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이따금 시계열의 연속선상에서 누군가 한 부분만 뚝 떼어 들어낸 듯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공란의 삶이 있게 마련입니다. 밤꽃이 피고 지던 지난 보름여의 시간 동안 나는 그야말로 목숨만 겨우 유지한 채 죽은 듯 지냈었나 봅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꼭 해야 할 일만 겨우 하면서. 마치 나는 내 삶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지켜보는 듯 그렇게 방관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한낮의 더위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슬몃 씻겨 사라지고 바람을 벗 삼아 저녁 산책에 나선 날이면 하루의 기억도 바람결에 무심히 흩어지곤 했습니다.

 

아픈 아내를 돌보며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일상을 살아내는 동안 6.13 지방선거가 있었고, 2018 러시아 월드컵이 개막했고, 연분홍 자귀나무 꽃이 만개했습니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금세 초록물이 들 것 같은 한여름의 시간들이 지금도 무심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오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3김 시대로 통칭되던 민주화의 시기에 그도 어쩌면 자신의 지난 삶을 조금쯤 반성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영욕의 삶을 살게 마련이니까요.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을 읽고 있습니다. 손에 잡고 읽은 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진도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멍하니 글자만 읽다가 처음 읽었던 부분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를 여러 번, 온전히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날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햇살은 무척이나 따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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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의 진실 - EBS 다큐프라임_교육대기획
EBS 다큐프라임 「대학 입시의 진실」 제작팀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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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도 참 지지리도 없지 아들은 지금 중3, 새로 마련될 2022학년도 대학 입시제도 개편안에 따라 대입시를 치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입시 개편안이 매스컴에 나올 때마다 부모 된 자로서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나는 국가 교육회의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회에서 어제 발표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시나리오' 4가지 방안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봐도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학생부의 기재 방식이나 각 대학별 수시 전형의 복잡성을 어떻게 손볼 것인지는 밝히지도 않은 상태이니 중3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걱정이 앞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은 마치 곧 경기에 나설 선수들에게 적용될 규칙도 채 마련하지 못한 꼴이니 교육부의 나태한 행정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대학 입시의 진실>이다. 2017년 5월에 방송된 EBS 다큐프라임 교육대기획 '대학 입시의 진실'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유튜브 조회수 100만 뷰를 기록하는 등 방송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화제를 모았던 것으로 안다. 그도 그럴 것이 기획을 시작한 후, 총 1년 6개월의 제작 기간이 소요됐을 뿐 아니라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3만 8천 명 교사, 학생, 학부모 설문 조사를 통해 입시 현장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쳤다. 1부 '학생부의 두께', 2부 '복잡성의 함정', 3부 '엄마들의 대리전쟁', 4부 '진짜 인재', 5부 '교육 불평등 연대기', 6부 '대학 입시, 불편한 진실을 넘어서'의 총 6부작으로 제작되었던 방송은 같은 제목으로 고스란히 책에 담겼다.

 

"현재 대학 입시 당락을 좌우하는 학생부는 더 이상 학생 본인의 노력에 달린 게 아니다. 학생부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건 부모의 배경과 소득, 그리고 투자다. 그렇게 만들어진 학생부가 학생을 선발하는 중요한 평가 자료로 활용되는 것이 현 대학 입시 제도의 민낯이다." (p.328)

 

교과 영역뿐 아니라 비교과 영역에서 학생의 다양한 재능도 두루 평가하겠다는 취지로 마련된 학생부 종합전형은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교육부와 교사들의 논리는 한결같았다. 인공 지능,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단순 암기력을 테스트하는 과거의 선발 방식으로는 맞지 않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그러나 도입 배경이나 취지와는 달리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노력과 능력에 근거한 공정한 선발은 사실상 물 건너가고 말았다. 말하자면 지역이나 빈부, 부모의 직업에 따라 교육격차가 발생하고 부모의 금전적 투자에 따라 학생의 능력은 마구 부풀려졌다고 봐야 한다. 돈과 정보력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인재가 4차 산업혁명에 적합한 인재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롯이 노력만으로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되어 주었던 교육은 오늘날에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상위 계층의 부를 대물림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노력만으로는 희망을 찾기 힘든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p.342)

 

