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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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한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요. 맞습니다. 나치 정권의 선동가로서 그는 히틀러를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천재 선동가'로 평가받고 있는 괴벨스에 대해 그의 개인 속기사였던 오토 야콥스는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하고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니베르줌 필름 주식회사를 구입하는 등 영화산업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당시에 대중 선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전 도구로 간주되었던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기도 했지요.

 

국정원이나 군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하여 댓글 공작을 지시하고 공영방송 KBS와 MBC를 정권의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박근혜, 이명박 정권의 실상을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나는 나치 체제의 괴벨스를 떠올리곤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지탄을 받는 괴벨스를 모방하려고 했을까요. 그것도 우리의 선조도 아닌 먼 나라의 오래 전 인물을 말이지요. 그들이 저질렀던 일들이 괴벨스가 생각하고 실천했던 것과 어쩌면 그렇게 판박이로 닮아 있는지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게다가 광우병 촛불집회 즈음에 SNS에 올렸던 한 줄 문장으로 인하여 영화계에서 10여년 동안 철저히 배제되었던 어느 여배우를 생각할 때, '나한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이 현실에서 되살아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자는 누구나 자신의 뜻과 생각이 국민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전달되고 어떠한 반대 의견도 없이 신속하게 이행되기를 바라겠지요. 권력자도 인간이기에 그런 유혹에 항상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다양한 의견이 상존하는 민주주의 체제에 무력감을 느끼는 권력자라면 괴벨스의 본보기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겠지요. 그러나 권력자가 국민의 생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발상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체주의로 회귀하겠다는 선언이나 진배없기에 현명한 국민이라면 권력자의 의도를 끝없이 의심하여야 마땅하겠지요.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마왕>은 이러한 주제로 쓰였습니다. 소설에는 감성적인 언어와 탁월한 연설 실력으로 이탈리아 국민을 전체주의로 이끌었던 무솔리니와 비견되는 정치인 이누카이가 등장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신예 정치인 이누카이의 연설을 우연히 듣게 된 안도는 그가 위험 인물임을 직감합니다. 단테의 시를 인용하며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적인 정서를 파고들었던 무솔리니처럼 이누카이 또한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지지세를 넓혀갑니다. 이누카이는 단호한 어법과 탁월한 정보력으로 어느 토론에서건 상대 토론자를 압도합니다. 그에 따라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갑니다. 이누카이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평화헌법의 개정이었지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이라면 설설 기었지. 미국한테 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는 꾸지람을 듣고는 쩔쩔매기나 하고. 그때 단호한 태도로 '이건 미국이 만든 헌법이 아닌가? 어떻게 자위대를 해외에 보내란 말인가. 자업자득이지!' 하면서 딱 잘라 거절할 배짱도 없었어. 골목대장의 눈치를 살피는 코흘리개처럼 어떻게든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햇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돈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고 변명했지만 나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 의문이었어. 그저 대장의 질책에 견디지 못했던 것뿐이 아닐까, 그건." (p.204~p.205)

 

안도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30보 이내의 거리에서는 자신의 의도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거나 TV 속의 인물에게는 통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능력이지만 말이죠.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었던 안도는 결혼한 동생 준야와 그의 아내 시오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생각이 많았던 안도와는 달리 준야는 형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따랐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죠. 소설은 1부 '마왕/형 안도의 이야기'와 2부 '호흡/동생 준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1부에는 주로 안도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안도의 직장 동료와 고등학교 동창 시마, 안도가 자주 찾는 카페 '두체'의 지배인 등이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도가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이누카이에 저항하는 인물이라면 시마는 시류에 휩쓸리는 생각이 없는 보통의 소시민으로서 이누카이의 지지자입니다. '두체'의 지배인은 이누카이의 열혈 지지자로서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이누카이를 지켜주곤 합니다. 안도가 이누카이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두체'의 지배인은 안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럼 민주주의는 선인가? 민주주의는 몇 명을 죽였지? 사회에는 곱게 자라서 콧대만 높아진 젊은이와, 오직 자신한테만 관심이 있는 인간들만 등장했어. 인터넷을 통하지 않으면 사회와 접촉하지 못하는 녀석들뿐이야. 정보로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어. 주택가에서는 끊임없이 아이들이 유괴를 당할 처지에 놓여 있고, 10대들 사이에 성병이 만연하고 있지. 과연 이 세상이 올바른 세상인가?" (p.132)

