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견인, 애묘인 등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획기적으로 늘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내가 평일에 머물고 있는 집은 20평대의 다소 오래된 아파트인데 주로 젊은 부부나 연세가 많은 부부 또는 나처럼 독신인 사람들이 산다. 그래서인지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유난히 많다. 날씨가 무더운 여름철이면 현관문이나 창문을 열어 놓고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아파트 구조가 복도식이다 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이웃의 집안을 훔쳐보게 된다. 특별히 신경 서서 보지 않아도 이웃 가구의 구성원이며 살림 형편을 자연스레 알게 되는 셈이다. 한 층에 15가구가 사는데 반려동물 분변의 냄새 때문인지 여름이면 쓰레기 봉투를 복도에 두고 사용하는 집도 있고, 열어 놓은 현관문 앞을 지키던 강아지가 복도를 통행하는 이웃을 향해 사납게 짖어대는 경우도 더러 있다.

 

며칠 전에는 집을 나서는데 개 짖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크던지 아파트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주인이 집에 없었는지 열려진 베란다 창문을 통해 개 짖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데 개를 달래거나 제지하려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밤이 아니었으니 망정이지 깊은 밤에 벌어진 일이었더라면 동네 사람들의 원성깨나 샀을 것이다. 나는 8호실에 사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과 나이 지긋한 부부가 사는 7호와 어린 딸 둘과 젊은 부부가 사는 9호에도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게다가 7호에는 한두 마리가 아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적어도 강아지 서너 마리와 고양이 두세 마리를 키우고 있는 듯했다. 그닥 넓지 않은 아파트에서 그렇게 많은 개체수의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니 개들도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복도에서 작은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왕왕 짖는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나는 소리와 냄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새벽녘에 짖는 강아지 소리에 몇 번 잠이 깬 적도 있다. 대용량 쓰레기 봉투를 사용하는 7호는 반려동물의 분변을 처리한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 복도에 내놓곤 하는데 여름에는 그 냄새가 정말 지독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공동주택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건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반려동물의 소리 때문에 이웃과 마찰을 빚을까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성대수술을 하기도 했고 이웃과의 마찰 때문에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었다. 며칠 전에도 의정부시에서는 산책을 하던 60대 여성이 목줄이 풀린 개에 물려 큰 부상을 입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반려동물 인구 천만시대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페티켓 문화는 턱없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지 않나 싶다. 애견인들도 자신이 키우는 동물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을 갖고 이웃을 배려한다면 사람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캐치 프레이즈 '사람이 먼저다'는 이럴 때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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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빗 스태킹 - 쌓일수록 강해지는 습관 쌓기의 힘
스티브 스콧 지음, 강예진 옮김 / 다산4.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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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월, 엊그제 새해가 시작된 듯한데 2017년의 마지막 달을 맞고 있다. 지금은 송년 분위기도 많이 달라져서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던 8,90년대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많이 없어진 듯하다. 차분해졌다기보다 쓸쓸하거나 울적해진 느낌마저 감돈다. 그래도 빼놓지 않고 하는 것들이 있다. 송년모임이나 신년 계획 세우기, 해돋이·해넘이 행사 등이 그것이다. 어떤 특별한 구실이 없으면 한 자리에 모여 얼굴 한 번 마주할 기회조차 좀체 내기 힘든 바쁜 현대인들에게 송년모임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요식행위처럼 매년 반복하는 신년 계획 세우기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대표적인 신년 계획만 하더라도 '다이어트 및 외모관리', '체력관리 및 운동', '금연 및 금주', '취업', '영어공부' 등 거창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는 너무 욕심이 많거나 성급한 게 아니가 싶은 것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도 있는 것처럼 우리들 삶의 여러 분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습관'이 아무리 탐나고 부러울지라도 그것을 향해 곧바로 돌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공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그보다는 '핵심 습관'을 뒷받침하는 '보조 습관'을 신경쓰거나 '코끼리 습관'을 이루기 위해 '미니 습관'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운동을 하기(핵심 습관) 위해 맘에 드는 운동복을 준비해 놓거나 매일 체중계에 올라서기(보조 습관)를 실천하는 식이다. 또는 이삿짐 싸기(코끼리 습관)를 실행하기 위해 책정리(미니 습관)부터 하자는 식이다.

