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납치하다 인생학교에서 시 읽기 1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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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좋은 시집 한 권 골라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이런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지인 한 분이 마음에 쏙 드는 시집 한 권을 보내왔습니다. 류시화의 <시로 납치하다>. 책의 제목마저 시적이지요. '인생학교에서 시 읽기 1'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을 나는 닳아 없어질 새라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그것도 남들 시선이 없는 야심한 밤에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 줄 한 줄 외듯이 읽고, 이따금 눈을 감은 채 시가 펼쳐진 가상의 공간 속으로 단숨에 빨려 들곤 했습니다.

 

사막

       오르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류시화 시인의 해설과 함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5년 동안 '아침의 시'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시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이 책은 말하자면 시 모음집이지요. 책에 실린 시는 우리가 잘 아는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부터 프랑스의 무명 시인, 아일랜드의 음유시인, 노르웨이의 농부 시인과 일본의 동시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과 추구하는 장르마저 제각각인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이 시도 썼었구나' 비로소 알게 되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찰스 부코스키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의 소설 <우체국>을 재미있게 읽었던 나로서는 시인으로서의 그가 무척이나 생경했습니다.

 

공기, 빛, 시간, 공간

                              찰스 부코스키

 

………………(생략)…………

 

이보게 친구, 공기나 빛, 시간과 공간은

창작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러니 변명은 그만둬.

새로운 변명거리를 찾아낼 만큼

자네의 인생이 특별히

더 길지 않다면 말야.

 

책에 담긴 56편의 시들은 류시화 시인의 설명이 곁들여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시란 모름지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힘을 지닌 글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천천히 음미하듯 되내다보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알 수 없는 떨림이 전해져 옵니다. 그것은 '감동'이라는 짧은 단어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역사 저편에서 외치는 원시 생명의 깊은 울음이거나 인류 공통의 연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험

       엘리자베스 아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꽃을 피우는 위험보다

봉오리 속에

단단히 숨어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날이.

 

시인의 설명은 이따금 시에서 받았던 감동보다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엘리자베스 아펠의 '위험'이라는 이 짧디 짧은 시 한 수를 읽고 류시화 시인은 2쪽의 지면을 빼곡히 채웠습니다. 그 일부를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잠시라도 귀를 기울여 듣는다면, 수많은 꽃들이 우리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꽃들 역시 봉오리의 상태를 떨며 통과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그 개화를 격려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봉오리를 열어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을 세상과 나누는 것이 모든 꽃의 의무이다.'(p.233)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의 개화를 격려한 적이 있었을까요. 불현듯 부끄러워집니다.

 

"읽고 쓰면서 우리는 문학적이 되어 간다. 시는 영혼의 열기이다. 시를 쓰거나 읽을 때 뺨과 이마가 상기되고 머리가 뜨거워지지 않는가. 이 시들을 밤에 읽기를 권한다. 작은 조명 아래서 모두 잠든 사이에, 혹은 아무도 없는 한낮의 시간에. 시는 그렇게 만나야 영혼에 열기를 지핀다." (p.239)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지만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나는 차츰 시와 멀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얼굴에 가득 담을 수 있던 학창 시절에는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표현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시로 쓰거나 어울리는 시를 골라 읽는 일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하는 순간부터 얼굴은 내 감정의 인화지가 아닌 단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와는 상관도 없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은 스크린에 불과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면 주책없다 말하는 이가 많아진 까닭입니다. 감정을 표정에 담을 수 없다는 건 시가 나로부터 멀어졌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루의 성긴 여백 속으로 짙은 어둠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습니다. 금요일이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저녁입니다. 시와 멀어진다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었던가 봅니다. 류시화 시인의 <시로 납치하다>를 읽으며 나는 왠지 슬퍼졌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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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기온이 빠르게 오르더니 낮에는 조금 덥다 싶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며칠 지속되던 미세먼지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탁 트인 시야에 날씨마저 더할 수 없이 좋았던 탓인지 괜스레 마음만 싱숭생숭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근처 공원을 찾아 가볍게 산책을 했습니다. 공원에는 나처럼 산책을 나온 사람, 아이와 함께 봄을 즐기는 사람, 벤치에 앉아 장기를 두는 사람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절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벤치에 앉아 소일거리 삼아 정치 얘기를 하는 할아버지들도 보였습니다. 화이트데이를 맞아 들뜬 마음으로 검찰에 출석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지더군요. 죄가 있으면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은 듯 보였습니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풍경이지요. 포토라인에 서서 그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저는 오늘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무엇보다 민생경제가 어렵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매우 엄중한 때 저와 관련된 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또한,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신 많은 분과 이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분에게도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습니다만 말을 아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라는데 역사에서 이번 일로 마지막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다는 말씀드립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핵실험이라도 한 번 더 했더라면 이 전 대통령의 말에 수긍을 하는 사람이 좀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 탓인지 그의 말은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가오가 서지 않았죠. 그 바람에 공원을 찾은 할아버지들에게도 외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말을 아껴야 한다고 다짐했던 건 잘한 일인 듯합니다. '이거 다 새빨간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하고 일갈했던 그의 말을 타인의 음성으로 듣게 되었을지도 모를 테니까요.

