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하늘을 보게 된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던 듯합니다. 따가운 햇살과 높은 습도로 불쾌지수는 높았지만 모처럼 맞는 맑은 날씨가 그닥 싫지는 않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가볍게 걸었는데 금세 땀이 흘러 셔츠를 적시더군요. 여름의 기세가 아직 식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하는 듯한 모양새였습니다.

 

오늘은 특이하게도 실시간 검색어 상위를 mbc 아나운서들이 차지했던 하루였습니다. 그 중에는 '배신 남매'(배현진 아나운서, 신동호 아나운서)도 포함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촛불집회 당시에 취재를 하던 mbc 기자들이 봉변을 당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국민 중 mbc의 뉴스나 보도, 탐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mbc가 지금처럼 존재감 없는 방송사로 전락하기 전에 한때는 공영 방송사로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던 100분 토론이나 탐사 보도 프로그램 PD수첩 등은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mbc가 지금처럼 신뢰를 잃고 종편보다 못한 시청률의 존재감 없는 방송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mbc를 장악한 박근혜-최순실 부역자들 때문이겠지요. 방송을 자신들의 입으로 만들었던 그들은 지금 감옥에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부역자들이 가야할 곳도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내일은 더위가 가신다는 처서입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입도 삐뚤어진다'는 말도 있는데 더위도 가시고 모기의 기세도 사그라드는 쾌적한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mbc도 지금의 혼란을 뒤로 하고 하루 빨리 옛날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고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배신 남매'의 지긋지긋한 모습도 mbc에서 더이상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기입이 삐뚤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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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08-2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지만 시사매거진2580 애청자였더랬습니다. 지금은 11번 채널은 아예 지워버렸습니다. 케이블 방송 편성표에서는 지울 수가 없어서 채널 이동 중에 좀 귀찮습니다.
엠비씨 말고는 편파 보도라고 말한 사람한테 동조하는 부류들만 시청하는 삼류가 돼버린 것 같아요. 엠비씨는 더 이상 공영방송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꼼쥐 2017-08-23 17:04   좋아요 0 | URL
저도 한때는 시사매거진 2580이나 100분토론, PD수첩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했는데 요즘은 이따금 무한도전이나 볼까 나머지는 어떤 프로그램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냅니다. mbc 경영진이 빨리 물러나야 할 텐데 그들은 그럴 의사가 추호도 없는 듯 보이니 이런 상태가 꽤나 오래 지속될 듯합니다.

2017-08-23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3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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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책을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다시 읽기 시작했던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닥 좋은 머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만치 뒤처지는 머리도 아니어서 그동안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는데 장석주 시인이 쓴 <은유의 힘>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절반쯤 이해가 되었더라면 그나마 '아, 내 머리가 나쁘구나.'생각하면서 적당히 포기를 했었을 텐데 절반커녕 1/3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책을 읽었다 말하기도 창피한 노릇이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설렁설렁 읽었던 것도 그런 결과를 자초한 한 이유가 될 터였다, 아무튼 나는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지금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한 권의 책을 거푸 두 번이나 읽었지만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닥 진전이 없었다. 학창시절 '직유법이란 ~처럼, ~같이, ~듯이, ~인 양 등의 조사를 붙여서 글을 꾸미는 방법이고 은유법은 조사 없이 A는 B이다, 또는 A는 B의 C이다와 같이 단언하듯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배워왔기에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이나 상식만으로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케케묵은 2D의 지식으로 3D를 이해하려는 꼴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그것은 차라리 텅 빈 신체다. 이것은 항상 없는 것,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을 새 현전으로 뒤집어쓰고 새로 태어남이다." (p.31)

 

전공이 국문학이나 국어교육학이었더라면 그나마 큰 어려움 없이 책의 내용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쪽 분야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경제학이고 보니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내게 들었던 느낌은 그야말로 외국어 원서를 읽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나는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이렇게라도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러나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기만 했었더라면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나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읽어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조금은 낯설고 생소한 느낌마저 드는 앞쪽 부분을 어느 정도 지나면 시인이 들려주는 '시의 이해'가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시와 함께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한 고비를 넘으면 조금 수월한 시기가 반드시 오는 것이다.