 

'나는 고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산다는 것은 곧 고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안도는 이누카이가 하는 거리 연설에서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누카이로 하여금 엉뚱한 말을 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려는 의도였지요. 그러나 안도의 계획은 '두체' 지배인에 의해 무산되고 오히려 안도 자신이 뇌일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생각을 믿고 나간다면."

"나간다면?"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형은 그렇게 말했어." 준야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꼬대를 하는 것만 같았다.(p.293)

 

안도가 이누카이의 거리 유세 현장에서 어이없이 죽은 후 준야와 시오리는 도쿄를 떠나 센다이로 이사합니다. 죽은 안도의 영혼이 그들 두 사람을 돌보았던 까닭인지 준야에게는 뜻하지 않았던 행운이 찾아옵니다. 1/10 이상의 확률에서는 어떤 게임에서든 결코 지는 법이 없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죠. 가위바위보든 경마든 말입니다. 센다이로 이사할 때만 하더라도 준야는 아주 쉽게 일자리를 구했고, 안도가 죽은 후 TV조차 없애버린 그들 부부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유유자적 살아갑니다. 그리고 준야는 멸종 위기 맹금류를 관찰하는 그의 일에 만족하는 듯 보였습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머리를 뒤로 젖혀 내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펼쳐져 있다. 느릿하게 흐르는 흰 구름 조각을 보고 있자니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보고 있는 듯한 안도감이 느껴져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뻣뻣한 몸이 풀린다. 전방을 보면 삼나무가 들어찬 작은 산이 태평스럽게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당연하지만 정치도 사회 문제도, 국민투표를 둘러싼 논쟁도 이곳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와 준야와 매, 그리고 논의 벼이삭과 개구리가 있을 뿐이었다." (p.258)

 

가위바위보에서 늘 이기기만 하던 준야는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오리와 함께 경마장을 찾습니다. 그는 겁도 없이 1등마에게만 베팅하는 단승식 마권을 구입합니다. 딴 돈을 모두 베팅하는 방식으로 마권을 사다 보니 돈은 어느새 거액으로 변해 있었고 준야와 시오리는 그 돈 전부를 1/12 확률의 단승식 마권에 최종 베팅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잃고 말았지요. 준야의 능력은 1/10 이상의 확률에서만 승산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것입니다. 형의 고등학교 동창인 시마를 만나 세상을 바꾸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준야는 도쿄를 오가며 돈을 모으는데...

 

소설에서 안도는 '인간이란, 더구나 머리가 좋은 놈일수록 평화나 건강 같은 걸 촌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공작을 지시했던 이전 정부의 권력자들은 북한과의 평화나 국민의 건강 모두 뒷전이었죠. 그들은 아마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평범했던 한 사람을 회복할 수 없는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일 뿐 역사는 정의를 향해 수렴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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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입동, 겨울은 아직 저만치 멀기만 한 듯한데 달력은 이미 겨울을 알리고 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는 송년 모임 일정과 약속장소를 알려왔다. 다음달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자고 했다. 벌써 1년이 다 간 느낌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는 오늘, 세상에는 트럼프처럼 다양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권에서는 대개 국정감사와 내년도 예산 심사를 끝으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되지만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국정감사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국민을 대신하는 국회의원들의 노고에 감사하기보다는 짜증 지수가 절로 높아지게 된다. 혹여라도 어쩌다 본 뉴스에서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등장하여 의미도 없는 '뻘~짓'을 하거나 심한 막말로 실검 순위에 오르내리게 되는 경우에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건 물론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나는 올해 그런 경험을 여러번 했다. 그건 순전히 야당 원내대표를 하는 내 지역구의 국회의원 때문이었다. 낮술을 한 듯 불콰해진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저런 인간을 누가 국회의원으로 찍어줬는지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들고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진다.