 

검찰 조사를 받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에 없던 사실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어지니까 말이죠. 안타까운 소식은 '빅뱅 이론'으로 유명한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생일이 같았던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탄생일인 오늘 죽음을 맞았습니다.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현대 물리학에 크게 기여했던 그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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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4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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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6 1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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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사이먼 가필드 지음, 남기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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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에 읽었던 <사막별 여행자>는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 투아레그 족으로 살았던 저자가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된 <어린 왕자>에 매료되어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자신이 살았던 이질적인 두 세계에 대한 비판과 깨달음을 담은 책이다. 저자인 무사 앗사리드는 원시 유목민처럼 살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문명화된 프랑스 현대인의 삶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바람직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사막별 여행자>에서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옮겨보면 이랬다. '우리는 시간을 재지 않는다. 시간뿐만 아니라 돈과 거리 또는 물건의 양을 재거나 측량하는 단위도 없다. 우리에게 양 한 마리는 그저 양 한 마리일 뿐이다. 몇 킬로그램의 고깃덩어리가 아닌 것이다. 현대인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호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면서 재고로 남아 있는 시간을 파악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사이먼 가필드가 쓴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사막별 여행자>가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니다. 자연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그 기준이 옮겨오기 시작한 기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 책은 시간에 대한 역사, 개념, 산업, 철학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미처 몰랐던 시간의 단면들을 훑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왔던 자연의 시간이 과학의 발전과 함께 시간을 재고 측량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객관화된 인간의 시간을 갖게 된 현대인이 시간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의 노예가 되어 시간에 쫓기고 평생 동안 바쁘게 살아야만 한다는 건 어찌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을 정형화하고 객관화할수록 우리의 삶으로부터 시간은 더 멀어지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인간들의 시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다루었다. 시간 측정, 시간 통제, 시간 판매, 시간에 관한 영화 만들기, 약속 시간 이행, 시간의 불멸화 그리고 시간의 의미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다. 지난 250년간 시간은 어떻게 우리 일상에 파고들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수천 년 동안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방향을 찾다가 지금은 왜 전화와 컴퓨터로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 하는 걸까? 그것도 하루에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강박적으로. 이 책을 쓴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간과 관련하여 벌어진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전부 미친 듯이 시간에 집착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함이다." (p.11)

 

2,500년간 인간이 미워하고 욕망했던 애증의 존재인 시간에 대해 저자는 총 15개 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 1부 '자연의 것에서 인간의 것으로'에서는 태양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던 인간이 어떻게 표준시간제를 채택하고 시간 질서를 갖추었는지를 탐구하고, 2부 '산업혁명 이후의 시간혁명'에서는 산업혁명 전후 급격하게 진행된 시간혁명을 다룬다. 기술의 발전으로 좀 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된 250년간,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탐구한다. 3부 '잡힐 듯 잡히지 않는'에서 저자는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향수와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인간의 이중적인 노력을 말하고 있다.

 

