말투, 내 글투가 불편했던 독자들도 있었을 거야. 이 구어체 글쓰기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판단하는 건 독자들의 몫이지. 지난 여름이 유독 뜨거웠으니, 이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철이 됐으면 좋겠어. 모두들 강건하시길!" (p.152)

 

이 책에서 작가가 소개하는 많은 책들 중에 유독 나의 기억에 남았던 책은 김욱이라는 법학자가 쓴 <아주 낯선 상식>이었다. 그것은 작가의 최근 행보와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알만한 사람은 다아는 사실이지만 작가는 잘 알려진 '반노인사'일 뿐만 아니라 절필 선언 후 트위터에 남긴 수많은 단문들을 볼 때 그의 정치적 색채는 '극력 반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렇다고 박정희를 우상으로 떠받드는, 반쯤 눈이 먼 '극력 우파'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박정희 노무현의 영남패권주의를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말하자면 지역에 기반을 둔 한국적 민주주의 체제에 반기를 든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사실 시쳇말로 스펙이 화려한 사람이다.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언어학 석사,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출발하여 한겨레와 시사저널 등을 거치며 논설위원 편집위원을 지냈고, 이후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신문사 근무를 마쳤으니 말이다. 언론인들의 정치권 영입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는 마당에 그도 일찌기 정치에 뜻을 뒀더라면 오래전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시대 '글쟁이'로써 한 획을 그었던 그는 2012년 9월 돌연 절필을 선언했었다. '글은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그에게 깨지지 않는 영남패권주의 신화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 분명하게 작동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를 지식인들조차 모른 체해. 그것을 절대 변경할 수 없는 디폴트값으로 정하고, 그 위에서 보수니,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얘기를 하는 거지. 그렇지만 개혁이나 진보라는 것이 차별과 양립할 수 없다면, 나는 영남패권주의를 우회하는 개혁담론이나 진보담론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가짜 개혁담론이자, 가짜 진보담론이라는 뜻이지." (p.54)

 

그랬던 그가 이제는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 스스로 무소속으로 대통령 출마를 하겠다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에 관심을 갖고 온전히 빠져들었던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된 후 자신의 글로 세상을 바꿔보자 결심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던가. 누구에게나 마음의 상처는 한이 되고 결국에는 저승으로 가는 노자인 양 쓰이는 게 다반사이지만 작가는 그마저도 싫었던 모양이다. 이제 흰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어 자신의 쌓인 한을 대통령으로 풀려 하니 말이다. 노작가의 헛된 꿈이 왠지 짠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은 누구에게나 신산스러운 것이지만 북한의 김정남 피살 소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한때는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론되며 황태자의 자리를 누렸던 그가 지난 2001년 5월 가짜 여권을 소지하고 일본에 입국하려다가 체포돼 추방된 뒤 김정일의 눈 밖에 나 권력 승계 다툼에서 배제됐음은 물론 가족과 함께 외국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더니 며칠 전 타국에서 영문도 모른 채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그의 인생도 가히 복된 삶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컴퓨터광으로 알려진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해 개혁·개방주의자로 불리기도 했었고, 군력 승계에서 배제된 뒤 우리나라로의 망명설도 심심찮게 전해졌었다. 그러던 그가 2013년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처형 된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 가족들과 함께 마카오 도심의 부호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올해 초 다시 그곳으로부터 갑자기 이사를 했다고 한다. 한때는 마카오에서 무역업과 금융투자업으로 큰 돈을 벌기도 했다지만 김정일이 물려 준 재산이 많아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랬던 그가 허무하게 살해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수사결과 발표나 사건의 정황으로 볼 때 김정은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죽은 김정일은 아마도 지하에서조차 눈을 감지 못할 듯하다. 아무리 권력이 좋기로서니 형을 살해하리라고는 김정일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터,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 고모부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형까지 죽인 망나니로 만든 책임은 모두 김정일 자신에게 떨어질 테니까.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 죽은 후에도 부모를 욕보이게 하는 일이 비단 김정일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죽은 박정희도, 김동리 작가도 다들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 죽어서도 뉴스에 오르내리지 않던가. 그나저나 최순실은 죽은 부모를 욕보인 것인지, 아니면 세상 만방에 이름을 떨치게 한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와이다 준이치 사진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매개로 한 작가와 독자의 인연이라고 해서 마냥 허투루 생각할 것만도 아니다.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말 한마디 섞기도 어려웠을 듯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지라도 그가 쓴 책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일본 작가를 알게 된 건 법정 스님의 추천도서 목록에서 시작되었다. 50권으로 추려진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목록의 맨 마지막에는 생뚱맞게도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가 차지하고 있었다. 스님의 사상적, 철학적 기반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어찌 보면 전혀 다른 맥락의 책인 듯 느껴져서 처음에는 나 또한 의아했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것을 계기로 다치바나 다카시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취향이나 관심분야에서도 어디 하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었는데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은 후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매력'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후 나는 <청춘 표류>,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 <<읽기의 힘 듣기의 힘>, <사색기행>, <임사체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 등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 대부분을 읽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한 인간에 의한 성취가 이렇게도 방대할 수 있구나, 놀라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치열한 삶의 태도에 압도되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저자가 했던 말을 나는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아마도 끊임없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반복하고 피드백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날 정신적인 비상을 이루는 때가 찾아와 모든 것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나의 생활을 지탱해 준 기대이자 신념이었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저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내가 읽게 된 것도 그런 일련의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양이 빌딩'으로도 잘 알려진 그의 서재는 규모 면에서나 소장도서의 권수를 보나 한 사람의 소유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곳에 비치된 20만 권의 책을 소개하며 그가 이룩한 지식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저자의 설명은 1층에서부터 시작된다. 안락사나 존엄사, 죽음이나 뇌사, 의학이나 생물학 등의 서적이 보관된 1층은 오래전에 정리된 후 비교적 변화가 적은 곳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해 설명하던 그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서재를 설명하는 저자나 저자로 인해 영향을 받아왔던 나 역시 추억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저자로 인해 나도 역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저서를 읽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생의 수레바퀴', '인생수업'을 읽었던 게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인 양 아스라하다.