 

어제는 '전희경'이라는 특이한 인간이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별 미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마치 미친 개가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나이를 보건대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그녀는 군부독재가 자행되던 80년대 대한민국의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할 터인데, 게다가 독재에 저항했던 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아닐 터인데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는 하지 못할망정 케케묵은 이념 논쟁으로 국감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녀가 속한 자유당의 행태였다. 사과는커녕 그녀의 도를 넘은 막말이 '야당으로서는 할 수 있는 질문이고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질의내용'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사람이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지 묻고 싶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산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도 '전희경'과 같은 특이한 인간이 존재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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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 - 손미나의 사람, 여행
손미나 지음 / 씨네21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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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작품을 읽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남들이 들으면 손미나의 애독자라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은 아주 달라서 나는 그녀의 작품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다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제쳐두고 그녀의 작품을 벌써 세 권씩이나 읽었으니 우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006년 발간된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었을 때 나는 KBS 아나운서였던 저자의 이력에 끌렸던 게 사실이었지만 책에서 보여준 저자의 자유분방함과 솔직함이 꽤나 인상적이이라고 느꼈다. 기회가 되면 그녀의 작품 한두 권쯤 더 읽어도 괜찮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지난해 초에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은 그녀의 여행기에서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서 보여준 솔직하고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느 여행기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주였다. 두 번째 여행기를 읽고 어지간히 실망했던 내가 같은 작가의 작품을 다시 손에 잡게 될 줄이야. 아무튼 나는 우여곡절 끝에 손미나의 작품을 세 권째 읽었다.

 

<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은 일반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과 인연이 깊은 열네 명의 인물을 선택하여 저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손미나의 사람, 여행'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홈스쿨링을 하는 십대의 소년에서부터 칠십대의 세계장신구박물관 관장에 이르기까지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열네 명의 여행자를 만나 대화하는 것은 내게는 또 다른 여행과 같았다. 여행이 줄 수 있는 설렘과 호기심, 통찰과 지혜를 대화를 통해 선물 받을 수 있었으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다름을 알고 인정하며, 몰랐던 자신의 뒷모습을 마주하며, 다시 돌아올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것, 그렇게 자기만의 우주를 넓혀가는 일이었다." (p.6)

 

저자가 만난 사람은 나영석 피디, 가수 윤상, 개그우먼 송은이, 개그맨 김영철, 팝페라 가수 임형주, 영화감독 류승완,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 배우 엄지원 등 누구나 아는 유명인뿐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인아, 열여섯 살 소년 임하영, 세계장신구박물관장 이강원, 국제변호사 이소은, 역사 여행가 권기봉 등 다소 생소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사실 인터뷰의 생명은 인터뷰이로부터 솔직하고도 진정성 있는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친밀도도 중요하겠지만 인터뷰어의 적절한 질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는 인터뷰어의 능력이야말로 좋은 인터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 자율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그동안 해왔던 공부의 방식인데, 어떤 책을 읽었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초등학교 때는 주로 소설이나 판타지를 많이 읽었는데요,『나니아 연대기』나 미하엘 엔데 작가도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책을 계속 읽다 보니까 관심 가는 분야가 생기더라곤요. 홍세화 선생님이나, 박노자 선생님, 장하준 교수님 책들도 재미있게 읽었고, 외국 작가는 인문학 경우는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문학 경우는 조지 오웰……" (p.43)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또는 등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비유의 대상이 무엇이든 인생은 그 자체로서, 여행이나 등산을 품 안에 아우르면서 끝을 향해 나아간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햇던 카프카(Franz Kafka)의 말처럼 여행이 소중한 이유는 여행의 끝이 존재하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서 '나에게 솔직해져야겠다는 것'을 깨우쳤다는 나영석 피디나 페루 여행을 통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가수 윤상의 말처럼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이 곧 영화와 같고 영화 자체가 일종의 여행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과 인생을 다루는 영화와 여행은 아주 잘 어울리는 테마인 것 같아요.