 

"앞서 김수영의 시에서 보았듯이 이름 없이 '식모'라고 불려지던 그녀가 '순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자 어엿한 인격과 정체성을 가진 의미의 존재로 떠오른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저 물질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을 갖고 호명될 때 그는 존재의 존엄성이라는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p.129)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는 과연 유용한가? 문학과 과학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는 시를 읽는다는 게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시간낭비이자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다 몰라서 하는 얘기다. 정작 시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게 하는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한 듯 보인다. 그러므로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 자연이나 과학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시인의 눈은 현상 너머의 실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단순히 시인이 발견한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인을 '견자(見者)'라고 한다. 프랑스의 한 조숙했던 시인이 한 말이라고 한다. '견자'라는 말을 단순하게 풀이하자면 보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봄'은 대상에서의 본성적 이끌림이고, 주체의 의지가 그것을 향해 막무가내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그 대상은 주체를 향해 제 몸을 활짝 열어젖힌다. '봄'은 시각의 일이 아니라 마음이 작동하는 직관의 일이다. 대상을 사랑해야만 대상이 보인다. '봄'과 '앎'은 본디 하나다. 시가 태어나는 찰나는 의식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그 대상이 마음에 도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찰나는 기지(旣知)의 것에서 미지(未知)의 것을 직관하는 순간이다. 이때 직관은 말로써 오지 않고 빛으로 온다. 언어를 장악하는 좌뇌 작동이 멈춘 채 우뇌의 어떤 영역을 환한 빛이 물들이는 것이다. 시인은 이 빛, 이미지로 온 것에 언어를 덧입힐 뿐이다. 시인은 시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다." (p.272)

 

대학시절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던 친구 한 명이 시집을 냈었다. 나는 선물로 받았던 그의 시집을 읽고 '시가 너무 어렵다'는 나 나름의 불만을 쏟아냈었다. 그에 대해 친구는 '시인이 어렵게 썼으니 독자도 어렵게 이해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말했었다. 시는 어찌보면 지(知)의 자각이나 인식이 아닌, 지(知)의 체험인 셈이다. 지(知)를 체험하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당시에 친구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마음의 근육이 단단하지 못했었다. 가을이 멀지 않았다. 시는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낙엽이 지는 그 짧은 순간의 파동을 몸으로 깨닫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건 어쩌면 삶을 적극적으로 자각하는 첫번째 단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다는 건 삶을 체험하는 일이다. 시가 무작정 좋아서 시인이 되었다는 장석주 시인은 '시를 쓰고 읽으며 향유하는 동안 나의 가난은 유복하고, 내 영혼은 풍요를 누렸다'고 고백한다. 장석주 시인이 이끄는 시의 향연에 못 이기는 척 이끌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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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잦아진 비로 하늘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하늘과 땅의 틈새를 비집고 가을이 벌써 한쪽 발을 들이민 듯한 느낌이랄까. 아침에 운동을 나오는 사람도 배는 많아진 듯하다. 물론 그 중 절반도 넘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한 계절만 운동을 하는, 말하자면 '가을 즐김이'(이런 말은 사전에 없다. 내가 붙인 이름이니까.)이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아침잠을 줄이고 산을 오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라치면 그들이 한편 대견해 보이기도 한다.