저자의 설명은 종교서적과 수상쩍은(말하자면 증명할 수 없는)책들이 보관된 2층으로 이어진다. 3층에는 여러 문명의 발달 과정과 철학, 과학과 관련된 책들이 있다. 저자는 각각의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 각종 언어를 배우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의 지적 호기심이 '지(知)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 오늘날의 저자를 만들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저자의 설명은 이제 각종 취재 자료가 보관된 지하 1, 2층을 지나 계단과 옥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고양이 빌딩'에 이어 그의 또 다른 서고인 산초메(三丁目) 그리고 릿쿄(立敎)대 연구실 서가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책이라는 것은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일수록 텍스트나 콘텐츠 이상의 요소가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요소들이 모두 독자적인 자기표현을 하는 종합 미디어가 됩니다. 그런 책의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가장 많이 사서 읽습니다. 책의 세계를 경제적으로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 구조가 계속되는 한, 종이책의 세계가 끝나는 날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p.218)

 

'인간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한다. 책이란 인간의 삶과 연관된 각종 지식을 일정한 거리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용한 도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책을 읽지 않고 오직 자신의 체험만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은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으로부터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저자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는 문학, 신학, 철학, 인류학, 미술사, 물리학, 생물학, 등을 넘나들며 책과 학문 세계 전체를 조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과 결부되어 저자의 관심이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 알려 주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성과를 그저 부러워하거나 감탄과 경의의 눈으로만 바라본다면 이 책은 한낱 눈요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닫혀 있던 지적 호기심을 열어젖히고, 지적 열망에 불을 지필 수만 있다면 이 책은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한 사람의 삶을 희극으로 인도하는 물꼬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바람도 그와 같을 것이다. 저만치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자신의 삶, 어쩌면 이 책은 그 길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 될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심 있는 한 분야를 열정적으로 파고들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시들해지는 경우가 있다. '슬럼프'라기보다는 끈기가 없는 것이다.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나는 시들시들 생기를 잃고 말라가기 시작했던 것일까? 연초에 나는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부터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간다는 건 좋든 싫든 현실과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까. 예컨대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한없이 가까워짐으로써 돈에 대한 욕심도 무한정 늘어나게 되고 돈과 연관지을 수는 없지만 삶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를 차츰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귀촌을 계획하고 있다. 말은 거창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조금 작은 동네로 떠나는, 단순한 이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동안 유지했던 삶의 형태는 귀촌과 함께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아내 앞으로 약국을 개업하고 그 일을 보조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간다는 건 아내나 나나 일종의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약국을 운영해본 적 없는 아내와 약은 그저 살 줄만 알았지 단 한 번도 팔아본 적 없는 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도시를 떠나 살아본 적 없는 아내. 이런저런 걱정에 이따금 밤잠을 설치게 된다.