 

습관 전문가로서 신망이 두터운 스티브 스콧은 '작은 습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의 책 <해빗 스태킹>에서 강조하고 있다. 탄탄한 습관 근육을 키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습관 계획을 세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습관이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쌓이고 쌓여 형성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습관 쌓기의 가치는 각각의 습관 하나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다.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우리 삶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은 작은 습관을 '지키기 쉬운 구조'로 바꾸는 방법이다." (p.90)

 

습관에 관련된 책은 무수히 많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습관의 힘'(찰스 두히그), '인생을 바꾸는 부자 습관'(토마스 C. 콜리),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한창욱),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미즈키 아키코), '이중세뇌'(이소무라 다케시) 등이다. 이것을 다시 주제별로 나눈다면 수십 권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불공정한 사회에서 정의가 강조되는 것처럼 습관에 관련된 책이 매년 차고 넘치게 발간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핵심 습관을 게획하여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사람들이 습관 들이기를 그만두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다. 어려움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극복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습관을 방해하는 사건이 생겨 '달리던 말에서 떨어졌을 때 다시 올라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유형의 습관이든 지속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계획된 일상을 방해할만한 문제를 미리 파악하고 이에 대비한 계획까지 세워두는 것이다." (p.299~p.300)

 

스티브 스콧은 이 책에서 우리의 하루가 작은 습관들로 채워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부 '습관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 2부 '습관 쌓기를 완성하는 하루 5분 습관 127', 3부 '성공한 사람의 하루는 습관 쌓기로 이루어져 있다'로 구성된 이 책은 작지만 중요한 습관을 잊거나 뒤로 미루지 않기 위해서는 습관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하나의 일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매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인생을 완성하는 7가지 목표 영역'(커리어, 자산 관리, 건강, 여가생활, 정리정돈, 인간관계, 영성)을 분류하고 이에 필요한 127가지 실천 항목을 제시한다.

 

헤비 스모커였던 나는 2015년 1월에 담배를 끊었다. 금연을 실천한 지 이제 만 3년이 되어간다. 갑작스러운 담뱃값 인상도 내가 금연을 결심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지만 이소무라 다케시의 <이중세뇌>가 큰 도움이 되었다. 만 하루도 담배 없이 지낸 적 없었던 내가 금연을 실천한 지 하루, 이틀, 사흘 날짜가 흘러가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무한한 희열을 느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잘 알기에 그 인내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두 번 다시 담배를 피울 생각이 없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하는 산행도 다르지 않다. 습관은 쌓여가는 것이라는 스티브 스콧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책을 읽었다. 이제 나는 인생의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에 필요한 작은 습관들을 꼼꼼히 메모하여 실천하고자 한다. 2018년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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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빼놓지 않고 확인하는 게 있다. 오늘의 날씨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침 최저기온과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새벽 운동을 나갈 때 챙겨 입어야 할 옷의 두께와 마스크 착용 여부를 결정하려면 귀찮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처럼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지거나 연일 춥던 날씨가 갑자기 푸근해진 아침에 전날 기준으로 옷을 입었다가는 여간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다. 산길을 걷는 내내 등을 구부리고 몸을 잔뜩 움츠리게 되거나 더워서 코트의 앞섶을 열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온의 변화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잘만 확인하면 큰 불편 없이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옷이나 장갑 등을 활용하면 추위나 더위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날씨는 나 스스로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는 애기다. 문제는 미세먼지이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높은 날이면 운동을 나가야할지 말아야할지부터가 고민이다. 마스크를 쓰고 산을 오르는 것도 곤욕이지만 마스크가 공기 중의 미세먼지를 얼마나 걸러줄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호흡도 가쁘고 기분도 영 좋지 않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미세먼지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미세먼지를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지 싶다. 통제 가능한 날씨와 통제 불능의 미세먼지.