 

살충제 달걀 문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식탁에 오르는 반찬 중에 가장 흔한 것이 달걀이고 보니 하루라도 달걀 없이 지낸 날이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은 게 그동안 내 몸에 쌓인 살충제가 얼마나 될지 은근히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내가 어렸을 적에는 달걀만큼은 언감생심 워낙 비싸서 먹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당시에 유통되던 달걀은 모두 친환경 유정란이었으니 이따금 먹었다 할지라도 그게 다 피와 살이 되어 나를 성장시켰을 테지만. 그러나 지금은 인증을 받은 친환경 달걀도 말로만 친환경일 뿐 믿을 수 있는 달걀이 전무한 실정이니 그저 귀 닫고 눈 감은 채 먹을 수밖에 없다. 달걀값이 지금처럼 저렴해진 데에는 공장식 축산이 일조했다고는 하지만 그게 부메랑처럼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물이 건강하고 행복하지 못한 세상에서 인간인들 건강할 수 있겠나 싶고.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8주기 추도식이 있었던 오늘, 이따금 비가 내렸고 무척이나 후텁지근한 주말 저녁, 김하나 카피라이터의 <힘 빼기의 기술>을 집어들었다. 재미있는 책일 듯.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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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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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아무래도 천천히 흘려보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예전보다 숨도 더 천천히 쉬고, 뭐 하나라도 더 찬찬히 보고, 더 오래 생각하고, 시간을 잊고 이따금 남들 다 잠든 시간까지 오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마구 흘려보내다 보면 흐르는 시간쯤이야 '아무래도 좋을 어떤 것'으로 변해버릴 듯합니다. 언젠가는 말입니다.

 

황정은의 소설에 대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소설의 문체가 다분히 시적이라거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작가의 시선이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만의 독특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누구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작가의 시선이 닿기만 하면 우리가 알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작가가 보는 순간 피사체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 아무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작가는 단순한 시선만으로 끄집어내는 듯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차이는 아마도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오랜 숙고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발견한 여러 모습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시작하고, 열매 맺고, 어떤 식으로 작별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소라, 나나, 나기, 애자, 순자 등으로 단출합니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입니다. 애자는 그들의 엄마이고요. 나기와 순자는 모자지간입니다.

 

소라와 나나의 엄마인 애자는 사랑이 전부인 여자였습니다. 이름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소라와 나나가 각각 열 살, 아홉 살일 때 전부라고 믿었던 남편이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공장의 톱니바퀴에 끼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잃은 애자는 서방 잡아 먹은 년이라는 시댁의 냉대 속에 보상금 한 푼 없이 내쳐집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애자는 소라와 나나를 데리고 나기와 순자가 사는 집으로 이사합니다. 단순히 월세가 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거실을 공유하는 이상한 구조의 셋방에서 두 집의 동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애자는 삶의 끈마저 놓아버린 채 고통만 키워갑니다. '사랑뿐이던 애자는 사랑을 잃자 껍질만 남은 묘한 것'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애자는 그날 이후로 그다지 죽으려는 기색은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고. 나나는 그런 것을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꿈 같은 데 나타나서 애자를 데려오라고 해봤자 안되는 거야, 할머니." (p.99)

 

나기의 엄마 순자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아 생활합니다. 나기의 아버지는 겨울철에 사과궤짝을 들다가 뇌출혈로 죽었습니다. 나이보다 늙어보이는 순자는 마음만은 넉넉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애자를 대신해 나기의 도시락과 함께 소라와 나나의 도시락도 챙겨줍니다. 그렇게 성장한 소라와 나나는 이제 애자가 남편이 된 금주씨와 연애를 하던 나이가 되었습니다. 소라는 애자와 같은 전심전력의 사랑을 경계합니다. 반면에 나나는 사랑을 처음부터 경계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p.104)

 

삶을 이어가기보다는 고통만 키워가는 애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지 나나는 애자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애자는 그렇게 요양원으로 보내집니다. 어느 날 소라는 단지 추측으로만 알던 나나의 임신을 확인하기 위해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직장 동료 모세의 아기를 임신한 나나는 순순히 고백합니다. 소라는 싫다는 기색도 없이 나나를 돌봅니다. 나나가 모세의 부모님을 뵈러 갑니다. 화장실에서 요강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모세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요강인데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겨진다는 모세의 말을 듣고 나나는 놀랍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떠맡겨지고 그런 일들이 당연한 의무처럼 받들어지는 현실에 나나는 질색합니다. 나나는 결국 모세와 헤어집니다.