한국 제목으로 <아메리카의 밤 La Nuit Americaine>이라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는데요, 영화 만드는 과정에 관한 영화예요. 트뤼포 감독이 실제로 극중 감독으로 출연하기도 하는데요, 그 영화 오프닝은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 만드는 것을 여행에 비유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요. 영화 만들기란 역마차 여행과 같다. 처음 출발할 때는 모두가 들떠 여행을 기대하지만 여행의 중간을 지나면 지치기 시작하고 끝날 때쯤 되면 모두가 제발 이 여행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는 그 순간 다시 또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만들기는 역마차 여행과 비슷하다고 표현하거든요." (p.356)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에 의해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던 일들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거나 설마 그렇게까지야 반신반의했던 것들조차 확연한 증거나 증언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 요즘,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시스템으로도 망하지 않고 버텨온 게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요즘, 그럼에도 그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게 되는 요즘, 여행은 분명 그 모든 게 보기 싫어서 떠나는 것은 아닐 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망명이지 여행은 아닐 것이므로. 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놓고 확인하지 않으면 영원히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지난 정부로부터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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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그의 말은 옳았다. '사람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법'이라고 그는 주장했었다. 오래 기억할 만큼 가치가 있는 말은 아니라는 듯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그의 말은 커피숍의 희끄무레한 조명 속에서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 내리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편파적이기 때문이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잖아?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지만 시시때때로 듣는 게 사람에 대한 평가이고 보면 신뢰할 만한 나름의 평가 기준 한두 개쯤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의 평가는 믿지 않는다는 거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과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지. 공정함이란 있을 수 없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조차 없는 듯한, 찬바람이 불 정도로 냉정한 사람의 평가는 그나마 믿을 만하다는 게 내 지론이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인지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선약이 있었던 나는 이후의 토론을 듣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저녁 모임에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멤버 전원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한다. 따로 정한 규칙은 없지만 정치적 주제는 가급적 삼가자는 게 모임 전원이 찬성하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자리를 옮겨 술을 한 잔 하거나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귀찮으면 같은 자리에서 오래 앉아 있다가 가볍게 헤어지곤 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바쁜 순서로 먼저 자리를 뜨고 마지막 한 명이 남겨질 때까지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모임 같지 않은 모임. 나는 그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렇다고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이나 반대되는 생각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할 수 있다.

 

어제는 배우 김주혁이 세상을 떠났다. 젊다면 젊은 나이인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거나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생이 별게 아니구나' 하는 헛헛한 느낌도 들었다. '오인회'의 다음달 주제는 '죽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뒤돌아보면 삶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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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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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희망에 대한 응답보다는 현실의 삶에서 무자비한 절망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에 앞서 우리는 현실의 이러저러한 작은 절망을 통해 절망과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고 외칠 만큼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수는 없을지라도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스스로 담담해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이미 현실의 삶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크나큰 절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진규의 소설 <달을 먹다>는 내게 삶의 희망을 말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을 보여준 책이다.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기구한 삶을 그렸던 이 소설은 아홉 명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 한 번에서 열 번씩 들려준다. 양반 가문 두 집과 약국·역관 등 중인계급 두 집간에 3대에 걸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뼈대로 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신분과 관습을 벗어난 인간의 사랑과 저항할 수 없는 규범 앞에 허물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안의 유명한 난봉꾼 류호의 아내는 남편의 호색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한 때문인지 자신의 딸 묘연만큼은 흠이 없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묘연의 지아비로 낙점된 사람이 좌의정 집안의 아들 김태겸이었다.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의 시아버지와 변덕이 심한 시어머니, 벗들 앞에서만 유쾌한 남편의 틈바구니에서 묘연은 못 본 체 입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홀아비 최약국에게로 시집갔던 이복동생 하연이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묘연의 시댁으로 찾아와 난이라는 계집아이를 낳는다. 하연은 사실 묘연의 친정 아비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의 딸이었다. 묘연에게는 이복동생이지만 신분이 달랐던 것이다. 난이는 가난했던 본가에서 나와 다섯 살 무렵부터 묘연의 시댁에서 자라게 된다.