우리나라의 사교육 1번지 강남 3구는 부산 인구의 절반도 되지 않지만 서울대생을 더 많이 배출하는 현실, 부모의 정보력과 경제력이 자녀의 대학을 결정하는 이 현실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능력이 출신 대학에 의해 평가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훌륭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명목 하에 입시의 공정성을 무참히 짓밟는다면 나는 그 제도가 좋다고는 결코 말하지 못하겠다. 입시에서 공정성보다 더 큰 가치가 과연 있을까? 학부모, 학생, 교사 모두 정시가 가장 공정하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수시 선발 비중을 매년 늘려왔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교육부, 자녀 교육에 투자할 여력이 충분한 소수의 상위 계층, 학생들의 수능 성적이 곧 자신의 역량으로 평가되는 것을 꺼리는 교사들 어쩌면 그들의 이해가 합쳐져 학생부 종합전형이라는 입시 괴물을 탄생시킨 건 아닌지... 입시전형이 복잡할수록 부정한 수단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터,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이 우리 사회의 유일한 계층 사다리인 교육을 고사 직전으로 몰고 가고 있다. 계급사회로의 이러한 퇴행이 현 정부에서 하루빨리 고쳐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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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아랫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달라는 은근한 압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하고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심심찮게 생길 수 있다. 이를테면 존댓말을 쓰는 이면에는 '내가 너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괜찮지만 특별히 너를 배려해서 하는 것이니 너도 나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나를 함부로 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라고 할지라도 존댓말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기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일 수도 있고 말이다. 게다가 그런 심리는 주로 열등의식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학벌이든, 지역이든, 가난이든 아무튼 복합적인 어떤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에게조차 차별을 받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그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미리 상대방에게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방도 자신에게 예사말을 쓰지 않도록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존댓말을 쓴다는 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사람들의 기저에는 열등의식과 함께 강한 권위의식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보수적인 자신의 철학을 상대방에게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이 비단 윗사람에게는 반드시 존댓말을 사용해야 하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존댓말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어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이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예사말을 주로 사용하는 외국의 언어에도 존댓말이 존재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자녀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쓰는 부모의 심리에는 자신의 자녀가 존댓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여 성인이 된 후에도 남들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기대심리, 또는 우리 아이는 다른 집 아이들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나 직장에서 아랫사람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는 사람의 심리 기저에도 '너는 나의 권위에 절대 도전하지 말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주장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한 일반적 사실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경우가 다반사라는 말이다. 존댓말을 강요하는 보수적인 철학을 가진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에게까지 자신의 신념을 강요할 권한은 없다. 존댓말을 쓸 것이냐 예사말을 쓸 것이냐의 판단은 실수와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배우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나이가 아주 어린 아이들도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게 존댓말인지 예사말인지 금세 판단하곤 한다. 상황에 따라 어떤 게 자신에게 유리한지 아이들은 쉽게 학습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만의 당연한 권리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자녀가 자신의 소유물인 듯 행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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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반양장) - 새로운 부의 법칙
롭 무어 지음, 이진원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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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에 자주 마주치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다. 1층에 슈퍼가 있는 3층짜리 상가 건물 앞의 인도와 연결된 공터에서 할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한지 낡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슈퍼와 슈퍼 옆 건물의 의류매장에서 나오는 빈 박스를 공터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놓곤 하셨다. 할아버지의 몸에 걸쳐진 옷도, 할아버지의 몸을 지탱하는 휠체어도 할아버지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몹시 낡아 있었다. 겉보기에 할아버지는 궁핍한 촌부로 평생을 살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슈퍼의 주인으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할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평생을 농부로 살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가 소유했던 땅이 택지로 수용되면서 상당한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고 슈퍼가 있는 건물과 바로 옆의 의류 매장이 있는 건물을 매입하고도 많은 돈이 남아 통장에 넣어두었음은 물론 매달 받는 임대료도 한 푼 쓰지 않고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상당한 알부자임에도 지독한 자린고비라는 전언이었다.

 

영국인 사업가 롭 무어가 쓴 <머니>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얼굴이 '조물주 위의 건물주'인 그 할아버지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편한 몸으로 언제나 한결같이 박스를 정리하는 모습은 나와 같은 범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그만한 돈이 있다면 남은 여생을 슬슬 여행이나 하면서, 또는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배우는 등 젊은 시절에는 바빠서 미처 시간을 내지 못했던 여러 취미생활을 하면서 보낼 텐데 차들이 오가는 도로변에서 하루 종일 그 차들로부터 나오는 매연을 마셔가며 박스를 모은다는 게 그만한 자산가가 할 일은 아닌 듯 여겨졌다.