 

그래서인지 얼마전부터 나는 블로그에도 그저 시큰둥했던 게 사실이다. 마음이 잡히지 않았던 까닭이다. 삶은 언제나 한 계단을 딛고 또 다른 계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삶을 이끄는 세월이야 어찌됐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고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를 좋아하세요... - 미술관장 이명옥이 매주 배달하는 한 편의 시와 그림
이명옥 지음 / 이봄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는 '읽는다'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시'는 저 멀리로 사라져버린다. '시'는 단순히 우리의 눈을 통하여 적당히 '스며들' 뿐이고 서서히 '중독되는' 것이기에 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시어를 보는 순간 우리는 뇌를 통하여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통하여 젖어들거나 숨을 쉬듯 세포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설명할 수 없다.

 

단순히 단어와 단어의 결합인 듯 보이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의 첫 행을 읽는 순간,멀고도 먼 과거의 어느 한 시절로 회귀하거나 고향 마을 어드메쯤을 배회하거나 동화 속 꿈길을 걷게 되는 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시'의 마법이다. 그러므로 '시'는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되었다가 눈 내리는 고요가 되었다가 산골 소녀의 맑은 노래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를 어떻게 '이것이다' 하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미술관장 이명옥의 <시를 좋아하세요...>를 읽다가 그 옛날 내가 좋아하던 시집을 밤새 뒤적였었다. 윤동주, 정지용, 한용운,서정주, 김수영, 김남조, 기형도, 이성복, 프랑시스 잠, 로버트 프로스트... 세월이 한참 흘러 주름이 깊게 진 옛동무를 만난 듯 책에서는 구수한 곰팡내가 풍겨왔다.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시'를 잊은 채, '시'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인가. '시'를 잊은 채 얼마나 많은 아픔을 위로받지 못하였던가.

 

"시 배달을 하는 동안 '시는 펜디멘토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진짜 얼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감정들, 깊숙이 숨겨버린 그리운 기억들을 새롭게 끄집어내어, 그것을 다시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p.6)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사비나 미술관의 관장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림 큐레이션'에서 더 나아가, '시 큐레이션'을 융합했다. 저자는 지인 중 한 사람에게 매주 한 편의 시를 배달하고 감상평을 주고받으면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떨 때 기뻐하고 괴로워하는지, 삶의 고민이 무엇인지, 위로받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저자가 사랑하는 시와 그에 대한 감상평과 그에 알맞은 그림의 콜라보인 셈이다. 1장 '시가 처음일지도 모를 당신에게', 2장 '사랑, 시' 3장 '오직 나에게만' 4장 '삶에게, 죽음으로부터' 5장 '시를 더 좋아하게 된 당신에게' 마지막 장 '아주 특별한 두 사람에게'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에게도,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제겐 좋은 책과 평범한 책을 가르는 기준이밑줄긋기를 했느냐 아니냐로 결정되거든요. 저는 책을 읽다가 저와 생각이 같거나 공감하는 구절이 나오면 곧바로 밑줄긋기를 합니다. 제가 글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해 포기한 문장을 책 속에서 발견했을 때도 역시 밑줄을 긋습니다. 밑줄긋기하고 싶은 책을 발견할 때의 제 기쁨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섞여 있어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글에 완벽하게 담아내는 재능을 가진 이에 대한 찬사와 제 부족함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지요." (P.272)

 

이 책에 실린 28편의 시만 보더라도 시에 대한 저자의 내공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시의 소개와 더불어 자신의 감상을 덧붙인 책은 많지만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만의 독특한 감상이나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획일적인 감상은 자칫 식상한 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주목했던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저자는 비록 글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는 있지만 미술을 전공한 분이 시에 대한 이해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되는 것이기에 아무리 서툰 글솜씨라고 해도 그 깊이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중독된 시 한 편은 다른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어 그렇게 스며드는 법이다. 그러므로 시는 아름다운 중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