 

애자가 시댁으로부터 내쳐진 후 소라와 나나 역시 친가와 연을 끊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모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할머니의 생신을 맞아 친척들끼리 밥을 먹기로 했다며 소라와 나나도 참여하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백부네 가족과 할머니, 그리고 소라와 나나가 시외에서 오리고기를 먹고 돌아온 후 소라와 나나는 서로 다툽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한 나나가 보기 싫었을 텐데 그런 내색 하나 없이 잘해주는 소라를 두고 나나가 '징그럽다'고 한 게 싸움의 발단이었습니다. 서로 데면데면 지내면서 소라는 생각합니다.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거야말로 나나가 가장 혐오하는 애자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준 것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p.142)

 

'삯'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맥줏집을 하는 나기는 학창시절 동성의 같은 반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부모 둘 다 교육자인 집안에서 태어난 '너'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너'의 아버지에게 수시로 맞아 멍이 들었고 '너'를 사랑하는 나기는 그런 '너'를 늘 쫓아다녔습니다. '너'가 어울렸던 불량한 아이들에게 맞으면서도 나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나기는 '너'에게 끊임없이 엽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답장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엽서의 주소로 '너'가 찾아옵니다. 나기의 집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흠씬 맞고 들어온 '너'를 나기가 돌봅니다. 나기는 '너'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나기는 '너'로부터 맞아 이가 부러집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애자의 요양원에 갔을 때 나기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점차로 그리고 조용히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고 완전해졌다. 껍데기처럼 그녀는 그것을 뒤집어썼다. 그녀에 관해 언제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딸들에게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나타난 것처럼 조만간 벽 건너편에서 문득 사라질 것이고 그 넓고 기묘한 공간에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88)

 

소설은 화자를 달리하여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라 -> 나나 -> 나기 -> 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나나와 애자의 마지막 대화는 애절합니다.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p.227)

 

우리는 아무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지도, '계속해야만합니다'의 의무도 아닌,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에서 살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어떤 면에서는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튼 계속해봅니다. 더 확인해볼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필멸의 시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허망한 결과를 끝내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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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더위는 제법 멀어진 느낌입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죽을 것 같던 더위가 마치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인 양 아득하기만 하니 사람만큼 간사한 종(種)도 다시 또 없을 듯싶습니다. 흩어지는 빗방울들 사이로 끝내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올망졸망한 상념들이 나타났다 스러지곤 합니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보았습니다. 가을은 아직 멀었는가, 하릴없는 질문 한 방울이 잔 속으로 떨어집니다. 오지도 않은 가을에 나는 벌써 다가올 겨울 추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잠시도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듯합니다. 떠나지 않는 걱정은 언제나 묵직한 지병처럼 어깨를 짓누릅니다.

 

오늘은 광복절. 과거의 어느 한때는 매년 삼일절과 광복절에 맞춰 태극기를 단 폭주족들이 도심의 밤거리를 장악하곤 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광복절 기념식이나 대통령의 기념연설보다 더 크게 보도되곤 했었지요. 그리하여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으레 폭주족을 차단하기 위한 교통 경찰의 대비책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제는 떼를 지어 도심의 밤거리를 활보하던 폭주족의 무리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졌나 봅니다.

 

한반도의 안보가 위중한 요즘, 북한과의 연락 채널을 모두 끊었던 전 정권의 어이없는 행태가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두 손 두 발이 묶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정치는 일개 감정풀이가 아님을 새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저급한 기분풀이여서도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현 정부와 대통령이 냉철한 이성으로 현 시국을 잘 풀어가리라 간절히 기대하게 됩니다.

 

여름 휴가와 휴일 등으로 여유로운 시간이 비교적 많았었는데 의외로 책을 읽은 시간은 형편없이 줄었습니다. 게으름만 늘어나는 요즘입니다. 더위를 핑계삼아서 말이지요.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리려나 봅니다. 어쩌면 나는 '일일부독서'의 핑계를 더위에서 비로 전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장마가 지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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