 

묘연의 아들 희우는 어린 난이를 처음 볼 때부터 관심을 두게 되지만 난이는 희우를 볼 때마다 줄곧 울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을 꺾으려던 난이가 연못에 빠지고 허우적대던 난이를 희우가 구한다. 그날 이후로 난이는 희우 앞에서 울지 않았고 '오라버니'라 부르며 따르게 된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지만 엄연한 오누이 사이인 그들은 내색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른다. 감선사에서 은거하던 희우가 건강만 악화되어 돌아온 직후에 한성판부사 집안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오고 희우는 묘연의 뜻을 거절하지 못한다. 묘연도 두 사람의 사랑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진찬연에서의 가락이 뒤늦게 속을 휘고 돌았다. 삼킨 눈물이 오장육부도 모자라 뼈마디까지 헤가르고 있었다. 통증이 일었다. 간신히 살아남아 매달려 있던 한 방울이 결국 얼굴을 둘로 조각냈다. 신음이 뱉어졌다. 하연의 퍼런 얼굴과 희우와 난이, 두 아이들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뿌옇게 번졌다." (p.70)

 

여장부 홍씨의 막내아들 여문은 북촌의 약국 '최국'을 지나다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끌려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곳에는 최약국의 본처 후인이 바람이 나 달아난 후 홀로 남겨진 향이가 있었다.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새엄마 하연과 점점 망가져 가는 아버지 최약국을 보면서 향이는 외롭게 자랐고, 태어날 때 다리가 눌리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었던 향이는 집밖을 나다니지도 않았다.여문은 향이에게 무작정 끌렸다. 자신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던 여문은 어머니 홍씨에게 향이와 결혼하겠노라 말하지만 단박에 거절당한다.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한 여문은 향이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최국 주위만 맴돈다. 어머니 홍씨가 죽자 여문은 최약국을 살해하여 연못에 빠트린다.병수발을 들던 향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약국이 죽자 향이마저 자살하고 만다. 여문은 일부러 다리를 절면서 향이의 방에 눌러 앉는다. 숫제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형제들이 때리고 말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수선한 계절을 정리하듯이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가을이 빠르게 깊어가고 있었다. 가지를 막 떠나온 나뭇잎들이 무거운 공기 속을 팔랑거리며 날다가 떨어졌고, 그럴수록 나무들의 골격은 점점 적나라해졌다. 치밀해진 시간이 나무를 파고들어 자상刺傷을 남겼다. 촘촘하고 선명한 그 흉터는 머지않아 나무의 연륜이 될 것이었다." (p.232)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묘연, 태겸, 여문과 향이, 희우와 난이, 후인과 후평, 묘연의 오빠 현각 스님 등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힌다.각 인물의 시선으로 다채롭게 서술되는 이 소설은 에피소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여 긴 이야기를 이룬다. '당대의 온갖 사물, 짐승, 꽃과 약제,기후, 풍습 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박물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타계한 최명희 작가를 연상시킬 때도 있다.'고 했던 박완서 작가의 심사평처럼 소설의 묘사는 탁월했다. 구성상의 몇몇 허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강해졌다. 미세먼지의 농도도 덩달아 높아졌는지 목이 칼칼하다. 바람이 흩어질 때마다 가벼운 낙엽이 비처럼 쏟아졌다. 스산한 분위기였다. 계절이 겨울을 향해 가듯 모든 이의 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간다.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씩 상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공기도 탁한 휴일 오후, 소설 한 권을 읽은 소감이 엄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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