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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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아무래도 천천히 흘려보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예전보다 숨도 더 천천히 쉬고, 뭐 하나라도 더 찬찬히 보고, 더 오래 생각하고, 시간을 잊고 이따금 남들 다 잠든 시간까지 오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마구 흘려보내다 보면 흐르는 시간쯤이야 '아무래도 좋을 어떤 것'으로 변해버릴 듯합니다. 언젠가는 말입니다.

 

황정은의 소설에 대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소설의 문체가 다분히 시적이라거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작가의 시선이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만의 독특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누구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작가의 시선이 닿기만 하면 우리가 알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작가가 보는 순간 피사체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 아무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작가는 단순한 시선만으로 끄집어내는 듯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차이는 아마도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오랜 숙고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발견한 여러 모습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시작하고, 열매 맺고, 어떤 식으로 작별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소라, 나나, 나기, 애자, 순자 등으로 단출합니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입니다. 애자는 그들의 엄마이고요. 나기와 순자는 모자지간입니다.

 

소라와 나나의 엄마인 애자는 사랑이 전부인 여자였습니다. 이름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소라와 나나가 각각 열 살, 아홉 살일 때 전부라고 믿었던 남편이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공장의 톱니바퀴에 끼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잃은 애자는 서방 잡아 먹은 년이라는 시댁의 냉대 속에 보상금 한 푼 없이 내쳐집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애자는 소라와 나나를 데리고 나기와 순자가 사는 집으로 이사합니다. 단순히 월세가 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거실을 공유하는 이상한 구조의 셋방에서 두 집의 동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애자는 삶의 끈마저 놓아버린 채 고통만 키워갑니다. '사랑뿐이던 애자는 사랑을 잃자 껍질만 남은 묘한 것'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애자는 그날 이후로 그다지 죽으려는 기색은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고. 나나는 그런 것을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꿈 같은 데 나타나서 애자를 데려오라고 해봤자 안되는 거야, 할머니." (p.99)

 

나기의 엄마 순자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아 생활합니다. 나기의 아버지는 겨울철에 사과궤짝을 들다가 뇌출혈로 죽었습니다. 나이보다 늙어보이는 순자는 마음만은 넉넉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애자를 대신해 나기의 도시락과 함께 소라와 나나의 도시락도 챙겨줍니다. 그렇게 성장한 소라와 나나는 이제 애자가 남편이 된 금주씨와 연애를 하던 나이가 되었습니다. 소라는 애자와 같은 전심전력의 사랑을 경계합니다. 반면에 나나는 사랑을 처음부터 경계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p.104)

 

삶을 이어가기보다는 고통만 키워가는 애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지 나나는 애자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애자는 그렇게 요양원으로 보내집니다. 어느 날 소라는 단지 추측으로만 알던 나나의 임신을 확인하기 위해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직장 동료 모세의 아기를 임신한 나나는 순순히 고백합니다. 소라는 싫다는 기색도 없이 나나를 돌봅니다. 나나가 모세의 부모님을 뵈러 갑니다. 화장실에서 요강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모세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요강인데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겨진다는 모세의 말을 듣고 나나는 놀랍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떠맡겨지고 그런 일들이 당연한 의무처럼 받들어지는 현실에 나나는 질색합니다. 나나는 결국 모세와 헤어집니다.

 

애자가 시댁으로부터 내쳐진 후 소라와 나나 역시 친가와 연을 끊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모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할머니의 생신을 맞아 친척들끼리 밥을 먹기로 했다며 소라와 나나도 참여하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백부네 가족과 할머니, 그리고 소라와 나나가 시외에서 오리고기를 먹고 돌아온 후 소라와 나나는 서로 다툽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한 나나가 보기 싫었을 텐데 그런 내색 하나 없이 잘해주는 소라를 두고 나나가 '징그럽다'고 한 게 싸움의 발단이었습니다. 서로 데면데면 지내면서 소라는 생각합니다.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거야말로 나나가 가장 혐오하는 애자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준 것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p.142)

 

'삯'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맥줏집을 하는 나기는 학창시절 동성의 같은 반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부모 둘 다 교육자인 집안에서 태어난 '너'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너'의 아버지에게 수시로 맞아 멍이 들었고 '너'를 사랑하는 나기는 그런 '너'를 늘 쫓아다녔습니다. '너'가 어울렸던 불량한 아이들에게 맞으면서도 나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나기는 '너'에게 끊임없이 엽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답장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엽서의 주소로 '너'가 찾아옵니다. 나기의 집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흠씬 맞고 들어온 '너'를 나기가 돌봅니다. 나기는 '너'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나기는 '너'로부터 맞아 이가 부러집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애자의 요양원에 갔을 때 나기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점차로 그리고 조용히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고 완전해졌다. 껍데기처럼 그녀는 그것을 뒤집어썼다. 그녀에 관해 언제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딸들에게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나타난 것처럼 조만간 벽 건너편에서 문득 사라질 것이고 그 넓고 기묘한 공간에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88)

 

소설은 화자를 달리하여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라 -> 나나 -> 나기 -> 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나나와 애자의 마지막 대화는 애절합니다.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p.227)

 

우리는 아무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지도, '계속해야만합니다'의 의무도 아닌,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에서 살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어떤 면에서는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튼 계속해봅니다. 더 확인해볼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필멸의 시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허망한 결과를 끝내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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