 

"돈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있다. 부자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양이 된다. 돈은 그것을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동하기 때문에 부는 언제나 지배 법칙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할 것이다." (p.195)

 

'서른 살에 부와 성공을 거머쥔 젊은 백만장자 사업가'로 소개되는 저자는 화려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대학 시절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한 알코올 중독자로 몇 년을 보냈으나, 머니 게임의 룰을 직접 경험하며 불과 3년 만에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획득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극과 극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갖고 있는 부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는 새로운 부의 규칙과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평생 열심히 일하고도 부자가 되기는커녕 빚에 시달리며 투자자와 시스템을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문제는 아마도 돈을 버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거나 돈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라고 진단한다.

 

돈 많은 부모나 좋은 운을 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부에 대한 생각을 재설정하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똑똑하게 저자가 발견한 부를 만드는 공식을 실행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행복하게 돈을 벌 수 있음은 물론 창출한 부를 바탕으로 좋은 부모, 자상한 배우자, 사회적 영향력이 큰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반인이 갖고 있는 돈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그들이 이룰 수도 있는 부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러한 편견을 없애고 제대로 된 부의 정의와 목적, 역사, 흐름, 시스템, 자연적 경제 법칙을 깨우치고 저자가 제안하는 부를 증식시키는 방법을 차례로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며 빠른 실천을 권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렇게 이룩한 부로 부의 법칙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쓰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당신의 유산을 교육과 지원의 형태로 전달하는 게 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건 그가 깨달음과 지식을 얻게 해주는 것만큼 유용하지 않다. 위대한 자선가들이 기부만큼이나 교육에 투자하고, 재단을 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당신은 유산으로 수십 세대를 교육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p.248)

 

우리는 흔히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는 말로 힘들게 사는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곤 한다.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사람이 '내려놓기'나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기도 하고, 세속의 욕심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에 으쓱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만난 부자 중에 돈 때문에 불행하다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반박한다. 가장 선망하는 대상이면서 아닌 척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부는 이 세상의 모든 선한 행동을 위한 힘이자 보편적 교환 수단이다. 부는 모든 성장과 진화에 연료를 공급하고 자금을 댄다. 돈은 능력의 척도이자 가치의 메커니즘이자 척도이다. 돈은 창조성과 개인적 표현을 생산으로 바꾼다. 돈은 커뮤니티와 사회를 연결하는 관심이자 서비스다. 부는 모든 혁신에 자금을 대고 그것을 가속화하며 세계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돈은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관심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p.365)

 

책의 내용과는 다른 얘기지만 나는 정말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던 탓에 용돈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고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돈에 대해 내가 배웠던 것은 온통 부정적인 인식이 다였다. 게다가 돈을 손에 쥐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돈을 관리하는 방법은 배울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결혼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아내는 돈을 지키고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되기 어렵다. 일단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강한 불만을 표하면서도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그런 편향된 인식을 버리는 게 부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란 걸 잘 알지만 성장 과정에서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습득한 편견이 쉽게 고쳐질 리 없다. 스스럼없이 담배와 가까워졌던 사람이 담배와 결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편견을 버리면 돈이 보일 텐데... 아무튼 나는 저자가 말한 내용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간절히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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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하거나 마음이 급하면 나도 모르는 결에 헛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비단 나에게 해당하는 것만은 아닌 듯 오늘 아침에도 그와 같은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제의 선거 결과로 잔뜩 흥분했었던지 한 친구 왈, "축하드립니다!" 해야 할 것을 그만 "진보드립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무슨 소린가 한동안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는데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눈치챈 그 친구 왈, "죄송합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한다는 게 그만 선거 생각에 골몰하다가 '진보드립니다'라고 잘못 나왔어요."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실수는 잦아지게 마련이다. 문장의 의미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의도치 않게 끼어들기도 하고 말이다. 흔히 쓰던 단어도 말하려는 순간 도통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러나 어쩌랴. 젊었던 시절의 총기는 다 옛말, 그런 실수쯤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언제까지고 흐르는 세월만 한탄하며 자신의 과거를 그리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거 결과를 보니 참패한 보수세력이 그런 꼴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왔던 자신들의 호시절에 흠뻑 젖어 있었던 탓인지 변화의 필요성은 전혀 생각도 않고 있던 그들이 아닌가. 그런데 TK지역으로 쪼그라든 참담한 선거 결과를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그런 자신들의 처지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더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서도 민주당이 승리하지 않았는가.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제야 박정희의 망령에서 깨어난 게 아닌가. '축하드립니다' 대신에 '진보드립니다'로 바꿔도 괜찮은 듯하네, 친구여. 뜻만 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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