"물론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 관리에 관한 나름의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결정할 때 소요 시간도 계산해 보아야 한다. 본인의 판단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일도 위기라고 해석될 수 있는 문제들이 느닷없이 생겨 막히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딸기나 수확하면서 사는 게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일 저녁 4시간 동안 부모의 얼굴을 보는 게 2시간 동안 보는 것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갑절의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수많은 시간 관리 서적을 읽는다고 그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p.338)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 살면서도 정작 시간의 실체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개념이나 이론을 설명하면 할수록 시간은 더욱 멀어지고 어렵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사람들이 직접 겪은 체험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단면들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시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흥미롭게 풀어냄으로써 물리적인 시간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오늘도 얼쩡거리다 보니 벌써 하루가 다 가고 말았다. 특별한 일로 시간을 알차게 보낸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봄빛 완연한 오후 햇살이 베란다 유리창을 뚫고 집 안으로 가득 쏟아진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고 황홀하다. 나른한 봄 햇살 속을 느린 시간이 유영하고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시간과 싸우며 20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기차를 타기 위해 뛰었고 결승선 테이프를 끊기 위해 달렸으며 능률적인 세상을 만든다고 앞만 보고 뜀박질을 했다. 이제 속도를 늦추어야 할 때다. 속도를 늦춘다는 건 도시를 떠나 밭에서 쟁기질을 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런 일을 감당해 낼 것인가?"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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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펼쳐질 때 정말이지 묘한 기분이 든다. 눈이 쌓인 겨울에 보는 붉은 동백꽃이라든가 봄에 내리는 흰 눈과 같은 풍경 말이다. 가는 계절에 대한 미련 때문일지도 모르고 다가올 계절에 대한 아련한 환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새벽 산행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밤새 내리던 비가 갑자기 함박눈이 되어 소담스럽게 흩어졌다. '아, 아름다워라!' 미소가 절로 번졌다.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국내의 사회 문화적 변화도 변화지만 대북 특사의 방북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 정세 또한 급변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이거 실화냐?'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오는 4월에 남북 정상회담이 결정되더니 5월에는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역사적인 첫 회담을 갖기로 했다. 봄에 보는 눈 내리는 풍경이 이런 기분일까. 그동안 우리는 '반공'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반도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큰 섬에서 살아왔는데 이번 회담이 잘만 된다면 우리는 대양과 대륙을 잇는 반도인으로서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어느 정도 해소될 테고 대북 적대시 정책 탓에 일본에 대해 차마 하지 못했던 말도 속 시원히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반공' 프레임 하나로 자신들의 기득권과 정권을 지켜왔던 보수 야당이 그럴 테고, 친일 행적으로 손해를 보기는커녕 대한민국의 상류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아왔던 친일 후손들이 그럴 것이다. 뭔 일만 있으면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상관도 없는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나와 깽판을 놓던 개신교 세력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남과 북의 평화 분위기는 좋았던 호시절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아주 작은 우연에서 비롯되어 끝내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그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일어난 미투 운동이 공고했던 대한민국의 잘못된 성의식을 변화시켰고, 대북 특사단의 방북이 대한민국이라는 섬을 반도로 만들려 하고 있다. 아름다운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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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 이 문장이 당신에게 닿기를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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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듣게 될 때 가슴에는 '쿵' 하고 멍이 든다. 아득한 심연을 향해 추락하는 말의 무게와 현실을 부정하고픈 나의 도리질이 가슴 언저리에서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부딪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라거나 '오늘 잠들면 내일 아침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같은 말들. 최승자 시인의 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에서 시인은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고 읊었다. 최갑수 작가의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을 읽다가 '사랑은 사라지려 할 때만 사랑 같았다'는 말에 시선이 멎었다.

 

"파도는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했다. 뒤돌아보면 발자국은 어느새 지워지고 없었다. 끝끝내 삶은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 모래밭에 놓인 고래의 뼈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헛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삶은 더 절실해야 하는 건 아닐는지. 모래밭에 당신의 이름을 꾹꾹 눌러 써보았다. 사랑은 사라지려 할 때만 사랑 같았다." (p.161)

 

시인이자 여행작가이면서 사진가이기도 한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발견한 사랑의 문장에 자신이 찍은 사진과 글로 전하고픈 자신의 느낌을 덧붙였다. 그렇게 모은 [사랑하는 문장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을 열어 보여줄 수도 없는 사랑의 순간들을 작가는 자신이 찍은 한 컷의 사진 속에, 평범한 일상을 문득 도드라지게 바라보던 순간의 시선에 담아낸다. 그리고 정제된 감정으로 그 순간의 느낌을 글로 적는다.

 

"여행을 떠나 보면 안다.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아름답고 선명하다는 것을." (p.116)

 

'온기가 있는 생물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라고 했던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외롭지 않은 인생은 존재하지 않기에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랑의 모습은 순간순간 다를지언정 그 안에 깃든 푸근한 위로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지하철 안에서 내게 선뜻 내주었던 당신의 어깨와 꽁꽁 얼어붙던 어느 겨울날 차갑게 언 손을 슬몃 잡아끌던 당신의 따뜻했던 손,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볍게 감춰주던 당신의 가슴, 그리고 불안에 떠는 나에게 멀리서 전해주던 당신의 미소.

 

"당신은, 함께 행복해도 좋을 사람이 아닌, 나와 함께 불행해도 좋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서로의 불행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시절, 은유와 비유와 상징을 내던지고 명료하고 현실적인 사랑의 말만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밤들.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걷던 시간들." (p.212)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비록 보지 못하는 순간은 이따금 있을지언정. 이 책 최갑수의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을 읽다 보면 작가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만나 깊은 슬픔을 자아내거나 싱긋 미소 짓게 되는 순간이 더러 있다. 작가도 나도 '이것이다' 하고 사랑의 실체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어렴풋한 사랑의 교감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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