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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ㅣ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나한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요. 맞습니다. 나치 정권의 선동가로서 그는 히틀러를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천재 선동가'로 평가받고 있는 괴벨스에 대해 그의 개인 속기사였던 오토 야콥스는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하고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니베르줌 필름 주식회사를 구입하는 등 영화산업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당시에 대중 선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전 도구로 간주되었던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기도 했지요.
국정원이나 군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하여 댓글 공작을 지시하고 공영방송 KBS와 MBC를 정권의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박근혜, 이명박 정권의 실상을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나는 나치 체제의 괴벨스를 떠올리곤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지탄을 받는 괴벨스를 모방하려고 했을까요. 그것도 우리의 선조도 아닌 먼 나라의 오래 전 인물을 말이지요. 그들이 저질렀던 일들이 괴벨스가 생각하고 실천했던 것과 어쩌면 그렇게 판박이로 닮아 있는지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게다가 광우병 촛불집회 즈음에 SNS에 올렸던 한 줄 문장으로 인하여 영화계에서 10여년 동안 철저히 배제되었던 어느 여배우를 생각할 때, '나한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이 현실에서 되살아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자는 누구나 자신의 뜻과 생각이 국민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전달되고 어떠한 반대 의견도 없이 신속하게 이행되기를 바라겠지요. 권력자도 인간이기에 그런 유혹에 항상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다양한 의견이 상존하는 민주주의 체제에 무력감을 느끼는 권력자라면 괴벨스의 본보기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겠지요. 그러나 권력자가 국민의 생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발상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체주의로 회귀하겠다는 선언이나 진배없기에 현명한 국민이라면 권력자의 의도를 끝없이 의심하여야 마땅하겠지요.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마왕>은 이러한 주제로 쓰였습니다. 소설에는 감성적인 언어와 탁월한 연설 실력으로 이탈리아 국민을 전체주의로 이끌었던 무솔리니와 비견되는 정치인 이누카이가 등장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신예 정치인 이누카이의 연설을 우연히 듣게 된 안도는 그가 위험 인물임을 직감합니다. 단테의 시를 인용하며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적인 정서를 파고들었던 무솔리니처럼 이누카이 또한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지지세를 넓혀갑니다. 이누카이는 단호한 어법과 탁월한 정보력으로 어느 토론에서건 상대 토론자를 압도합니다. 그에 따라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갑니다. 이누카이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평화헌법의 개정이었지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이라면 설설 기었지. 미국한테 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는 꾸지람을 듣고는 쩔쩔매기나 하고. 그때 단호한 태도로 '이건 미국이 만든 헌법이 아닌가? 어떻게 자위대를 해외에 보내란 말인가. 자업자득이지!' 하면서 딱 잘라 거절할 배짱도 없었어. 골목대장의 눈치를 살피는 코흘리개처럼 어떻게든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햇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돈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고 변명했지만 나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 의문이었어. 그저 대장의 질책에 견디지 못했던 것뿐이 아닐까, 그건." (p.204~p.205)
안도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30보 이내의 거리에서는 자신의 의도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거나 TV 속의 인물에게는 통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능력이지만 말이죠.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었던 안도는 결혼한 동생 준야와 그의 아내 시오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생각이 많았던 안도와는 달리 준야는 형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따랐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죠. 소설은 1부 '마왕/형 안도의 이야기'와 2부 '호흡/동생 준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1부에는 주로 안도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안도의 직장 동료와 고등학교 동창 시마, 안도가 자주 찾는 카페 '두체'의 지배인 등이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도가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이누카이에 저항하는 인물이라면 시마는 시류에 휩쓸리는 생각이 없는 보통의 소시민으로서 이누카이의 지지자입니다. '두체'의 지배인은 이누카이의 열혈 지지자로서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이누카이를 지켜주곤 합니다. 안도가 이누카이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두체'의 지배인은 안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럼 민주주의는 선인가? 민주주의는 몇 명을 죽였지? 사회에는 곱게 자라서 콧대만 높아진 젊은이와, 오직 자신한테만 관심이 있는 인간들만 등장했어. 인터넷을 통하지 않으면 사회와 접촉하지 못하는 녀석들뿐이야. 정보로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어. 주택가에서는 끊임없이 아이들이 유괴를 당할 처지에 놓여 있고, 10대들 사이에 성병이 만연하고 있지. 과연 이 세상이 올바른 세상인가?" (p.132)
'나는 고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산다는 것은 곧 고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안도는 이누카이가 하는 거리 연설에서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누카이로 하여금 엉뚱한 말을 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려는 의도였지요. 그러나 안도의 계획은 '두체' 지배인에 의해 무산되고 오히려 안도 자신이 뇌일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생각을 믿고 나간다면."
"나간다면?"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형은 그렇게 말했어." 준야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꼬대를 하는 것만 같았다.(p.293)
안도가 이누카이의 거리 유세 현장에서 어이없이 죽은 후 준야와 시오리는 도쿄를 떠나 센다이로 이사합니다. 죽은 안도의 영혼이 그들 두 사람을 돌보았던 까닭인지 준야에게는 뜻하지 않았던 행운이 찾아옵니다. 1/10 이상의 확률에서는 어떤 게임에서든 결코 지는 법이 없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죠. 가위바위보든 경마든 말입니다. 센다이로 이사할 때만 하더라도 준야는 아주 쉽게 일자리를 구했고, 안도가 죽은 후 TV조차 없애버린 그들 부부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유유자적 살아갑니다. 그리고 준야는 멸종 위기 맹금류를 관찰하는 그의 일에 만족하는 듯 보였습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머리를 뒤로 젖혀 내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펼쳐져 있다. 느릿하게 흐르는 흰 구름 조각을 보고 있자니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보고 있는 듯한 안도감이 느껴져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뻣뻣한 몸이 풀린다. 전방을 보면 삼나무가 들어찬 작은 산이 태평스럽게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당연하지만 정치도 사회 문제도, 국민투표를 둘러싼 논쟁도 이곳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와 준야와 매, 그리고 논의 벼이삭과 개구리가 있을 뿐이었다." (p.258)
가위바위보에서 늘 이기기만 하던 준야는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오리와 함께 경마장을 찾습니다. 그는 겁도 없이 1등마에게만 베팅하는 단승식 마권을 구입합니다. 딴 돈을 모두 베팅하는 방식으로 마권을 사다 보니 돈은 어느새 거액으로 변해 있었고 준야와 시오리는 그 돈 전부를 1/12 확률의 단승식 마권에 최종 베팅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잃고 말았지요. 준야의 능력은 1/10 이상의 확률에서만 승산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것입니다. 형의 고등학교 동창인 시마를 만나 세상을 바꾸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준야는 도쿄를 오가며 돈을 모으는데...
소설에서 안도는 '인간이란, 더구나 머리가 좋은 놈일수록 평화나 건강 같은 걸 촌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공작을 지시했던 이전 정부의 권력자들은 북한과의 평화나 국민의 건강 모두 뒷전이었죠. 그들은 아마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평범했던 한 사람을 회복할 수 없는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일 뿐 역사는 정의를 향해 수렴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