 

우리가 정치인들의 막말이나 꼴통 짓에 분개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이 나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한데 나는 도무지 그의 행동이나 말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노릇이 또 있을까.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최근에 불거진 심 모 국회부의장의 뜬금없는 막말도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하게 했다.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던 그는 이번 막말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잘 짜여진 노이즈 마케팅이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에 대해 불만이 많은 듯 보였던 그는 문재인 대통령,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서훈 국정원장, 윤석렬 서울지검장을 내란죄와 국가기밀누설죄 등으로 형사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지지하는 대다수의 국민들 또한 내란죄로 고발해야 마땅하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2013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여성의 누드사진을 검색하다가 기자에게 딱 걸려서 자신의 존재감을 전국에 알렸던 그였지만 너무 오랫동안 존재감이 없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다선 국회의원으로서 자괴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피의자로 치안본부 특수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은 바 있는 그가 자신있게 내뱉을 수 있는 죄명은 오직 '내란죄'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외부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없거나 자신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일이나 대상은 필연적으로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정치인의 막말이나 꼴통 짓은 미세먼지보다도 더 심한 화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미세먼지는 그나마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정치인의 막말이나 꼴통 짓은 도무지 통제 불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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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1 1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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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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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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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를 살아온 앞세대의 사람들은 그 고단했던 세월을 무사히 견뎌온 것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으로도 부족할거야."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때로는 3박 4일 동안 말로 풀어도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는 그 기나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반복하기도 한다. 그 엄혹했던 시절을 살았던 게 마치 뒷세대를 대신한 희생의 결과물인 양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시절에는 자신이 살고 싶은 시기를 손쉽게 골라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간혹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해서 시쳇말로 "이거 실화냐?" 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직접 겪는 경험은 소설이나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다소 무디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서 남들이 볼 때에는 참혹한 일이지만 자신은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자신이 직접 겪는 일조차 매 순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일이라고 여겨진다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이란 그만큼 놀랍다.

 

콜슨 화이트헤드가 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1800년대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한 흑인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실존했던 흑인 탈출 비밀 조직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상상해 쓴 소설로 흑인 노예에 대한 끔찍한 고문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처참한 살해 장면 등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신랄한 묘사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코널리는 그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둘을 살갗이 벗겨지도록 매질했다. 죄를 지은 순서대로 우선 체스터부터 시작했고, 그런 다음 피투성이가 된 그들의 등을 후춧가루 푼 물로 문질렀다. 그렇게 호되게 당한 것이 체스터는 처음, 코라는 반년 만이었다. 코널리는 이후로도 이틀 동안 아침마다 매질을 반복했다."    (p.49)

 

소설의 주인공인 코라는 그녀의 할머니 아자리가 아프리카에서 랜들가(家) 대농장으로 292달러에 팔려온 후 그녀의 엄마 메이블이 태어났고, 메이블은 자신의 딸 코라가 열 살이던 해에 농장을 탈출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코라는 문제가 있는 노예들의 거주지인 호브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북부에서 팔려온 시저가 그녀에게 함게 탈출하자고 청한다. 단 한 번도 농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코라는 시저의 청을 거절한다. 탈출을 시도한 노예의 결말이 어떻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저는 포기하지 않고 탈출을 계획한다. 노예로 팔려오기 전, 부모와 함께 살았음은 물론 글도 읽을 줄 알았던 시저는 매주 일요일마다 시장에 나가 동향을 살핀다. 그러다 우연히 플레처 씨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을 약속받는다. 탈출을 시도했던 흑인이 백인 구경꾼들 앞에서 산 채로 불에 태워지는 걸 목격한 코라는 시저와 함게 탈출할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잔디밭에 모였다. 랜들가에 온 손님들은 사람들이 빅 앤서니에게 기름을 바르고 불에 굽는 동안 향신료 넣은 럼주를 홀짝였다. 목격자들은 첫째 날 그의 남근이 잘려 입안에 넣고 꿰매졌기 때문에 그의 비명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장치는 연기를 피워 올리며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나무에 새긴 형체들은 살아 있는 듯 얽혀 들었다."    (p.60)

