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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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책을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다시 읽기 시작했던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그닥 좋은 머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만치 뒤처지는 머리도 아니어서 그동안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는데 장석주 시인이 쓴 <은유의 힘>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절반쯤 이해가 되었더라면 그나마 '아, 내 머리가 나쁘구나.'생각하면서 적당히 포기를 했었을 텐데 절반커녕 1/3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책을 읽었다 말하기도 창피한 노릇이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설렁설렁 읽었던 것도 그런 결과를 자초한 한 이유가 될 터였다, 아무튼 나는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지금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한 권의 책을 거푸 두 번이나 읽었지만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닥 진전이 없었다. 학창시절 '직유법이란 ~처럼, ~같이, ~듯이, ~인 양 등의 조사를 붙여서 글을 꾸미는 방법이고 은유법은 조사 없이 A는 B이다, 또는 A는 B의 C이다와 같이 단언하듯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배워왔기에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이나 상식만으로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케케묵은 2D의 지식으로 3D를 이해하려는 꼴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그것은 차라리 텅 빈 신체다. 이것은 항상 없는 것, 이질적인 것, 낯선 것을 새 현전으로 뒤집어쓰고 새로 태어남이다." (p.31)

 

전공이 국문학이나 국어교육학이었더라면 그나마 큰 어려움 없이 책의 내용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쪽 분야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경제학이고 보니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내게 들었던 느낌은 그야말로 외국어 원서를 읽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나는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이렇게라도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러나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기만 했었더라면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나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읽어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조금은 낯설고 생소한 느낌마저 드는 앞쪽 부분을 어느 정도 지나면 시인이 들려주는 '시의 이해'가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시와 함께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한 고비를 넘으면 조금 수월한 시기가 반드시 오는 것이다.

 

"앞서 김수영의 시에서 보았듯이 이름 없이 '식모'라고 불려지던 그녀가 '순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자 어엿한 인격과 정체성을 가진 의미의 존재로 떠오른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저 물질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을 갖고 호명될 때 그는 존재의 존엄성이라는 아우라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p.129)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는 과연 유용한가? 문학과 과학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는 시를 읽는다는 게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시간낭비이자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다 몰라서 하는 얘기다. 정작 시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게 하는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한 듯 보인다. 그러므로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 자연이나 과학의 원리를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시인의 눈은 현상 너머의 실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단순히 시인이 발견한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인을 '견자(見者)'라고 한다. 프랑스의 한 조숙했던 시인이 한 말이라고 한다. '견자'라는 말을 단순하게 풀이하자면 보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봄'은 대상에서의 본성적 이끌림이고, 주체의 의지가 그것을 향해 막무가내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그 대상은 주체를 향해 제 몸을 활짝 열어젖힌다. '봄'은 시각의 일이 아니라 마음이 작동하는 직관의 일이다. 대상을 사랑해야만 대상이 보인다. '봄'과 '앎'은 본디 하나다. 시가 태어나는 찰나는 의식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그 대상이 마음에 도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 찰나는 기지(旣知)의 것에서 미지(未知)의 것을 직관하는 순간이다. 이때 직관은 말로써 오지 않고 빛으로 온다. 언어를 장악하는 좌뇌 작동이 멈춘 채 우뇌의 어떤 영역을 환한 빛이 물들이는 것이다. 시인은 이 빛, 이미지로 온 것에 언어를 덧입힐 뿐이다. 시인은 시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즐비한 것들의 발견자다." (p.272)

 

대학시절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던 친구 한 명이 시집을 냈었다. 나는 선물로 받았던 그의 시집을 읽고 '시가 너무 어렵다'는 나 나름의 불만을 쏟아냈었다. 그에 대해 친구는 '시인이 어렵게 썼으니 독자도 어렵게 이해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말했었다. 시는 어찌보면 지(知)의 자각이나 인식이 아닌, 지(知)의 체험인 셈이다. 지(知)를 체험하기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당시에 친구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마음의 근육이 단단하지 못했었다. 가을이 멀지 않았다. 시는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낙엽이 지는 그 짧은 순간의 파동을 몸으로 깨닫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건 어쩌면 삶을 적극적으로 자각하는 첫번째 단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시를 읽는다는 건 삶을 체험하는 일이다. 시가 무작정 좋아서 시인이 되었다는 장석주 시인은 '시를 쓰고 읽으며 향유하는 동안 나의 가난은 유복하고, 내 영혼은 풍요를 누렸다'고 고백한다. 장석주 시인이 이끄는 시의 향연에 못 이기는 척 이끌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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