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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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희망에 대한 응답보다는 현실의 삶에서 무자비한 절망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에 앞서 우리는 현실의 이러저러한 작은 절망을 통해 절망과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고 외칠 만큼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수는 없을지라도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스스로 담담해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이미 현실의 삶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크나큰 절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진규의 소설 <달을 먹다>는 내게 삶의 희망을 말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을 보여준 책이다.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기구한 삶을 그렸던 이 소설은 아홉 명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 한 번에서 열 번씩 들려준다. 양반 가문 두 집과 약국·역관 등 중인계급 두 집간에 3대에 걸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뼈대로 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신분과 관습을 벗어난 인간의 사랑과 저항할 수 없는 규범 앞에 허물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안의 유명한 난봉꾼 류호의 아내는 남편의 호색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한 때문인지 자신의 딸 묘연만큼은 흠이 없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묘연의 지아비로 낙점된 사람이 좌의정 집안의 아들 김태겸이었다.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의 시아버지와 변덕이 심한 시어머니, 벗들 앞에서만 유쾌한 남편의 틈바구니에서 묘연은 못 본 체 입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홀아비 최약국에게로 시집갔던 이복동생 하연이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묘연의 시댁으로 찾아와 난이라는 계집아이를 낳는다. 하연은 사실 묘연의 친정 아비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의 딸이었다. 묘연에게는 이복동생이지만 신분이 달랐던 것이다. 난이는 가난했던 본가에서 나와 다섯 살 무렵부터 묘연의 시댁에서 자라게 된다.

 

묘연의 아들 희우는 어린 난이를 처음 볼 때부터 관심을 두게 되지만 난이는 희우를 볼 때마다 줄곧 울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을 꺾으려던 난이가 연못에 빠지고 허우적대던 난이를 희우가 구한다. 그날 이후로 난이는 희우 앞에서 울지 않았고 '오라버니'라 부르며 따르게 된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지만 엄연한 오누이 사이인 그들은 내색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른다. 감선사에서 은거하던 희우가 건강만 악화되어 돌아온 직후에 한성판부사 집안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오고 희우는 묘연의 뜻을 거절하지 못한다. 묘연도 두 사람의 사랑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진찬연에서의 가락이 뒤늦게 속을 휘고 돌았다. 삼킨 눈물이 오장육부도 모자라 뼈마디까지 헤가르고 있었다. 통증이 일었다. 간신히 살아남아 매달려 있던 한 방울이 결국 얼굴을 둘로 조각냈다. 신음이 뱉어졌다. 하연의 퍼런 얼굴과 희우와 난이, 두 아이들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뿌옇게 번졌다." (p.70)

 

여장부 홍씨의 막내아들 여문은 북촌의 약국 '최국'을 지나다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끌려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곳에는 최약국의 본처 후인이 바람이 나 달아난 후 홀로 남겨진 향이가 있었다.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새엄마 하연과 점점 망가져 가는 아버지 최약국을 보면서 향이는 외롭게 자랐고, 태어날 때 다리가 눌리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었던 향이는 집밖을 나다니지도 않았다.여문은 향이에게 무작정 끌렸다. 자신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던 여문은 어머니 홍씨에게 향이와 결혼하겠노라 말하지만 단박에 거절당한다.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한 여문은 향이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최국 주위만 맴돈다. 어머니 홍씨가 죽자 여문은 최약국을 살해하여 연못에 빠트린다.병수발을 들던 향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약국이 죽자 향이마저 자살하고 만다. 여문은 일부러 다리를 절면서 향이의 방에 눌러 앉는다. 숫제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형제들이 때리고 말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수선한 계절을 정리하듯이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가을이 빠르게 깊어가고 있었다. 가지를 막 떠나온 나뭇잎들이 무거운 공기 속을 팔랑거리며 날다가 떨어졌고, 그럴수록 나무들의 골격은 점점 적나라해졌다. 치밀해진 시간이 나무를 파고들어 자상刺傷을 남겼다. 촘촘하고 선명한 그 흉터는 머지않아 나무의 연륜이 될 것이었다." (p.232)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묘연, 태겸, 여문과 향이, 희우와 난이, 후인과 후평, 묘연의 오빠 현각 스님 등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힌다.각 인물의 시선으로 다채롭게 서술되는 이 소설은 에피소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여 긴 이야기를 이룬다. '당대의 온갖 사물, 짐승, 꽃과 약제,기후, 풍습 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박물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타계한 최명희 작가를 연상시킬 때도 있다.'고 했던 박완서 작가의 심사평처럼 소설의 묘사는 탁월했다. 구성상의 몇몇 허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강해졌다. 미세먼지의 농도도 덩달아 높아졌는지 목이 칼칼하다. 바람이 흩어질 때마다 가벼운 낙엽이 비처럼 쏟아졌다. 스산한 분위기였다. 계절이 겨울을 향해 가듯 모든 이의 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간다.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씩 상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공기도 탁한 휴일 오후, 소설 한 권을 읽은 소감이 엄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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