 

코라와 시저의 탈출은 험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도착한 코라와 시저는 자유인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면서 잠시 동안 안정된 생활을 한다. 코라는 읽고 쓰기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농장주의 추격은 집요했다. 그들을 돌봐주던 샘의 도움으로 코라는 추격조를 따돌리고 탈출한다. 마틴의 도움으로 그의 집 다락에서 숨어 지내던 코라는 결국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고 만다.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끌려가는 동안 코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헤어진 시저가 참혹하게 죽었다는 소식과 랜들가에서 함께 탈출했던 러비도 그들에게 붙잡혀 농장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코라가 열 살이었을 때 농장을 탈출했던 엄마 메이블의 소식도... 

 

"그녀는 가짜 안식처와 끝없는 사슬을, 밸런타인 농장의 학살을 남겨두고 앞으로, 앞으로 갔다. 터널에는 어둠뿐이었고, 저 앞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것이다. 혹은 운명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막다른 골목 - 텅 빈 무자비한 벽뿐이리라. 마지막 쓸쓸한 농담. 마침내 녹초가 되었을 때 코라는 핸드카 위에서웅크리고 잠들었다. 가장 깊은 밤하늘에 안긴 것처럼 어둠 속에 홀로 떠서."    (p.340)

 

헤택을 누리는 사람이 소수일 때 인간의 잔인함은 그 빛깔을 더하여 선명하게 드러내는 법이다. 목화 산업이 번성했던 1800년대, 노예제도가 폐지되지 않았던 미국 남부의 대농장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몇몇 농장주와 그에 동조하는 소수의 백인들이 온갖 혜택을 누리고, 그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 이하의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일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 정권도 다르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 국민의 고통도 그와 같았을 터, 해방 이후 남한의 군부 독재 시절인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따지고 보면 군부 독재로 혜택을 누렸던 몇몇 부역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의 우리 국민 대다수는 '책으로 쓰면 열 권으로도 부족'한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소득양극화가 심화되는 걸 우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의 대물립과 부의 집중이 심화되는 한 1800년대 미국 남부의 백인들에 의해 자행된 비인간적 만행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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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우리는 무척이나 정이 많고 순박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죠. 몰강스러운 세상을 향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와는 많이 달랐던 듯합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분노는 단지 안으로만 삭일 뿐이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요. 가파른 산과 산 사이를 이따금 덜컹거리며 열차가 오갔습니다. 사람들은 직접 그 열차를 타고 오갔던 건 아니지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도시의 소식들이 열차에 가득 실려 있다고 믿었던 듯합니다. 철길로부터 먼 산비탈의 밭에서도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가는 열차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달리는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기다림에 답을 주려는 듯 열차 안의 승객들 또한 열차 밖 사람들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향해 그윽이 커지다가 산 너머로 아스라히 멀어질 때까지의 그닥 길지 않은 시간이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아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리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주관적인 어떤 계기로 인해 그리움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치환될 때 우리는 현실의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도약하곤 합니다. 불가능이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마을 입구의 신작로에는 하루에 서너 번 버스가 오갔습니다. 버스가 지날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일고, 동네의 꼬마녀석들은 버스를 쫓아 한동안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 많은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말이지요. 열차가 지날 때처럼 어른들은 저만치 먼 발치에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도, 열차도 닿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인 양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멀지도 않았던 시절. 그러나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는 가깝든 멀든 그냥 다 같은 과거일 뿐 몸에 착 붙은 옷감처럼 그 감촉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지요. 50대의 어느 배우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홀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추억 속 앨범을 펼치듯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풍경이었습니다. 겨울 오후의 순한 햇살이 이제 막 산을 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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